제29회 충북수필문학상 심사평
사제(司祭)의 시선으로 발견하는 사랑
이방주(수필가, 문학평론가)
충북수필문학회가 수여하는 제29회 충북수필문학상은 임형묵 수필가의 작품 <팽이>와 <그가 머무는 방>으로 결정했다. 수상 후보자들의 작품성이나 문학 활동 실적이 모두 훌륭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기 힘들었으나 의논을 거듭하여 심사위원 전원이 합의하여 결정하였다. 수상자인 임형묵 수필가님께 축하드리고 내조에 온 힘을 기우리신 가족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충북수필문학상은 회원들의 창작 의욕과 문학성 제고를 위해 충북수필문학상 규정에 따라 후보를 선정하고. 후보 중에서 작품성과 문학 활동 참여도를 평가하여 시상한다. 우리 충북수필문학회는 100명 회원을 바라보고 금년에 38집을 낼 만큼 연륜이 쌓였으며 그동안 29명의 충북수필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회원 모두가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전국 수필 문단에서 활동도 활발하다. 현재까지 충북수필문학상을 수상한 회원들은 충북문단은 물론 전국 수필문단에서 활발한 활동으로 창작역량을 발휘하여 충북수필문학상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어서 매우 감사한 일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해서 신성함을 잃은 신의 존재성에 대해 개탄했다.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문제를 신에게 의탁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여 과학이 삶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편리한 세상이 온 것은 이미 오래전 이야기이다. 신의 신비성은 과학의 신비함으로부터 추방당하게 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니체의 말대로 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이 신을 죽인 것이다.
사람들은 오늘을 빅 데이터 시대라고 호들갑을 떤다. 데이터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어느 날부터 인간의 눈에 신의 신성함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을 팽개친 인간은 마주하는 존재의 신비와 고귀함을 보는 시력도 상실해버렸다. 이 시대 사람들은 빅 데이터에 취해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가장 소중한 자신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 민족은 집안의 어른이나 마을의 어른, 경륜 높은 국가의 어른을 존경하고 거룩하게 추앙해 왔다. 그러나 그런 어른들은 신성함도 존엄성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어른들은 공동체의 문제는 물론 자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오히려 과학이나 젊은이들에게 의탁해야 할 형편이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비극 속에서도 임형묵 수필가의 시선은 어른들에 대한 공경과 사랑에 머물러 있다. 인간에게서 사랑을 발견하는 고전적인 시인의 눈을 잃지 않았다. 인간의 거룩함이나 신비로움을 볼 줄 아는 문인이다. 문학 창작은 대상의 인식에서 첫발을 떼어야 한다. 수필을 일상에 대한 해석이라고 한다면 대상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형상화하여 독자에게 전달하여야 공명을 얻어낼 수 있다. 수필 창작 과정에서 인식의 단계는 대상을 발견하고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깊이 있게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깊이 있는 관찰을 통하여 대상의 본질이 파악되면 이제 그를 사랑하게 된다. 대상에 대한 사랑은 수필가의 눈을 영적인 시선으로 변환시킨다. 여기에 이르러 그는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대상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대상의 본질을 통하여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우리는 통찰이라 한다.
대상을 통찰한다는 것은 존재자에게서 존재를 발견하는 신비스러운 눈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적이고 사제와 같은 시선을 갖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눈으로 대상을 인식하면 신비스러운 언어로 대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여 대중에게 전달한다. 마치 사제가 그들의 종교의식에서 대중의 소망을 신의 언어로 신에게 대신 전해 올리는 발원과 같다. 이것을 문학 창작에서 형상이라고 한다. 문학 작품의 창작은 존재자에게서 존재의 신비스러움을 인식하고 대중에게 신의 말씀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임형묵 수필가는 대상 앞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을 줄 아는 시선이 된다. 신비스럽고 거룩함을 발견하는 작가로서의 눈을 회복한다. 그것은 바로 대상에 대한 곡진한 사랑이다. 정보 과학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를 맞아 과학과 정보가 신을 대신할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신이 죽었기에 시(詩)도 죽었다고 전전긍긍할 때 그는 유유히 인간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다. ‘팽이’에서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에게서 자아를 돌아본다. 비정한 ‘아버지’에게서 자신의 비정함을 발견한다. 팽이와 팽이채를 상관물로 부모님이 살아온 부부의 삶을 형상한다.
공자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어짊 즉 인(仁)에서 찾으려 했다. 인이란 관계를 전제로 한 사랑이다. 관계를 전제로 한 사랑이란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기본적인 남은 바로 가족이다. 사실 가족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번거로운 존재이다. 가족 관계는 무조건 사랑하게 되고,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할 것이라고 신뢰하고, 그렇게 사랑해야 하면서도 후회하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그래서 효(孝;웃어른에 대한 공경)와 제(弟;손아래에 대한 사랑)를 인의 근본으로 삼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족에 대한 사랑이 수필 <팽이>와 <그가 머무는 방>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 두 작품과 함께 임형묵 수필가의 다른 몇 편의 수필을 읽으면서 모처럼 슬픔을 함께하는 곡비(哭婢)와 같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버지가 집에 있어도 어머니는 혼자였다. 내가 집에 가도 어머니는 혼자였다. 배곯아 허기져도 같이 일할 사람 옆에 없어서, 이마에 맺힌 땀 닦아주며 목마를 때 막걸리 한 대접 따라주는 사람 없어 대신 콩대를 두드리고 들깻단을 쳐댔다. 아버지가 팽이채를 집어 들면 어머니는 주저앉고 어머니가 돌면 아버지는 슬그머니 채를 내려놓지 않았던가. 오죽하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수필 <팽이>에서
인용문에서 아버지로부터 소외된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엿볼 수 있다. 팽이와 팽이채라는 상관물로 하여 화합하지 못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부부관계를 표현하였다. 어머니는 외로울 때마다 애창곡이 된 ‘아미새’와 ‘고장 난 벽시계’를 내게 들려주었다. 작가는 덩실덩실 춤추다 바로 흐트러지는 어머니의 노래를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밉기만 했던 사람, 아름답지만 애간장을 태웠던 남자’라고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표현했다. 이 또한 애잔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그가 머무는 방>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이 들어갈수록 누구든 외로움을 탄다. 남들 눈에는 누릴 것, 소망하는 것 다 이룬 것처럼 보여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목말라한다. 서녘 하늘에 몸을 누이는 해처럼 그리운 대상을 멀리한 채 깊은 산속이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성공과 출세, 부와 명예를 바라지도 않고 그저 건강한 몸으로 가족들과 살 비벼가며 살고 싶어도 그리하지 못해 섬 같은 공간에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다. 광장으로 나가고 싶어도 발짝을 떼어 놓을 수 없는 처지여서 몸부림치는 이도 있다.
수필 <그가 머무는 방>에서
이 글은 요양원에 입원한 노인들에 대한 연민을 드러낸 작품이다. 세상 모든 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급선무는 근본이 되는 일, 가까운 것부터 해결하는 일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가족이 아니라도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돌아보고 있다. 현대사회의 어른들의 모습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늘 어찌할 줄 몰라 방황하게 된다. 수필은 대상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또한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바로 고백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어머니의 애처로운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대쪽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비판이 따를 수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비정함을 고백해야 한다. 고백은 남김 없어야 하고, 감춤도 없어야 한다. 고백은 왜곡해도 안 되고 과장해도 안 된다. 부끄러움 없이 낱낱이 고백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임형묵 수필가는 두 작품에서 아버지의 비정함을 숨김없이 고백한다. 그런데 고백하는 순간 부끄러움은 사라진다. 그것은 부끄러울 것 같은 고백의 내용은 작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독자 모두의 부끄러움이 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에 대한 공감으로 오히려 더 큰 미적 공명(共鳴)을 가져온다. 이것은 수필 창작과정에서 형상이 주는 효과이다.
‘세상을 걱정하려거든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수필 창작에서 세계의 자아화 과정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세계에서 발견되는 의미를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대상의 본질과 일치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여기서 대개의 작가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한다. 작가는 <팽이>에서 자신을 매섭게 질타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독자들은 작가를 따라 스스로를 질타한다. 이것이 공명이고 문학적 치유 효과이다.
밖으로 나도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나는 커서 저러지 말아야지……. 그런데 부전자전인가. 어느 때부턴가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하던 짓을 따라 하고 있었다. 때론 팽이가 되고 어떤 때에는 채가 되어야 하는데 중심을 잃고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나이 들어 장가들고 애를 낳아도 마찬가지였다.
수필 <팽이>에서
수필 창작 과정에서는 자아 성찰의 과정을 통하여 자아의 성장과 변환을 가져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카타르시스 효과를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수필의 치유효과를 말한다. 이와 같은 자아 성찰의 과정을 통하여 작가는 스스로 성장하고 독자를 치유한다.
문학이 인식과 형상의 과정이라 하고, 수필을 치유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임형묵 수필가는 충북 음성 출신으로 2003년 『문학 21』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들어와 20년간 수필을 썼다. 그에게 작품 창작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열심히 염불을 외면서도 잿밥에는 눈 돌리지 않았다. 문학 활동이 존재 드러내기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곁눈질을 한 적이 없다. 충청북도교육청 행정공무원으로서 교육발전에 묵묵히 이바지하면서 작품을 통하여 세상에 대한 인식을 드러냈다.
2007년 첫수필집 『물소리 사람 사는 소리』를 발표한 이래 2011년에 『오늘은 날고 싶다』, 2022년에 『새도 언어를 갖고 있다』를 펴냈다. 서두르지 않았지만 게으르지도 않은 작가이다.
임형묵 수필가가 제 29회 충북수필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을 마음으로 기뻐하며 다시 한 번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이제 현직에서도 은퇴하였으니 고요한 마음으로 사색하면서 더 깊이 있는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기쁨을 주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장 : 김홍은
심사위원 : 박영수 장병학 이방주 김윤희
팽이
임 형 묵
팽이를 후리고 싶은 마음에 몸이 들썩인다. 공연장에 모인 구경꾼들은 흘러나오는 민속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고 눕혀 놓은 절구통을 막대기로 두드리며 신명을 즐기지만, 그들을 뒤로하고 팽이채를 집어 든다. 팽이를 양쪽 손으로 쥐고는 힘껏 돌린다. 중심을 잡지 못한 팽이가 고꾸라진다. 그러기를 몇 번, 땅에 곧추서는가 싶어 채찍으로 힘을 가하는데 또 쓰러진다.
팽이의 모양이 어릴 적 가지고 놀던 것과 별다르지 않아 정감이 간다. 위는 뭉툭하고 아래는 뾰족한 역삼각형에다 그 끝에는 쇠구슬이 박혀 있다. 속이 단단한 나무를 원형으로 깎아 만들었는데, 자작나무인지 박달나무인지 구별하지 못하지만 손때가 어지간히 묻어 있어 추억이 되살아나게 한다. 그런데도 구경꾼들은 팽이엔 관심이 없다. 앉아 쉬며 음악을 듣고 음료수를 마시며 춤꾼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린다.
팽이는 혼자 돌지 못한다. 누군가의 힘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채가 되려 하지 않았다. 울타리 안에서 지내기보다 대폿집에서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고 남는 시간엔 다방에서 소일했다. 객지에서 한 달에 한 번꼴로 주말에 집에 들러도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 낚시터로 내달았다. 대학을 나온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열아홉에 시집와 가정부처럼 일만 했다. 새벽부터 소죽을 끓이고 절골에서 물지게로 우물물을 길었다. 들에 나가는 게 아버지와 정을 나누는 것보다 마음 편했는지 나를 비롯해 여동생들이 학교에 가지고 갈 도시락을 툇마루 한옆에 챙겨놓고는 일터로 갔다. 둘째 여동생을 낳기 이틀 전에도 똥지게를 지는 어머니였다.
결혼은 사랑을 떠나 가족을 책임지는 일이다. 어느 하나가 비틀거리면 중심을 잡아주고 힘들어하면 부둥켜안고 가야 한다. 살다 보면 힘든 날이 얼마나 많은가. 넘어지고 부딪히고 상처받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부족함을 메워 줄 반쪽을 그리워한다. 기대고 싶어진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밖으로만 돌았다.
팽이와 채가 따로 노는 격이다. 얼굴도 모르고 중매로 만나 결혼했을지라도 첫날밤부터 잠자리를 거부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어머니는 아버지를 멀리했고, 어머니의 투정이 거듭될수록 아버지는 하숙집에 머무르는 시간을 늘렸다. 신랑 될 사람이 땅마지기 있는 부잣집이고 대학을 다니는 엘리트라는 중매인의 말에 현혹되어 얼굴도 모르고 시집온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까. 어머니는 구석에 놓인 팽이처럼 혼자서 들에 나가고 홀로 밥상에 앉았다. 얼굴 잘생긴 신랑이 남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될지 모르나 속 빈 강정처럼 허울만 좋았다.
팽이는 채를 든 사람의 기분에 따라 춤춘다. 채 따라 집안 식구들은 울고 웃는다. 밖으로 나도는 아버지가 미웠다.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나는 커서 저러지 말아야지……. 그런데 부전자전인가. 어느 때부턴가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하던 짓을 따라 하고 있었다. 때론 팽이가 되고 어떤 때에는 채가 되어야 하는데 중심을 잃고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나이 들어 장가들고 애를 낳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런 나를 꾸짖지 않았다. 남편이 싫으면 애들도 눈 밖에 나는지, 내가 집에 자주 들르지 않아도, 전화로 안부를 수시로 여쭙지 않아도 나무라지 않았다. 일을 나가면서도 개떡을 쪄 살강에 얹어 두고 출출할 때 먹으라던 어머니였는데, 떡은커녕 그런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에 있어도 어머니는 혼자였다. 내가 집에 가도 어머니는 혼자였다. 배곯아 허기져도 같이 일할 사람 옆에 없어서, 이마에 맺힌 땀 닦아주며 목마를 때 막걸리 한 대접 따라주는 사람 없어 대신 콩대를 두드리고 들깻단을 쳐댔다. 아버지가 팽이채를 집어 들면 어머니는 주저앉고 어머니가 돌면 아버지는 슬그머니 채를 내려놓지 않았던가. 오죽하면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날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운남성 민족촌 거리를 걷는다. 상점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경쾌하지만 애절하다. 사연이 있는 듯 비련의 음조가 풍긴다. ‘아미새’와 ‘고장 난 벽시계’. 시골에 갈 때마다 어머니가 내게 들려주는 노래다.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애창곡이 된 두 곡. 때로는 덩실덩실 춤추며 부르지만 얼마 안 가 음정이 흐트러진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밉기만 했던 사람, 아름답지만 애간장을 태웠던 남자, 그리움에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고장 난 벽시계는 멈춰 섰는데 세월은 멈추지 않는다며 속울음 삼킨다.
혼자 부르는 노래는 슬프다. 아무리 가락이 좋아도 들어줄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한다. 혼자 부르면 흥이 나지 않거니와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처럼 가락이 서걱거리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흙에 마음 붙이고 산단다. 손뼉 치며 노랫가락에 장단 맞추며 살자 해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몸 맡기는 게 편하다며 시골에서의 삶을 고집한다. 비대칭의 몸을 쇠구슬에 의지하는 팽이의 몸짓으로 상추와 옥수수를 심고 화단에서 꽃을 가꾼다.
팽이는 도는 동안 방향을 바꾸지 못하는 단조로움에도 개의치 않는다. 자리를 탓하지도 않는다. 또한 더 돌려고 억지 부리지도, 곱디고운 몸짓을 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매운 채찍에 상처받고 세파에 휘둘려 몸에 멍이 들지언정 모난 몸뚱이를 탓하지 않는다. 돌 때는 꽃잎처럼 분별없는 흩날림이 없고 주저앉더라도 꽃이 진 자리처럼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는 팽이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팽이에서 어머니의 세월을 읽는다.
어머니는 팽이다. 당신의 몸을 돌려 자신의 마음을 돌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돌린다. 보아주는 이 있건 없건 혼자서 돈다. 혼자서 몸을 흔든다.
쓰러지기만 하던 팽이가 살아 움직인다. 세상을 향해 돌기 시작한다. 채찍의 아픔을 뒤로하고 운남민족촌 공연장에서 빠져나온다.
그가 머무는 방
임 형 묵
남자는 석고상처럼 굳은 모습으로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다. 숫제 고독을 천성처럼 타고난 것처럼 그 어떤 고독보다 더한 고독을 토해내고 있다. 식판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몇 톨의 밥알과 싸늘하게 식은 국 국물 같은 회한을 뱉어내고 있다. 인생 밑바닥의 얼룩처럼 닦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는지 가슴앓이했던 지난 시간을 비우고 그 빈 가슴에 무언가 채워 넣는 듯했다.
시곗바늘이 권태의 반복 속에 단조로움을 피하지 못하듯 권태 뒤편에 숨겨진 적막감이 그 주변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건물 안과 밖을 구분 짓는 콘크리트 벽, 비록 그 두께가 삼십여 센티 정도에 지나지 않아도 혼자 일어서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남자가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의 여정이 녹록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곳에서는 나이와 성별도 따지지 않는다. 젊었을 때 어떤 일을 했는지 캐묻지 않는다. 상당수 어르신들은 거동이 불편하고, 치매 증상이 있어 보인다. 개중에는 오랜 병치레로 자식들이 돌보지 못하는 처지에 놓인 분이 있는가 하면, 큰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수시로 하며 세상을 원망하는 칠십 대 후반의 노인처럼 삶의 허기를 메우지 못해 온 분도 있다. 낯선 얼굴이 더러 보이긴 해도 이곳 요양원에 계신 분들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남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시계추가 동일한 공간에서 변화 없는 움직임을 반복하듯, 그는 점유한 공간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몸짓으로 식탁으로 향한다. 그렇게 몇 걸음 하다 허리를 펴고, 그러기를 몇 번, 무게 중심이 맞지 않으면 지팡이에 온몸을 의지한다.
그가 식탁에 다가가 앉자 도우미 중 한 사람이 남자의 목에 앞치마를 걸어주고 자리를 뜬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또 다른 몇몇이 의자에 앉는다. 식탁으로 오지 못하는 분들은 대개 침실에서 식사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도우미들이 일일이 떠먹여 드리기까지 하는데, 거동이 불편한 분 빼면 올 수 있는 분들은 다 온 듯하다.
식사 시간이면 홀 안은 분주해진다. 밥 차가 덜컹거리며 문턱을 넘고, 도우미들이 배식을 돕기 위해 자리한다. 때맞춰 면회 온 가족들은 어른들 목에 앞치마를 걸어주고 준비한 반찬을 놓아드린다. 그런데도 식탁 주변은 활기가 없다. 천장부터 테이블 바닥까지 장막을 친 것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비 온 뒤 칙칙한 기운이 몸에 달라붙듯 국수 가락 같은 침묵만 줄줄 흘러내린다.
마침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태풍이 몰아칠 것을 우려해 비설거지 하라 하고 축대 붕괴나 바닷물 넘침을 조심하라는 기상 예보가 흘러나온다. 어느 지방에서는 덩치 큰 나무들이 쓰러졌고 배수로가 막혔으며 산사태 피해가 우려된다고 했다. 남쪽 벽면에 기대놓은 일인용 의자에 앉아 기상예보를 듣던 그의 부인은 비 피해를 우려하는 아나운서보다 더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 검정 바지에 파랑과 황색의 점무늬에 주황색 꽃이 디자인된 블라우스를 걸친 그녀는, 그녀가 입고 있는 블라우스 색의 부조화보다 더 어색한 얼굴로 텔레비전을 응시하는 남자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시시포스의 돌’을 굴려야 하는 숙명인가. 거미줄 같은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그리하지 못하는 남자. 물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자기만의 영법으로 헤엄치고 싶어도 힘에 부치는 남자. 그런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끝내 지켜보지 못하겠는지 그녀는 누런 테 안경을 고쳐 쓰고 잠시 자리를 뜬다.
남자는 부인의 마음과 달리 그의 짧고도 흰 머리카락만큼의 시간조차 다른 것에 할애하지 않는 듯했다. 가마솥의 물이 펄펄 끓어오를 때 올라오는 수증기 같은 열정은 온데간데없다. 오직 숟가락에 담긴 밥 덩어리가 식기에 도로 떨어질까 염려하는 것 말고 아무 할 일이 없는 듯 식판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어쩌면 남자는 보쌈을 상추에 크게 싸 입안으로 오지게 밀어 넣던 어느 해 여름을 떠올릴 것이고, 식구들과 돼지 껍데기에 막걸리 한잔 주고받던 때를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나이 들어갈수록 누구든 외로움을 탄다. 남들 눈에는 누릴 것, 소망하는 것 다 이룬 것처럼 보여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목말라한다. 서녘 하늘에 몸을 누이는 해처럼 그리운 대상을 멀리한 채 깊은 산속이나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성공과 출세, 부와 명예를 바라지도 않고 그저 건강한 몸으로 가족들과 살 비벼가며 살고 싶어도 그리하지 못해 섬 같은 공간에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다. 광장으로 나가고 싶어도 발짝을 떼어 놓을 수 없는 처지여서 몸부림치는 이도 있다.
이곳 어르신들은 오늘도 성냥갑을 켜켜이 쌓은 듯한 공간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는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고 배설하고 잠자리에 든다. 눈 뜨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바람에 감사함을 전하고, 논과 밭 들판을 활보하던 때를 떠올린다. 지금의 몸 상태보다 더 나빠지지 않으려 애쓰고, 다른 공간으로 옮겨지지 않으려고 기도하며 오후의 시간을 보낸다.
방에는 개키지 않은 이불이 흩어져 있고 설거지통에는 밥공기와 접시와 숟가락이 넘쳐나도 그런 시간 속으로 달려가고 싶어 창문을 연다. 풀, 꽃, 나무를 떠올리고 들판에서 너울대는 허수아비 춤이라도 추고 싶어 바깥 풍경을 내다본다. 감나무에 내려앉은 까치 울음소리 들으며 가족들과 아침을 같이 했던 젊었을 적 그 어느 날의 하루라도 떠올리고 싶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한 줄기 빛이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다. 계절이 바뀌려는지 홀 안 깊숙이 파고든다. 안과 밖을 바꾸는 창, 마음의 창을 내고 싶어 하는 그 남자의 머리 위에도 빛이 한참이나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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