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고독의 섬, 춤으로 풀어내는 말씀
최운숙의 수필집 《춤사위》
이방주(수필가, 문학평론가)
1. 들어가기
최운숙의 수필은 한판 춤마당이다. 내면에서 뱉어내는 가슴의 통증이 말씀으로 쏟아져 지면에 퍼드러진다. 최운숙 수필가는 ‘섬’이라는 삶의 세계에서 고독을 춤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풀어내었다. 그의 섬에는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다. 그의 섬에는 아우가 있고 남편이 있다. 그의 섬에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도 있다. 그의 섬에는 친구도 있다. 그의 섬에는 고독이 있다. 작가의 고독은 아우, 남편, 어머니, 시어머니, 시누이, 친구에게서 전이되어 거기에 머물러 있다.
고독은 때로 한이 된다. 다행히 그의 섬에는 꽃이 피고 나무가 있다. 동백꽃이 피고 이팝나무 꽃이 있다. 비자나무는 신비스럽고, 사랑나무는 아름답고, 봉황송은 든든하다. 나무 중에는 오래된 느티나무도 있고, 압각수도 있다. 작가의 한은 꽃으로 피어서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섬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다. 춤으로 뱉어낸 고독은 신목神木을 따라 간곡한 발원發願으로 승화한다.
문학은 언어로 꽃을 피우는 예술이다. 문학은 세계를 말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말은 신성한 언어이어야 한다. 문학의 언어는 작가가 하는 말이 아니다. 대상이 일깨워 들려주는 말씀이다. 최운숙은 대상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받아 적어 자신의 언어로 표출한다. 그는 문학은 작가의 독창적인 인식이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되어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작가이다. 문학의 언어가 아름답고 감동적이려면 작가가 대상을 신성하게 대해야 한다. 문학적 대상은 작가에게 신성한 말씀을 언제나 들려주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신령스러운 시선을 지니고 있어야 가능하다. 최운숙 수필가의 시선은 신비스럽지 못하거나 대상에서 현실적 목적에만 골몰하는 딱한 눈이 아니다.
최운숙 수필가는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청주에서 문학 활동을 한다. 수필에 입문하기 전에 시를 공부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2018년 월간 《수필과비평》에 작품 <병풍 속 세상>을 발표하여 수필가가 되었다. 등단하기 전에 서원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교실에서 창작 공부를 했다. 등단 이후 월간 《수필과비평》을 통해 작품을 여러 편 발표하였다.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평론가들의 비평 대상작으로 인용되었다. 신인이면서도 작품성을 높이 평가 받은 결과이다. 그의 수필은 도서출판 북인에서 선정하는 빛나는 수필가 60인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는 2022년 충북문화재단 우수창작활동 지원사업 수혜자로 선정되었다. 지금은 대학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하여 만학도로서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수필문학을 향한 정진을 그칠 줄 모른다.
최운숙의 첫 작품집 《춤사위》는 49편의 작품을 수록하였다. 49편의 수필은 다시 주제나 제재에 따라 5부로 나누었다. 1부 그 섬의 노래, 2부 돌밭의 하얀 꽃, 3부 춤사위, 4부 병풍 속의 세상, 5부 독담불로 구성되었다. 1부에서는 섬과 가족을 소재로 하여 작가의 성장 배경을 신비롭고 성스러운 섬으로 그렸으며, 2부에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고뇌를 제재로 하여 인간의 근원적 고독과 그 갈등의 해소 과정을, 3부에는 이웃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작가 자신의 반영反影을 발견하고 그 존재와 관계의 의미를 추구하였으며, 4부에는 아픔과 죽음 그리고 이별을 딛고 세상에 부딪쳐 다시 시작하는 의미를 찾았으며, 마지막 5부에는 생태계의 근원을 밝히면서 단순히 자연과 생태 환경에 머물지 않고 죽음과 부활의 영적 의미를 담아냈다.
이 글은 최운숙 수필가의 첫 작품집 《춤사위》의 상재를 축하하고 문학적 성과를 칭찬하며 작가의 미래에 힘을 실어주는 발문이다. 작품집을 펴내는 순간 작가가 담아내는 삶의 철학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 독자들과 공유하게 된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이해를 통하여 공감과 공명을 얻어내는 것도 바로 이 글의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발문 본래의 목적을 다하면서 비평의 성격을 가미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작가가 ‘존재의 섬’이라 규정하는 삶의 세계에서 겪는 고독을 이해하고, 그의 신성한 시선의 향방과 함께 한을 춤으로 풀어내는 깨달음의 말씀을 살펴보겠다. 아울러 작가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의 삶이 변환하고 성장하는 모습도 살펴보겠다. 작가가 관계 지은 이웃과 상생하는 도리를 알아보는 것도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수필은 흔히 사실과 체험의 문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작품에 상상이 없다면 문학적 공감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하여 다른 작가와 차별화된 구성의 특성과 서술의 효과를 살펴보겠다. 수필적 상상은 시적 사유와 많이 다르다. 상상이 다르므로 언어가 담고 있는 상징성도 다를 것이다. 작가가 남다르게 활용한 수필적 상상과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 세계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수필가들은 대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본질을 추구한다. 그렇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곡절에 다다르면 작가의 시선에만 보이는 독창적인 인생의 의미가 발견될 것이다. 새롭게 찾아낸 개성적인 의미는 작가만의 설리說理를 통하여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편화되고 개념화된 삶의 의미를 엿보이게 된다. 이 글에서 작가가 발견한 의미화 과정과 개성적 문체를 알아보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이 작가와 독자 사이의 소통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 인식
수필은 일상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다. 이 말은 수없이 되뇌어 온 경구이다. 일상을 대상으로 삶의 철학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해석의 과정은 작가의 가치관과 지적 교양이 동원되게 마련이다. 인식의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먼저 오감五感(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한 인식이 첫 단계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가들은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은 문학적 인식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것, 들리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것은 수필적 사유를 통해서 가능하다. 수필적 사유를 통하여 인식한 삶의 철학을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언어로 형상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비극 관람을 통하여 배우나 등장인물의 정서를 대리하여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감정 정화淨化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수필은 작가가 고통스럽던 경험을 소환하여 고백함으로써 심층적이고 참을 수 없는 아픔을 정화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수필의 치유 효과이다. 최운숙은 이 책의 서문인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작품이 이러한 치유를 지향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시사한다.
우리의 내면에는 그 무엇이 있다. 살아가면서 하나둘 쌓인 통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거대해져 스스로 제어하기 힘들어질 때, 그것이 몸 밖으로 나와 자신만의 춤이 된다. 곪은 상처에 마음 한자리 턱 내주고 나면, 슬픔도 통증도 농익어 저절로 춤이 되는 법. 그래서 춤은 삶의 몸짓이다.
내 걸음걸이에도 춤이 된 두려움과 상처가 있다. 가끔, 슬픈 몸을 움직여 한판 춤을 추다가 서리 맞은 하루를 허허 털고 진한 춤을 추기도 한다. 배우의 몸을 빌려 춤을 추고 나면 내 눈물은 웃음에 맞닿는다.
작가는 자신이 처한 삶의 세계는 누구에게나 내면의 고통이 있다고 인식한다. 내면의 통증은 작가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공통의 아픔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내면의 고통은 몸 밖으로 나오면 춤이 된다고 인식했다.
작가가 섬이라 인식하고 있는 삶의 세계, 그리고 그 섬에서의 고독, 삶의 세계를 신비스럽게 인식하는 그의 시선, 내면의 고통을 토해내는 춤의 말씀과 한, 이러한 수필적 사유를 통한 변환과 한의 승화를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1) 섬과 고독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세계에 존재한다. 그냥 존재자로서가 아니라 의미 있는 존재로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면서 살아간다. 작가는 이것을 ‘존재의 섬’이라 했다. 최운숙은 어린 시절을 섬에서 자랐다. 섬은 육지와 단절된 공간이다. 따라서 섬에서는 다른 세계에 대하여 무한한 동경을 갖게 마련이다. 섬은 성장과정에서 작가에게 고독의 공간이었고 동경을 품고 살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그는 고독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섬은 삶의 터전이고 ‘나의 전부’였다고 이렇게 고백한다.
비릿한 갯내가 좋았고 굴을 따고 톳을 뜯는 어른을 돕는 일도 재미있었다.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다 바다와 물고기들이 붉게 물들어갈 즈음, 구름 모양의 둥근 솔가지단을 만들어오는 일도 즐거움의 하나였다. 동네 낮은 담장을 두드리며 뛰어다니면 어른들은 “어휴! 저 속없는 것들.”하고 혀를 찼지만, 우리는 마냥 신나기만 했었다.
-꿈꾸는 철선-
작가가 섬을 떠나 육지로 나오게 되었을 때, 반대로 섬은 곧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이 동경하는 세계는 그가 처한 공간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섬에서는 뭍을 동경하게 되고 섬을 떠나 뭍으로 오면 다시 그 섬을 동경하게 된다. 그러나 그립다고 하여 금방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동경은 더욱 짙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에게 디딤돌이 되어주는 ‘철선’은 의미가 매우 깊다.
사람들이 제각기 구축하고 존재하는 세계를 섬이라고 한다면, 섬의 모습은 제 각각 다르게 마련이다. 섬과 뭍, 섬과 섬은 쉽게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고 ‘섬’은 신비스러운 고독의 영역이다. 어떤 ‘철선’은 그를 고독의 영역으로 건네주기도 하지만, 어떤 철선으로도 건너갈 수 없는 운명적인 고독의 섬도 있다. 그래서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라고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존재자가 존재하는 섬, 또 다른 존재자가 존재하는 섬, 그리고 존재자와 존재자 사이의 섬이 모든 인간이 그리워하는 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섬은 고독의 공간이다. 작가는 섬을 운명의 굴레로도 인식한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던 고독의 공간이다. 작가는 섬사람이 겪는 인간으로서의 굴레를 ‘당골네’에게서 발견한다. 당골네는 고독의 공간인 섬에서 운명의 굴레인 무당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무당의 자식은 무당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것이다.
뭍의 세상으로 쉽게 나갈 수 없었던 곳에서 섬사람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신을 향한 기도가 되어주었고, 한을 풀어주기도 했지만, 천한 대접을 받았던 무당은 구름 속의 희미한 달이 되었다. 그들을 떠나보내지 못한 마음의 기도가 커질수록 당골은 구름 너머 먼 세상에서 사람들의 모난 마음을 잡아, 좌우로 매듭을 깎아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찬성이는 무당인 엄마를 따라다니며 북을 치고 무가舞歌를 부르는 자신의 미래 모습을 보며 몸서리를 친 건 아니었을까. 어쩌면 혼자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짊어진 사춘기 소년을 물속 달이 어서 들어오라 손짓했을지도 모른다.
-굴레-
어린 시절 섬 친구 찬성이는 무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당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에 ‘자신의 미래 모습’을 그리며 죽음을 택했는지 모른다. 찬성이는 어린 시절에 그리워하던 우물 속의 ‘달’에게 간 것이다. 바다에 빠졌든 우물에 빠졌든 물속의 달의 ‘손짓’을 따라 삶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죽음은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으로 작가는 인식한다. 이와 같이 작가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로 섬을 인식한다. 그것은 친구 찬성이에게만 주어진 굴레가 아니라 섬에 사는 모든 이들의 굴레로 이렇게 일반화하였다.
돌아보면 우물 안에 뜬 달처럼 환하기도 했고, 미루나무에 걸린 매끄러운 달이기도 했던 그때의 우리들은 찬성이를 그리움으로 안고 산다. 차올랐다 기우는 달을 보며 생각한다. 삶의 굴레를 벗어버린 어둠 속 작은 별이 된 무당의 아들을.
-굴레-
‘우리들은’ ‘어둠 속의 작은 별이 된’ 찬성이를 ‘그리움으로 안고’ 살아야 하는 동류의식을 갖게 된다. 이것은 삶의 근원적 공간이 섬이라는 공동체적 공간이라고 공감할 수 있다.
친구 찬성이의 운명적 굴레를 우리는 고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독은 고孤(부모가 없는 사람)와 독獨(자식이 없는 사람)의 합성으로 형성되었다. 그냥 단순하게 부모나 자식이 없어 외롭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면 고독은 섬은 뭍과 물로 가로막혀 있어 외롭다는 의미 정도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고독은 외로움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존재에 대한 고민이라든지, 삶의 근원이라든지, 자아의 미래라든지 하는 존재와 생의 가치문제에 대한 의문에서 오는 고독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순환에 대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문을 우리는 존재의 근원적 고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섬은 고독의 공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섬이라는 것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섬일 수도 있고 작가의 마음에 존재하는 섬일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물이라는 장벽으로 가로막혀 다가갈 수 없는 서로의 섬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섬이라는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작가는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굴레’라고 말한 것이다.
섬은 어쩔 수 없는 굴레로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섬에는 ‘꿈꾸는 철선’이 있기에 그들의 근원적 고독은 꿈을 품게 된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철선을 타고 존재의 나래를 펼 꿈을 꾼다.
바다가 마냥 좋다던 진이는 외교관을 꿈꿨고, 그림 잘 그리기로 소문난 경이는 화가를 꿈꿨다. 엄마를 닮아 노래를 잘하는 시자는 섬을 떠나 가수가 되고 싶어 했고, 모범생인 미수기는 약사를 꿈꿨다. 영이는 씩씩한 경찰이 되겠다고 했고,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꿈꾸는 철선-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을 갖기 시작하는 사춘기에 이러한 꿈을 꾼다. 꿈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섬사람 모두의 꿈이 된다. 하나하나 섬이라는 존재의 공간을 벗어나 꿈이라는 새로운 존재의 공간을 동경하게 된 것이다. 작가만이 아니라 작가와 같은 섬을 지니고 사는 친구들 모두가 동경하는 세계이다. 그리하여 작가가 살아가는 세계는 하나의 보편성을 지닌 동경과 꿈으로 승화한다. 그래서 철선의 가치는 이렇게 그의 가슴에 남는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 꿈 역시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곳을 향한다. 마치 신기루와 같아 멀리 있다가도 눈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신비한 이끌림처럼 사람들은 저마다의 깊이로 꿈을 향해 달린다. 멈춘 철선은 바다를 꿈꾸고 나는 철선이 그립다. 그때의 우리는 어디쯤 왔을까.
잊히고 사라져 그리운 것이 어디 하나둘뿐일까 마는, 가슴 한편에 배를 정박해 놓고 산다. 분주한 뭍의 일상에서 고단함과 외로움을 느낄 때 철선을 타고 그 섬에 가면, 바닷바람이 신의 손이 되어 잘 견디어왔다고 도닥여 줄 것만 같다. 여전히 내 안에서 꿈을 향해 유유히 항해하고 있는 한 척의 철선.
-꿈꾸는 철선-
작가는 살아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섬이라는 영역에 처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때마다 새로운 섬을 동경하면서 운명적 굴레에 순응하기도 하고 꿈꾸는 철선에 올라타기도 했을 것이다. ‘가슴 한편에 배를 정박해 놓고’ 그리움을 대비한다. 그리고는 일상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마음의 철선을 타고 ‘바닷바람’이 신비스런 ‘신의 손’이 되어 위로해 줄 것으로 믿는다. 이와 같이 수필적 상상은 창작과정에서 고독을 치유하고 삶의 아픔을 치유한다.
섬과 고독의 제재는 주로 1부 ‘그 섬의 노래’에 수록되었다. <굴레>, <꿈꾸는 철선>외에도 <그 섬의 노래>에서는 섬의 고독이 전이되어 오는 모습을 ‘바위에 부딪친 파도가 운다. 자지러지던 징소리도 파도 소리에 묻힌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노랫소리도 희미해진다. 당골네의 기원 의식도 파도에 묻힌다. 가물가물 꿈속처럼 노래의 끝을 잡고 섰던 나 또한, 다시 낯선 슬픔에 기댄다.’라고 술회한다. 당골네의 슬픈 기원이 파도에 묻혀 ‘나’까지 ‘낯선 슬픔에 기대’게 된다.
작가는 섬은 벗어날 수 있지만 고독은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어린 시절에 목도한 당골네의 운명적 고독과 슬픈 기원은 섬을 떠나 있어도 소환되는 기억을 통하여 현재의 섬이 된다. 인간의 근원적 고독은 승화할 수는 있어도 벗어날 수는 없는 굴레임을 작가는 작품을 통하여 고백하고 있다.
(2) 신비의 세계
문인은 대상을 신성하게 보아야 한다. 이것은 ‘시인詩人’이란 말로 대신하는 문인의 사명이기에 몇 번이나 되뇌어도 아깝지 않다. 수필가는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신성한 깨우침을 듣고 그것을 낮은 목소리로 형상화한다. 수필가는 언어로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의원이다. 수필가는 세계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고백하고 이웃과 고통을 함께하는 사랑의 치유사가 되어야 한다.
섬은 존재를 고독에 가두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신비의 공간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섬을 신비스럽게 바라보면서 성장한 작가는 신비스런 시선이 확장성을 지닌다. 섬을 비롯한 삶의 세계를 신비의 공간으로 이해한다. 그의 시선은 보이는 것 너머의 신성함을 찾아볼 수 있고, 들리는 것 너머의 신성한 맛을 보는 시선을 갖게 되었다. 시적 사유, 수필적 사유를 갖게 된 것은 섬에서 자란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최운숙은 소나기를 맞는 이웃에게 우산을 건네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우산을 쓰고, 함께 비를 나누어 맞는 반려자가 되려고 오늘도 시를 쓰고 수필을 쓴다. 최운숙 수필가는 친구 부모의 영전에 엎드려 명복을 비는 사제 같은 벗이 아니라, 친구와 함께 울어주는 곡비哭婢와 같은 벗이다.
섬에서 자란 그의 신비스러운 시선은 시공을 초월한다. 섬에서 바라보는 바다, 섬에서 바라보는 꽃, 섬사람들의 삶, 섬에서 함께 자란 친구들에 머무르지 않는다. 신비로움을 보는 그의 시선은 자연, 사람, 이야기, 죽음까지도 넘나든다.
동백꽃이 피기 시작하면 낮은 초가지붕 위로 붉은 등이 화르르 켜졌다. 눈이 펑펑 내리면 눈 속에 쌓인 꽃은 슬프도록 빛났다. 하얀 얼굴을 가진 언니처럼 예뻤다. 툭툭 떨어져 내린 꽃봉오리를 집어 마당 한가운데 동그랗게 그림을 그리곤 했다. 동백나무는 가족이 되었다.
(중간부분 생략)
동백나무를 사무실 안으로 들이고 나서 나는 꿈을 꾼다. 수직의 밤이 찾아온 이 작은 공간이 추억 속 축제의 장이 되길 꿈꾼다. 초승달이 온달이 될 때, 달은 동백을 찾아올 거라고. 어둠이 몸을 열고 생명이 섬이 되어 뭍에서 섬으로 이어지면, 곧 그 섬에도 삶을 넘어서는 섬이 될 것이다. 홀로 남겨진 동백이 외로워서가 아니라, 내 기억이 외롭기에 동백과 나는 같은 생명체로 함께 하고 싶다.
-동백꽃 필 무렵-
섬에서 바라보던 동백꽃에 대한 신비스런 기억은 <동백꽃 필 무렵>으로 신비스럽게 소환된다. 초가지붕에 붉은 등으로 ‘와르르’ 켜졌던 동백꽃은 사무실에 ‘축제의 장’으로 다시 켜지기를 소망한다. 그러면 어둠도 ‘몸을 열고’ ‘뭍에서 섬으로 이어’져서 생명체로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동백을 신비롭게 보면 자아와 세계가 하나의 생명으로 만나게 된다는 생태적 사고를 보여주기도 한다.
팝콘처럼 부풀린 꽃봉오리 사이로 서로를 카메라에 담느라 그들도 이미 한 송이 꽃이다. 사찰 안쪽으로 들어선다. 명부전 앞 커다란 고목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다. 청 벚꽃이다. 아기 초록처럼 여린 빛깔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다. 그 빛에서 풍기는 느낌이 신비로움을 넘어 차라리 차갑게 느껴진다.
-내 안의 곳간-
가로수 길이 온통 하얗다. 힘없는 사람들의 함성인 듯 이팝나무의 꽃이 간절하다. 한참을 올려다봐도 질리지 않는다. 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시선을 고정했다. 숨을 멈추고 오로지 그곳만을 향하는 잠깐의 시간, 단 몇 초의 시간이 더없이 좋다. 내가 누군가를 바라보던 그때의 순간처럼 이팝나무의 그늘이 환상 속이다. 몇 초의 순간 그 찰나가 이렇게 신비로울 수 있다니 참으로 놀랄 일이다.
-이팝나무 연가-
신비로움은 대개 꽃에서 본다. <내 안의 곳간>에서도 개심사 청 벚꽃에서 신비로움을 발견한다. 벚꽃에서 느끼는 신비성은 그의 시선을 헹구어 세상 모든 것의 신비성을 보고 있다. <이팝나무 연가>에서 꽃을 ‘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숨을 멈추고 오로지’ 바라보는 환상을 감각한다. 꽃을 바라보는 몇 초의 순간이 그에게는 신비로운 시간이다. 세상이 신비롭게 보이는 것은 신비로운 시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문인은 대상에서 신성함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문학이 신성한 가치를 잃지 않는다.
아기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속설을 통해 저주받은 운명이 바라는 강한 생명 의식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혹여 그들의 절실함으로 독담불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소록도에 묻힌 희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듯, 첨찰산 자락 한켠에도 아기의 소망을 다독이는 작은 마음이 찾아들기를 바래본다. 누군가의 손길로 꽃이 피어나고 그 꽃으로 인해 편견과 어둠이 걷히길 바라면서 떨어진 동백꽃을 독담불 위에 올려놓는다. 아이를 잃고 울부짖는 엄마의 곡소리 속으로 ‘나는 엄마 사랑해요’라는 새끼의 말이 들리는 것 같다.
독담불-
죽음은 신성한가. 주검은 무섭고 불결하여 회피해야 할 대상인가. 최운숙 수필가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독담불>에서 엿볼 수 있다. ‘독담불’은 돌무덤이다. 아이가 죽으면 항아리에 넣어 뚜껑을 덮고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 돌무덤을 ‘독담불’ 이라고 부른다고 작가는 서두에서 밝혔다. 독담불은 주검이다. 그런데 그 주검이 ‘꽃으로 피어나고’ ‘편견과 어둠이 걷히길 바라면서’ 동백꽃으로 아름다운 소망을 빈다. 주검을 신성하게 보는 인식이다. 세계는 작가마다 시선에 따라 신성함으로 변환될 수 있다.
(3) 춤과 한
진도는 한恨의 섬이다. 진도 씻김굿은 망자亡者가 이승에서 맺힌 한을 풀어주어 극락왕생하도록 발원하는 굿이다. 진도 씻김굿은 그 음악과 춤이 예술적이어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된다. 그러나 씻김굿은 진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의 섬이나 해안지방에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씻김굿은 당골네라고 부르는 이 지방의 세습무들에게 전승되었다.
‘손 하나만 들어도 춤이 된다’는 말이 있다. 가슴에 잠겨 있는 아픔이 겉으로 드러나는 정중동靜中動의 움직임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춤에서는 한 가닥도 무의미한 움직임은 없다. 춤은 가장 작은 동작으로도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가장 소극적인 동작으로 가장 적극적인 말씀을 담아낸다는 의미이다.
춤의 말씀은 발원이다. 우리 민족의 춤은 신을 향한 발원의 동작이다. 우리의 춤은 하늘과 땅을 향한다. 발끝은 땅을 향하고, 손끝은 하늘을 향한다. 맺힌 한에서 오는 통증은 발원이 되고 발원하는 간절함은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몸 밖으로 나와 춤이 되는 것이다. 춤은 ‘삶의 몸짓’이고 발원의 말씀이다. 그래서 작가는 서문에서 ‘내 걸음걸이에도 춤이 된 두려움과 상처’가 있어서 ‘눈물을 웃음으로 승화’시킨다고 했다.
진도에서 태어나 성장한 최운숙은 씻김굿이나 춤, 판소리를 보고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춤을 내면의 표출이라고 했다. 공옥진의 말을 빌려 ‘이승에서 미처 풀지 못한’ 한이 ‘뼈마디를 욱신욱신’ 옥죄어 오는 것이라고 했다. 춤은 작가의 걸음에도 옮아 ‘춤이 된 두려움의 상처가’ 있어 작품을 한 판 춤으로 펼치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의 한판 춤을 춤으로 짚어본다.
당산나무 아래 징 소리와 방울 소리가 요란하다. 무당의 손에 들린 방울이 맹렬하게 울어대더니 그녀가 서서히 작두에 올라섰다. 모두 숨죽여 바라보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윽고 그녀가 날듯이 사뿐사뿐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춤을 춘다. 작두 위로 신내림의 공수가 쏟아진다.
-굴레-
무당의 노래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신의 노래라면 아버지의 노래는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대의 노래다. 서로를 비춰주는 등대로서의 노래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내 몸의 굳은살처럼 남아 있다. 생각해보면, 소리는 아버지의 삶의 소통방식이었던 것 같다. 시대의 무거운 짐을 감당하는 가장이 자기에게 거는 최면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 섬의 노래-
엄마가 춤을 춘다. 느릿느릿 앉아있는 슬픔을 끌어올려 어깨에 걸친다. 팔이 비스듬히 곡선을 이루며 머리 위를 스치고 내려온다. 흔들어놓고 사라지는 바람처럼 자유롭다. 보잘것없이 살아온 발뒤꿈치가 땅에서 일어선다. 한 번도 날아보지 못한 어깨가 들썩이며 날기 시작했다. 춤은 얼마간 이어졌다.
엄마는 처음으로 당신의 생각을 춤으로 말하고 있었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는 당신만의 언어인 춤으로, 지켜왔던 침묵을 깨고 조각난 울음을 접고 있었던 것일까. 춤을 추며 그림자로 살아온 생을 조금씩 거두고 있었다. 이미 자유로운 정신을 가졌지만 남은 육체마저 버리는 중이었다. 당신은 발뒤꿈치를 들어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고달픈 삶도 땅에 내려앉았다.
-춤-
<굴레>는 무당의 춤을 통해 신내림의 신성함을 드러냈다. 굿을 통하여 운명을 벗어나고자 하는 절규를 신성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 섬의 노래>는 아버지의 노래를 통하여 춤과 노래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있다. 무당의 노래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신의 노래’로 무당은 섬사람들과 신을 연결하는 샤머니즘 사제라는 역할을 구체화하였다. 한편 <아버지의 노래>는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등대로서의 노래’로 삶의 아픔을 소통하는 말씀으로 이해하였다. <춤>에서 엄마의 춤도 내면을 풀어내는 말씀으로 이해하였다. 춤 동작의 묘사를 통하여 ‘당신만의 언어’로 살아온 생을 ‘조금씩 거두는’ 그래서 하나씩 내려놓으며 버리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극도의 슬픔을 절제하는 아름다움이 보인다.
전라도 지역의 씻김굿을 중심으로 한 춤과 노래는 세습무인 당골에서 재인으로 광대로 이어져 내려온다. 이들은 혈족이나 인척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속신앙의 의식으로 전승되다가 민간예술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 지방의 민족예술의 중추를 이루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최운숙 수필가는 사회적인 천시와 급격한 사회변화로 사라져가는 고향의 춤과 노래, 씻김굿에 대한 가치를 기억을 통하여 재생하였다. 특히 당골네는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하여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그 진정한 가치를 오늘에 되살려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치유와 변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시학에서 문학 행위의 치유 효과를 주장하여 정설이 되었다. 문학의 치유 효과는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에게도 섬세하고 강렬하게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문학 장르 중에서 체험의 문학인 수필이 허구가 중심인 시나 소설에 비하여 탁월하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이다. 그것은 수필은 작가의 자기고백과 진정성이 통찰, 영적 승화 등의 직접적인 방식을 활용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최운숙 수필가는 몸과 마음의 차원에서 생긴 상처를 영적 차원으로 통찰하여 해결하는 과정을 발견하였다. 수필은 진지한 자기 수행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작품을 통하여 드러냈다. 작가는 스스로 반추를 통해 카타르시스와 철학적 승화와 변환을 꾀하는 모습이다.
그녀가 내 옆에 있다. 내가 그렇게 젖어 들고 싶었던 고전이면서 동시에 그 고전의 기품과 멋스러운 현대 모습으로. 나는 그녀와 함께 아침과 점심 사이, 점심과 저녁 사이, 고전이면서 동시에 현대를 잇는다.
우리는 좋은 사람을 닮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 나는 그녀의 고전적 기품을 닮아가고자 했다면, 그녀는 나의 어떤 모습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왔을까. 우리가 마시는 찻잔 속에서는 나의 무엇과 그녀의 무엇이 함께 엉겨 있었던 것일까. 그 찻잔 속에서 피어나는 우리의 마음은 어떤 향기를 지니고 있을까. 마시는 찻물이 내 가슴 깊숙이 새로운 길을 내고 있다. 그 길이 지음의 기쁨으로 향해 있기를 기대해본다.
-지음知音-
작품 <지음>은 차를 통하여 알게 된 친구와 상생相生하고 스스로 변환하는 가치를 표현하였다. 차를 통하여 만난 그녀와 나 사이는 고전적 풍모와 현대성의 변환과 상생으로 서로의 삶을 보완하고 치유한다. 상관물인 차와 찻물은 마음을 치유하는 약물이 되었다는 일화를 격조 높은 지성의 언어와 섬세한 감각적 표현으로 독자에게 전한다. 수필이라는 비허구적 문학양식이 아니면 이루기 어려운 수작이다.
섬사람에게 굿은 곧 생활이었다. 척박한 땅과 바람의 터전인 격랑의 바다에서 살아 내려면 조상의 공덕과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들에게는 탄생의 의식보다는 죽음의 의식이 더 중요하며 화려했다. 그것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한 첫 출발이라 생각했다. 윤회설에 근거하여 사람의 형상이 소멸하면 또 다른 것으로 환생한다는 것을 믿었다. 그런 연유로 당골은 이승의 한을 모두 비우고 떠나길 바라며 굿을 통해 죽은 자의 혼을 위무하였다.
-혼魂의 노래-
백 년이 지나면 기와에도 꽃이 핀다고 한다. 기와의 백년처럼 이별은 또 다른 해후가 될 것이며 기와처럼 꽃을 피워낼지도 모른다. 기와지붕 위로 쏘옥쏘옥 고개 내밀며 일가를 이루는 작은 풀들이 한없이 기특하다. 세상은 이렇게 더불어 사는 거다 절을 내려오는데 몽오리진 상사화 위로 잠자리 한 마리가 토닥토닥하고 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예쁘다. 때로는 이렇게 작은 모습이 감동을 주기도 한다.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찰 때는 더더욱 그렇다. 내게 온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며 영원히 간직되는 이별이다.
내가 그들을 보냈을까 그들이 내게서 벗어났을까, 공림사는 한결 더 편안해졌다. 세속의 무게를 그대로 안고 왔던 일주문을 나와 성역을 넘어선다. 올라올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햇살이 내려와 내 어깨를 살며시 감싸주는 것 같다. 삶은 이렇게 내려놓고 나눠지고 잊혀간다. 아마 얼마 후에는 내 가슴속에도 새로운 꽃이 피어날 것이다. 공림사에 두고 온 그 아픔도 언젠가는 빛바랜 한 줌의 흙처럼, 주먹 안으로 들어온 바람처럼 자유로워질 거다.
뜨거운 태양이 있어 벼 이삭은 영글어가고 만남이 있어 아픈 이별도 겪게 된다. 곧 가을이 오리라. 발걸음이 가을날 벼 이삭을 털어낸 빈 짚단처럼 가볍다
.-공림사에 두고 온 것-
작품 <혼魂의 노래>는 섬사람들의 사별의 아픔을 극복하는 씻김굿의 의미를 담아내었다. <공림사에 두고 온 것>은 작가가 최근에 겪은 죽음과 사별의 아픔을 공림사 방문을 통하여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우, 친구, 형부 같은 혈육 또는 가까운 사람과의 사별, 애완견의 죽음이 가져온 내면의 통증이 사유를 통하여 변환되고 승화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작품에서 창작과정을 통한 치유와 변환의 문학적 효과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을 읽는 독자도 아픔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3. 형상
수필은 별다른 형식이 없이 ‘붓을 따라서 쓰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수필에서 구성이나 표현법의 중요성을 간과한 말이기에 수필가들의 자존감을 심하게 훼손한다. 수필창작 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인식만큼 그것을 표현해내는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최운숙의 작품에서 구성과 표현의 특징 몇 가지만 들어보고자 한다.
첫째는 전 작품이 서두에 프롤로그prologue를 두어 작품 전체의 방향과 주제를 암시했다. 프롤로그는 연극, 음악 등에서 도입부를 의미한다. 그리스 시대 연극공연에서 극이 시작되기 전에 등장인물이 빈 무대에 나와서 공연할 내용을 설명하여 관객의 이해를 도왔던 구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는 프롤로그의 기능이 약화되긴 했지만 수필에 이런 기법을 차용하여 작품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학에서 ‘낯설게 하기’ 기법을 잘못 이해한 어떤 작가들은 첫 문장을 주어 없이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하면 한동안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문학적 긴장감보다 답답함이 먼저 온다.
둘째로 설명적 진술과 묘사적 진술이 적절하게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대개의 경우 묘사적 진술이 설명적 진술보다 문학적 효과를 크게 거두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이해가 아니다. 묘사와 설명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독자의 공명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 산막이옛길의 사계는 매우 아름답다. 특히 호수 가까이 만들어 놓은 잔도를 걷는 산책길은 더없이 좋다. 뜨거운 태양 아래 땀 흘리며 산책길을 걷다 맞이하는 산들바람은 한 모금의 감로수이다. 하늘빛을 그대로 품어 안은 물빛은 푹 빠져들 정도로 곱기에 사람들로 북적인다. 겨울은 어떤가, 눈 쌓인 이곳은 온통 고요다. 숲이 가만히 내려와 앉아 있고 가슴을 비운 나목들은 은빛 찬연한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어 마치 반짝거리는 고요와 같다.
-봄의 소리-
㉯ 밤과 낮이 우리 삶과 같다고 생각한다. 밤은 어둠으로써 존재하고 낮은 빛으로 제 역할을 한다. 밤은 낮을 이길 수 없고 낮은 밤을 이길 수 없다. 어둠을 뺀 빛만 선택하여 살 수 없는 우리는 낮과 밤의 경계에서 이별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달빛 걷기-
위 글에서 ㉮는 묘사적 진술이고 ㉯는 설명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묘사적 진술은 작가가 가능하면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장면을 보여주면서 독자의 상상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독자의 상상과 작가의 상상이 만나서 공명을 가져올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설명적 진술은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직접 전달하는 형식으로 독자를 현장에서 소외시킬 우려가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서사를 빠르게 진행하는 이점이 있다.
현대 수필에서 묘사적 방법이 많이 활용되고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작품집에서도 많은 부분에 매우 섬세한 묘사를 통하여 독자와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거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렇다고 설명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셋째로 특기할 만한 것은 작품에 쓰인 많은 어휘들이 깊이 있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춤, 노래, 씻김굿’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단어들이 단순한 의미가 아니고 철학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무당’은 ‘신내림, 세습, 강신’ 등의 언어들과 함께 삶의 신성함과 한을 풀어내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할머니’는 지혜와 사랑의 곳간으로 퍼내도 마르지 않는 내면의 곳간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무들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절정의 순간에 자신을 내던지며 당신만을 사랑하는 의미를 지닌 ‘동백꽃나무’, 당산나무로서 신목의 의미를 지니고 힘없는 사람들의 함성으로, 쌀밥을 먹게 비손하는 대상으로서의 ‘이팝나무’, 고독과 아픔으로 씻어주는 ‘느티나무’, 민족의 수호신으로서의 ‘봉황송’, 잊혔던 사랑이 다시 불붙을 것 같은 ‘사랑나무’가 그렇다. 그밖에도 ‘비자나무, 압각수’ 등 많은 ‘나무’라는 어휘가 신에게 인간의 소망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는 신목神木으로서의 신성성을 상징하였다. 나무 이외에도 ‘신내림, 잡이, 받걷이, 동냥, 당골판, 넋그릇, 고풀이, 다림줄’ 같은 삶과 죽음에서 한과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담은 어휘들이 작가가 신성한 시선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4. 휘갑치기
최운숙 수필가는 어린 시절부터 시인이 되기를 꿈꾸고 시를 공부하였다. 그의 시작詩作의 경지는 어느 만큼인지 모르지만, 어느날 수필교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함께 수필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수필 습작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처음 하루는 날개짓을 하다가 다음 날은 땅을 차고 공중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나래를 펴고 창공을 나르게 되었다.
수필가들이 등단하고 첫 수필집을 낼 경우에는 성장과정, 부모형제와 일상, 그리고 남편이나 아내 자식들과의 사랑의 일상을 소재로 의미를 찾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의 첫 작품집인 《춤사위》는 개인적 소소한 일상을 떠나 인간의 근원적 고독의 문제, 고독을 해결하고 삶의 변환과 승화의 문제, 죽음과 이별의 고통 등 우리네 삶에서 겪는 아픔을 문학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이것은 그의 시선이 삶의 문제에 깊이 다가가 있고, 시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수필적 사유로 수행과 해결의 방향을 모색하는 문학적 태도라고 생각한다.
최운숙의 문장은 화려하지 않지만 초라하지도 않다. 그의 깊이 있는 사색은 간결하면서도 담백한 문체에 함축적으로 담아내었다. 그의 문장은 빠르게 내려쓴 것처럼 매끄럽지만 행간에 아름다운 언어를 찾는 뼈를 깎는 고통이 숨어있다. 그의 문장에서 비유와 상징을 비롯한 많은 표현 기법들은 단순하게 쓰이지 않았다. 비유와 상징의 보조관념이나 상관물에서 깊이 있는 수행과 사유의 흔적이 엿보인다.
무엇보다 최운숙의 작품은 구성이 단단하다. 시를 공부했으면서도 그의 수필 구성은 시적 사유에 얽매이지 않은 수필적 사유를 통한 구성이다. 수필은 서사로서 뼈대를 삼고 묘사로서 맛을 내는 구성이어야 함을 잘 알고 쓰는 작가이다.
등단 이후 몇 해 동안 열정으로 쓴 작품을 몇 줄 거친 글로 어떻게 다 담아낼 수 있으랴. 다만 이 글이 독자의 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최운숙 수필가의 앞날에 엷게라도 빛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함께 수필을 공부한 최운숙 수필가의 작품이 앞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치유할 수 있다면, 그의 섬에 나아가 춤과 노래로 잔치라도 베풀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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