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회 충북수필문학상 심사평
수필은 치유의 문학
이방주(수필가, 문학평론가)
제28회 충북수필문학상 수상작으로 정상옥 수필가의 <꽃 진 자리> <우리 지금 이대로> 두 편을 심사위원 전원이 합의하여 결정하였다.
충북수필문학상은 충북지역 수필가들의 창작 의욕과 수필의 문학성 제고를 위해 충북수필문학상 규정에 따라 후보를 선정하고 후보 중에서 작품성과 문학 활동 참여도를 평가하여 시상한다. 우리 충북수필문학회는 100명 회원을 바라보고 금년에 37집을 낼 만큼 연륜이 쌓였으며 그동안 27명의 충북수필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회원 모두가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전국 수필 문단에서 활동도 활발하다. 이런 관계로 작품성이 높은 회원들을 후보로 정하고 참여도나 기여도를 고려하여 수상자를 결정하였다. 금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하여 비대면으로 작품성을 논의하여 심사위원들의 전원 일치로 수상자를 결정하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그만큼 더 심사숙고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시인 추방론을 주장한 플라톤은 자신이 구상한 이상국가의 청년들에게 문학이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 우려하여 교훈적인 작품을 제외한 모든 문학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른바 문학의 공리적 교훈적 기능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에 문학을 생산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과 정화작용에 주목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 창작과 감상의 과정을 통해 정서가 순화되고 정화된다고 믿었다. 문학의 쾌락적 기능에 생각의 초점을 둔 것이다. 스승의 의견에서 한발 더 진화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문학의 쾌락적 기능은 비극론에서 그가 문학의 최고봉으로 여긴 비극을 통하여 감정의 정화와 배설의 효과를 주장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플라톤의 공리적 이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쾌락 이론은 어찌 보면 서로 상반된 주장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적 관계가 아니라 상보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문학을 통하여 개인의 아픔과 사회의 병리를 치유하고자 하는 문인들의 관심은 21세기 들어 더욱 확산되고 있다. 지난 세기에 주로 사회의 병리현상의 치유에 관심을 두었던 문학이 이제는 개인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데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 이론과 플라톤이 주장하는 교훈적 기능 이론이 변증법적으로 합일을 이룬 것은 바로 문학을 통한 치유를 모색하고자 하는 노력이 아닌가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오늘의 고통 속에서 문학을 통한 치유에 가장 용이한 장르는 수필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은 허구의 문학이 아니라 체험의 기억을 소환하여 현재 시점에서 해석된 가치를 독자에게 들려주는 속삭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와 독자가 아픔을 공유하고 고통을 이해하며, 서로 교훈을 주고받으면서 슬픔을 배설하는 공명(共鳴)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21세기 들어 모든 문학이 수필을 향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고, 수필의 개인적 효용성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리성을 드러내기에도 가장 유용한 문학 양식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옥 수필가가 2018년에 상재한 수필집 《꽃 진 자리》는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그의 일상에서 얻은 체험의 기억을 소환하여 겸손한 어조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독자에게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수상작으로 선정된 수필 <꽃 진 자리>는 다육 식물을 기르면서 딸을 혼인시키고 난 빈자리에서 느끼는 허전함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작품화하였다. 따라서 동일한 경험이 있는 모든 독자에게 깊은 공감을 준다. 애지중지 귀하게 키운 딸을 시집보내고 난 다음에 허전하지 않은 어머니는 없을 것이다. 그 허전하고 섭섭한 마음은 사위를 ‘도독놈’이라 생각할 만큼 크다. 그러나 그런 서운함과 아픔을 토로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면 그것은 수필이 아니라 그냥 이야기나 푸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작가는 딸과 이별이라는 화소를 뒤로 숨겨둔 채 다육이 이야기로 서두를 꺼낸다. 딸과 상관성이 있는 부수적 소재에 대한 체험을 먼저 소환한 것이다. 여기에 구성의 묘미가 있고 문학적 미감을 더하였다.
그 후 꽃밭을 더 단단히 지키려는 마음으로 그곳에 머무는 시간을 늘렸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휑하니 마음을 시리게 했던 그 빈자리로 옆에 있던 다육이가 날이 갈수록 더 실하게 번성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밀조밀하게 서로 맞대고 있던 지난날보다도 더 포기가 커지고 건강하게 자리를 잡아가더니 방울 같은 새싹들이 옆으로 자라나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어미가 아기를 낳아 품듯 큰 포기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작은 포기들이 빈자리를 메우며 활기차게 자라나고 있었다. 작은 새순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니 신선한 설렘으로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며 그동안 휑하던 속내를 한순간에 메워주는 듯했다. 마치 첫 손자를 품에 안았을 때 황홀하고 신기하며 가슴 떨리도록 푸근했던 그 날처럼. 맏딸이 시집가며 텅 비었던 방에 이듬해 아들을 낳아 손자라는 더 큰 행복 덩이를 안고 와 빈방 안을 새롭게 채워 줬을 때처럼 지금의 꽃밭도 새로움으로 다시 빈터를 채워질 거란 걸 왜 진작 몰랐을까.
삼십 년을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우리 부부의 품에서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떠난 후 첫 손자를 행복 덩이로 우리 품에 안겨주기까지 딸이 떠난 빈방에 들어설 때마다 사위를 생각하며 속으론 ㅇㅇ놈이란 생각을 간간이 했었다. 이제는 손주를 안을 때마다 아니,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활발하게 뛰는 것을 숨길 수가 없으니 사위에게 어떤 찬사를 해야 어울릴까. 손자의 웃음소리만 들으면 세상만사 모든 근심 걱정을 지워주며 살아가는 이유의 맨 앞자리를 차지할 만큼 가장 큰 행복의 매개체를 선물해준 든든한 사위이기에 이제는 더 고마운 님으로 불러야겠다.
오밀조밀 내 꽃밭 안에서 재잘대던 꽃송이 같은 세 딸이 올해로 모두 다른 꽃밭의 안주인이 되어 떠나갔다. 그곳에서 또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그들만의 꽃밭을 잘 가꾸어 행복과 평안이란 꽃을 피우며 꽃길만 걷길 기도한다.
<꽃 진 자리>에서
수필은 붓이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한다. 또 수필은 무형식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마치 수필은 구성도 필요 없고 형식도 필요하지 않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바꾸어 생각해보면 수필은 생각을 잘 다듬어 구조화해야 하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주제 전달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스럽게 형식을 구성해가며 써야 한다는 의미가 강조된 말이다. 소환된 기억을 제재로 현재의 시점에서 해석하고 재구성해야 효과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또한 글의 구조와 요소들의 유기적 관계를 염두에 두고 착상, 구상, 개요의 설계, 단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상상하는 과정에 따라서 문학적 긴장감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 작품은 ‘다육식물과 시집보낸 딸’ ‘누군가 퍼간 다육식물과 누군가 훔쳐간 귀한 딸’ ‘다육이가 사라진 움푹 파인 자리와 딸이 지내던 텅 빈 방’ ‘새로 돋아난 다육이와 태어난 손주’에 대한 상관성을 통하여 수필적 상상의 단계에 따라 점차적으로 치밀한 구성을 했기에 문학적 긴장감과 함께 독자의 공명을 불러온 수작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결국 손자는 새로 피어난 꽃이 되고 사위는 도둑이 아니라 ‘고마운 님’이 된다. 다육식물로부터 시작된 작가의 기억은 시집간 딸에 이르러 아픔이 더해지지만 결국 손주의 ‘웃음소리’로 치유된다.
이 글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딸을 시집보내고 난 다음의 허전함에 공감할 것이다. 우리네 삶은 그 본질을 천착하여 원형을 거슬러 올라가면 자연의 섭리와 합일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삶도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개체로서 인류라는 요소로 존재하기에 자연의 순환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이 작품은 돌고 도는 인간의 삶의 테두리도 결국은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원형적 사고를 찾아 작가 자신을 성찰하여 고백할 때 예술적 감동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낸 작품이라 생각한다.
문명은 시대에 따라 새로운 사상의 틀을 만들어가면서 변환한다. 21세기가 수필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은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과 맞물려 있다. 지난 시대가 물질문명과 정보화로 질주했다면 이제 숨을 돌리고 자연의 일부라는 인류 스스로의 생명을 성찰해야 한다는 사고로 전환하고 있다. 인류는 생태주의 문명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의 급격한 변화나 코로나19라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창궐이 오만한 인류를 당황하게 하고 있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을 지배하는 시대가 오고 있어 두렵다. 생태계를 계속 우습게 알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무시하면 인류는 파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정상옥 수필가는 이러한 사고를 <지금 우리 이대로>에서 넌지시 시사하고 있다. 가뭄으로 식물뿐 아니라 자신도 무력함에 빠지는 과정을 이렇게 고백한다.
가뭄이 안겨준 결과는 비단 논과 밭의 식물들만 목마르게 한 건 아니었다. 나 또한 건조한 날씨와 더불어 후끈 달아오른 도심 속의 열기에 부대끼며 심신이 적잖이 지쳐있었다. 더운 날이 거듭될수록 뚜렷한 이유도 모르게 삶의 의미가 덧없어지고 심신이 무력감에 빠졌었다.
<우리 지금 이대로>에서
생태주의 사고는 수평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인간은 생태계의 중심이 아니라 다른 개체와 다름없는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이러한 수평적 사고는 사회의 중심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과 수평적으로 관계를 지어야 한다는 생태여성주의를 낳기도 하였다. 이 작품에서 자연과 함께 하여 기쁨과 치유를 얻는 과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의 우수성은 주제를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수필적 상상을 통한 자기 성찰의 모습을 잘 드러냈다는 점이다. 작가는 ‘하나가 아닌 둘이기에 혹독한 인생의 설움도 참아냈고 질곡의 삶도 보듬으며 살아왔다.’고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서 ‘때론 아집으로 팽팽히 줄을 긋기도 했고 과욕으로 상대를 저울질하며 스스로 고독하게 살았던 지난날들도 있었다.’고 자신을 반성한다. 나를 중심으로 하지 않고 상대가 있음을 확인하는 동안 아픔은 치유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부의 삶을 ‘야단스럽게 사랑의 척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지긋이 잡은 손과 손의 체온만으로 충분히 느끼고 눈짓하나 표정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두꺼운 연륜이 참 좋다.’고 돌아보면서 ‘우리 지금 이대로 진정 행복하다.’며 행복을 확인한다. 나를 돌아보고 상대를 존중하면서 감정이 정화되고 내면의 치유를 얻어내는 과정이다. 이러한 치유는 속리산이라는 자연에서 ‘산 속에서 불어오는 계곡의 바람’ ‘세월처럼 흐르는 강물’ ‘떼 지어 노는 물고기’ ‘은은한 산사의 풍경소리’에서 얻어낸 깨달음이다.
정상옥 수필가의 <꽃 진 자리> <우리 지금 이대로> 두 편으로 대표 작품세계는 평범한 일상의 체험에서 자연을 바라보며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어 아픔을 치유하는 문학적 효과를 잘 드러낸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정상옥 수필가는 조용히 창작에 열중하는 수필가이다. 2000년 계간 《문예한국》으로 등단한 이래 20여 년간 수필을 쓰면서도 억지로 존재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글을 내놓고 읽어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고, 자신의 삶의 편린과 자신의 행복을 여기저기 흩뿌리는 작가도 아니다. 가정에 충실하고 부군의 사업을 내조하고 수필 입문을 소망하는 분들과 소리 없이 소통하는 작가이다. 한때 충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을 맡는 등 지방 문단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맡아 조용하고 치밀하게 일을 추진하면서도 무한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변화해가는 수필문단의 새로운 시도를 배우고 수용하면서 자신의 변환과 성숙을 꾀하는 작가이다. 제28회 충북수필문학상 수상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며 충북수필문단은 물론 한국 수필계에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장 : 김홍은
심사위원 : 박영수, 엄갑도, 장병학, 이방주, 김윤희
꽃 진 자리
정상옥
꽃밭에 채송화가 만발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곳을 지날 때 움푹 파인 몇 곳에 시선이 가면 내 몸 어딘가 베어진 듯 속이 상했었다. 그 후 몇 번의 소낙비를 맞고 여름 한낮 지독한 땡볕을 받으며 적당히 다져진 꽃밭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알록달록 채송화꽃이 한가득 환하게 채우고 있다. 채송화가 가득한 꽃밭을 바라보니 잠깐의 여백이 큰 상실의 아픔인 양 쪼잔하게 마음 상했던 날들이 부끄러워진다.
꽃밭에서 다육식물 몇 포기가 사라진 것은 한 달포 전이었다. 애지중지 키우던 다육식물 몇 포기를 누군가 허락도 없이 손바닥만 한자리를 내며 푹 파간 것이다. 화초들이 제자리에서 변함없이 있을 때는 다육이 한 포기가 차지했던 면적을 가늠하지 않았건만 없어진 자리는 왜 그리도 크고 황량해 보이는지.
반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살아온 인생 여정에서 그까짓 화초 한 포기 없어졌다 한들 그리 마음 상할 일도 아니고 가는 것이 있음 오는 것도 있으리라 느긋하게 받아들여야 했음에도 또 좁은 속내를 밖으로 드러냈나 보다. 번식력이 강한 다육식물은 얼마 지나면 남아있는 포기들이 넉넉한 자리에서 꽃대를 튼실히 키워가며 꽃밭을 풍성하게 이룰 텐데 왜 자꾸 상실의 애석함만 부여잡고 대범하게 털어내지 못하는 건지.
찬 겨울을 견뎌낸 다육식물이 오밀조밀 싹을 틔우고 빼곡하게 자리를 메꿔가던 터는 남편이 운영하는 사업장의 한 귀퉁이에 플라스틱 상자를 몇 개 모아 마련한 작은 꽃밭이다. 꽃밭이라고 명명하기도 무색하지만, 그곳에 철철이 색다른 꽃을 심는 뜻은 시끄러운 기계음 속의 공장 안에서 땀 흘리는 직원들에게 잠시라도 꽃으로 눈요기하며 숨 한번 돌리라는 나의 작은 배려였다. 하지만 내가 더 시도 때도 없이 화단 앞으로 달려가 들여다보며 머리카락 헤아리듯 잡초들을 뽑아주면서 자아도취 되는 날이 더 많았다.
조석으로 물을 주며 애지중지 키우던 화초가 사라진 그날부터 빈 그 자리에 더 마음이 머물고 바라볼 때마다 속상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세 딸을 한우리에서 오밀조밀 키우다 어느 날 큰딸이 훌쩍 시집을 간 날처럼.
그날도 정말 그랬다. 떠들썩한 대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큰딸이 쓰던 방문을 열었을 때 가슴 한쪽 편이 잘려 나간 듯 온몸의 기운을 공허한 바람이 휩쓸어 나갔다. 듬직한 사위를 자식으로 맞아드린 마음은 뒷전이고 내 분신이 떨어져 나간 상실감만이 얄팍한 속내를 헤집고 흔들어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남보다 더 뛰어날 것도, 특별한 것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세 딸을 키우며 동작하나 언어의 표현 하나에도 시시각각 얼마나 큰 울림을 주었는지. 이 어미는 말로는 다 못할 벅찬 마음으로 삼십 년을 살았으니까.
밤이 이슥하도록 잠들지 않고 세 딸의 재잘거림이 울안을 넘쳐나도 흐뭇했고 현관에 한가득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신발들을 정리하면서도 참 푸근했다. 내 것에 대한 애착을 과감하게 떨구지 못하는 좁은 도량이라 해도 도란도란 정으로 한 울타리에서 어우러지던 큰딸의 부재가 한동안 마음을 다잡지 못할 만큼 속을 매우 허전하게 했다.
세 딸을 키우면서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행복하던 그때의 어미 마음처럼 내가 만들고 가꾸는 화단은 누군가 허접하다 해도 내겐 최고의 해피드림가든임이 틀림없다. 작은 면적에서 많이 번성한 꽃 한 포기쯤이야 얼마든지 나눠 줄 수 있는데 말도 없이 떠갔으니 그 검은손이 생각할수록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도둑놈”이라는 단어를 억눌렀지만 이미 난 그 검은손을 향해 독설을 단단히 품었다. 우스갯소리로 꽃과 책을 훔쳐 가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그건 정을 많이 나누던 옛날이야기이다. 지금 나 자신부터 작은 것일지라도 주인의 허락 없이 편취한 것은 위법임을 아니 그 검은 손을 향한 미움이 하루하루 더 커졌다.
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서로 나누고 어디에서든 잘 커 주길 바라야겠지만 한동안 들인 정성이 아깝고 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린 섭섭한 마음을 떨칠 수 없는 것 또한 과도한 욕심 탓이라고 자신을 나무라야 하나.
그 후 꽃밭을 더 단단히 지키려는 마음으로 그곳에 머무는 시간을 늘렸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했다. 휑하니 마음을 시리게 했던 그 빈자리로 옆에 있던 다육이가 날이 갈수록 더 실하게 번성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밀조밀하게 서로 맞대고 있던 지난날보다도 더 포기가 커지고 건강하게 자리를 잡아가더니 방울 같은 새싹들이 옆으로 자라나 뿌리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어미가 아기를 낳아 품듯 큰 포기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작은 포기들이 빈자리를 메우며 활기차게 자라나고 있었다. 작은 새순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니 신선한 설렘으로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며 그동안 휑하던 속내를 한순간에 메워주는 듯했다. 마치 첫 손자를 품에 안았을 때 황홀하고 신기하며 가슴 떨리도록 푸근했던 그 날처럼.
맏딸이 시집가며 텅 비었던 방에 이듬해 아들을 낳아 손자라는 더 큰 행복 덩이를 안고 와 빈방 안을 새롭게 채워 줬을 때처럼 지금의 꽃밭도 새로움으로 다시 빈터를 채워질 거란 걸 왜 진작 몰랐을까.
삼십 년을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우리 부부의 품에서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떠난 후 첫 손자를 행복 덩이로 우리 품에 안겨주기까지 딸이 떠난 빈방에 들어설 때마다 사위를 생각하며 속으론 ㅇㅇ놈이란 생각을 간간이 했었다. 이제는 손주를 안을 때마다 아니,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활발하게 뛰는 것을 숨길 수가 없으니 사위에게 어떤 찬사를 해야 어울릴까.
손자의 웃음소리만 들으면 세상만사 모든 근심 걱정을 지워주며 살아가는 이유의 맨 앞자리를 차지할 만큼 가장 큰 행복의 매개체를 선물해준 든든한 사위이기에 이제는 더 고마운 님으로 불러야겠다.
오밀조밀 내 꽃밭 안에서 재잘대던 꽃송이 같은 세 딸이 올해로 모두 다른 꽃밭의 안주인이 되어 떠나갔다. 그곳에서 또 새로운 뿌리를 내리고 그들만의 꽃밭을 잘 가꾸어 행복과 평안이란 꽃을 피우며 꽃길만 걷길 기도한다.
화무십일홍이란 부귀영화나 큰 권력이 오래가지는 못하며 세상의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자숙의 가르침을 주는 말이지만 내게 꽃이 진 자리는 영원토록 새로운 희망의 자리이다.
내 삶 속에서 인연이 된 모든 것들이 설령 내 곁을 떠난다 해도 그것 또한 결국 희망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한 긍정의 이유가 되고, 나는 또 꽃 진 자리에 서서 다시 피어날 꽃을 설레며 기다릴 것이다.
우리 지금 이대로
정상옥
속리산으로 향하는 길목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녹음으로 울울창창하다. 푸른 물이 뚝뚝 떨어져 묻어날 것만 같은 숲길을 달리노라니 활짝 열어놓은 차창으로 청솔 향이 한 아름씩 날리어 품에 안긴다. 맑은 공기와 평화로운 숲길의 정적에 오랫동안 허기져있던 사색의 감성과 온몸의 촉각들이 다시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봄이 시작되면서부터 이어진 긴 가뭄이 안겨준 결과는 비단 논과 밭의 식물들만 목마르게 한 건 아니었다. 나 또한 건조한 날씨와 더불어 후끈 달아오른 도심 속의 열기에 부대끼며 심신이 적잖이 지쳐있었다. 더운 날이 거듭될수록 뚜렷한 이유도 모르게 삶의 의미가 덧없어지고 심신이 무력감에 빠졌었다. 세상을 활활 태울 듯한 뜨거운 태양 빛을 받은 초목들처럼 축축 처져 버린 삶의 의욕은 한없이 늘어져 일어설 줄 모르고 몇몇 날을 보냈다. 길가엔 흙먼지만 날리고 푸석한 내 마음 안에서는 또 하나의 나를 가둔 듯한 답답함과 무기력으로 감정은 재가 되어 풀풀 날리고 있었다.
얼마 만인가. 반가운 소낙비가 시원스레 쏟아지고 메말랐던 대지를 적셔주니 한동안 추스르지 못하던 나의 의식도 조금씩 제자리를 찾는듯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그동안 말라 있던 감성을 신록의 산야에 흠뻑 적시고픈 욕망의 목마름이 속리산을 향해 달려오게 했다.
상큼한 풀내음이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와 코끝을 스치고 숲속 어디쯤에서부터 들려오는 산새의 청아한 노랫소리가 녹슨 마음을 씻어내 주었다. 작열하는 태양 열기로 뒤덮인 도시와는 달리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산자락에는 계곡을 타고 시원한 솔바람이 끊임없이 불었다. 그동안 쌓인 삶의 권태로운 찌꺼기까지 다 씻어줄 것 같아 상쾌했다.
속리산을 찾을 때마다 새로운 풍광은 또 다른 느낌이 되어 내게 오곤 한다.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심산계곡을 천천히 거닐다 보면 이유 없이 복받치던 설움도, 끓어오르던 번민도 차분히 가라앉히는 심오함이 생긴다. 불타는 욕망을 잠재우지 못하고 부르짖는 갖가지 인간들의 시끄러운 소리를 산은 숭고한 정적으로 순화시키고도 침묵하고 있으니 오욕으로 가득 찬 내 마음인들 그 품에 들어 어찌 깨끗하지 않으랴.
언제 긴 가뭄의 날들이 있었냐는 듯 산사를 휘감고 흐르는 도랑 물줄기를 따라 은빛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노닐고 있다. 무리 속에서 두어 마리는 물살을 헤치며 물 위쪽으로 튀어 오르다 다시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흐르는 물길을 거스르며 힘겨운 역류하기도 한다. 그들만의 터攄에서 유유자적한 갖가지 몸짓들이 해탈한 삶인 듯 숭고해 보였다.
굴참나무 그늘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동행한 남편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수정처럼 맑은 강물 속의 평화를 보고 있노라니 우리가 살아온 삶의 모습이 수면에 그려진다.
너와 나로 만나 우리가 되어 수십여 년을 살면서 제한된 삶의 반경에서도 역행과 방황하던 철없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인생 여정의 동반자로서 똑같이 발을 맞추지 못하고 어긋날 때면 독선의 잣대로 서로에게 상처 내기를 주저하지 않던 부질없는 젊은 나날들.
하나가 아닌 둘이기에 혹독한 인생의 설움도 참아냈고 질곡의 삶도 보듬으며 살아왔다. 때론 아집으로 팽팽히 줄을 긋기도 했고 과욕으로 상대를 저울질하며 스스로 고독하게 살았던 지난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수십여 년을 가슴을 비비며 살아온, 이제 누가 누구의 어느 면을 탓하기보다는 서로에게 길들어 닮아가는 지금의 느긋함이 좋다. 나란히 앉아 아무렇게나 어깨를 기대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편안한 안주가 한없이 감사하다.
우리 지금 이대로 진정 행복하다. 야단스럽게 사랑의 척도를 확인하지 않아도 지긋이 잡은 손과 손의 체온만으로 충분히 느끼고 눈짓하나 표정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두꺼운 연륜이 참 좋다.
여명의 순간부터 내일을 걱정하는 절박함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삶의 여유는 많은 것을 짧은 순간에 이루려 하던 허욕을 털어낸 마음의 여백에서 얻은 행복이다.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어디서 무엇을 많이 얻으려는 욕심보다는 갈구하던 과욕을 덜어내고 남은 청정한 마음이었다.
산속에서 불어오는 계곡의 바람은 흐르는 물과 함께 있어 시원함을 더한 것이고 나의 삶 또한 고락을 함께하는 인생의 동반자가 곁에 있었기에 더욱 평온했던 것이란 걸 왜 진즉 깨닫지 못했는지. 삶의 무게가 버겁다고 투정하는 아내를 말없이 품어주던 사람이 속리산자락에 있는 그 어느 나무보다도 더 큰 거목이 되어 지금 내 곁에 있는데 무엇을 더 바랄까.
세월처럼 강물은 흐른다. 강물 속에서 여전히 물고기들은 떼지어 노닐고 우리의 삶이 그려진 세월의 편린들도 강물을 따라 또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은은한 풍경소리를 산사에 남겨두고 숲이 주는 정서에 심신을 흠뻑 적신 후 돌아오는 길에 말티 고갯마루에 올랐다. 일몰을 마친 하늘은 황혼빛이 곱게 물이 들었고 그 하늘 아래로 한길이 용트림하듯 장엄하게 굽이쳐있다.
산다는 건 이런 건가 보다. 아무리 가파르고 높다 한들 노력하는 의지로 오르지 못할 곳이 어디 있을까.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음은 자연의 법칙이요, 삶의 순리인 것을.
험한 산을 힘들게 오른 자만이 정복의 희열을 맛볼 수가 있듯 흐트러지지 않는 인생 여정을 성실히 걸어온 자에게는 삶이 너그럽게도 평온한 안식을 내어주리라.
지난날 흔적으로 남아있는 갖가지 상념들을 유추하여 속리산에 내려놓고 말티재를 내려오는데 우리 부부의 어깨 위로 잔잔한 저녁 노을빛이 고운 물을 들이며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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