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일상의 해석으로 벼리는 삶의 정의定義
- 녹운 김정옥의 《꺼꾸리에 올라》 -
이방주(수필가 문학평론가)
1. 초록구름의 꿈
수필은 영혼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수필은 일상이 분광기를 통해 분사되는 빛의 스펙트럼이다. 아름다운 스펙트럼은 다양하고 화려한 색채이지만 결국 하나의 원형에서 분사되는 연속체이다. 스펙트럼처럼 다양한 일상은 결국 하나의 원형에서 한 가지의 띠이고 한 가지의 선이고 한 가지의 분자이다. 연속되는 한 가지의 파장이다. 인간의 다양한 영혼은 하나의 파장이라는 원형으로 수렴될 수 있다. 수필을 일상의 해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양한 인간의 다양한 영혼을 들여다보는 거울이다. 수필은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거울이고 꿈의 분사체이고 삶의 연속스펙트럼이다.
수필을 꽃이라 한다면 무슨 꽃일까. 수필은 화려한 장미도 아니고, 고고하기만 한 모란도 아니다. 수필은 소담스런 함박꽃도 아니고 청초한 난이라 하기도 어울리지 않는다. 수필은 초록으로 피어나는 녹운동백이라 하고 싶다. 초록으로 피는 동백이 희귀한 것처럼 대충 쓴 글, 막 써낸 글을 수필이라 하기 어렵다. 좋은 수필은 아름답지만 지천으로 피어나는 붉은 동백과는 다르다. 녹운동백은 아예 초록으로 피기도 하고 하얗게 피어 녹색으로 비치는 것도 있다. 하얗게 피어나서 푸새를 끝낸 옥양목처럼 엷은 녹색이 초록구름처럼 내비치는 꽃이 진정 수필이 닮고 싶은 녹운동백이다. 이것이 초록구름이 갖는 꿈이다.
김정옥 수필가의 수필을 읽으면 초록구름을 보는 느낌이다. 수수해 보이는 녹운동백을 처음 보는 사람도 한참을 들여다보면 신비스런 빛깔에 누구나 반하고 말 것이다. 김정옥 수필가의 수필을 몇 편만이라도 읽어본 경험이 있는 독자는 녹운동백을 보는 순간 문득 김정옥의 수필을 떠올릴 것이다. 그의 외양이 녹운동백이고,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녹운동백을 닮았다. 그의 수필에는 녹운동백이 담고 있는 초록구름의 꿈이 배어있다. 그래서 김정옥 수필가의 아호를 녹운綠雲이라 했다. 그는 녹운동백 같은 꿈을 그리며 오늘도 수필을 쓴다.
녹운 김정옥 수필가는 한국전쟁 중에 청주에서 출생했다. 유서 깊은 교육도시 청주에선 누구나 부러워하는 청주교동초등학교, 청주여자중학교, 청주여자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여고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방송통신대학교 초등교육과와 청주교육대학교에서 수학했다. 42년간이나 초등교육 일선에서 초록구름 같은 문학의 꿈을 키우다가 퇴직 이후에 청주시에서 지원하는 1인1책 펴내기 운동에 참여하여 수필집 『뒤듬바리의 독백』(2016)을 펴내기도 했다. 문학을 향한 꿈은 청주교육대학교와 서원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교실에서 키워냈다. 그는 평생교육원 수필교실에 등록하여 5년간 수강하면서 단 한 시간도 결석한 일 없이 자신의 초록의 꿈을 키우는데 온갖 열정을 불태웠다. 2018년 3월 월간 『한국수필』 신인상을 받고 수필가의 문에 들어서면서 초록구름의 꿈은 이루어졌다. 등단 이듬해에 한국수필독서문학상을 받은 것을 비롯하여 작품 세계를 문단에서 인정받으며 창공을 날기 시작했다. 전국 단위의 각종 문예지에 수필을 청탁받아 게재하였고, 지방 일간지 고정필자로 선정되어 수필문학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작품 활동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단체에도 열정을 갖고 참여하고 있다.
김정옥의 등단 이후 첫 수필집인 『꺼꾸리에 올라』에는 총 58편의 작품이 실렸다. 수필 58편을 제재 별로 11~12편씩 5부로 나누어 게재했는데, 각부의 제재를 보니 ‘나 - 가족 - 이웃과의 관계 - 사회 - 깨달음’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였다. 나로부터 이웃과 사회를 거쳐 가는 일상에서 얻은 깨달음이다.
수필을 일상의 철학적 해석이라고 한다면 그의 철학적 해석은 깨달음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일상에서 끊임없이 담금질하고 벼리고 벼리어서 나온 삶의 철학적 해석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거친 쇳덩이 같은 자아를 수없이 다듬고 다듬어 모나지 않은 하나의 개념을 찾아냈을 것이다. 수없이 분사되어 갈라진 스펙트럼을 하나로 모아 원형성이라는 삶의 정의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것이 수필을 향한 그의 초록구름으로 꾸는 꿈이었다고 생각한다.
녹운 김정옥은 수필은 ‘추억의 뒤안길에 묻혀 가물가물한’ 체험의 기억을 소환하여 ‘잔가지를 전지하듯 고르고 다듬어’ ‘성마름의 누름돌’로 누르고 달래니 ‘옛 이야기가’ ‘누에가 진 뽑아내듯’ 술술 풀려나왔다고 한다. 그에게서 풀려나온 옛이야기는 ‘내가 변하고 바뀌게 된 실마리’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만하면 그가 수필이 무엇인가 알고 수필을 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수필쓰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서술의 태도인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창피를 무릅쓰고 봉숭아 씨오쟁이 터트리듯 솔직하게 고백하기로 하였다. 좁은 속을 내보이며 친구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부끄러운 과거와 현재의 삿된 마음과 미래의 바람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작가의 말에서-
고백이 진솔하고 숨김이 없을수록 독자는 더 크게 공감한다. 독자에게 공명을 일으키는 개인의 일상은 곧 객관적 사실로 변환된 것이고 대중이 공유하는 체험이 되므로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창피함을 각오하면 창피하지 않다. 그것이 바로 고백의 가치이다. 수필의 서술자는 작가 자신이다. 서술자의 목소리가 겸손할수록 독자의 공감은 더 크다. 삿된 마음 없이 속삭이듯 하는 말이 웅변보다 공명이 크다는 사실을 작가는 알고 있다.
녹운은 일상에서 다가오는 세계를 무엇으로 보고 있을까. 어떤 시선으로 세계를 볼까. 그것이 바로 작가의 인식 세계이다. 수필집 『꺼꾸리에 올라』를 읽으면서 작가가 보내는 시선의 방향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그의 시선에는 그가 살아온 생애가 녹아 있고, 그에게 축적된 체험과 기억이 방향을 잡아 나갈 것이다. 그의 시선은 그가 가지는 가치관과 이념의 안경을 통과할 것이다. 때로 걸러지기도 하고 굴절될 수도 있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가치관과 이념에 의해서 삶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정의하는지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녹운의 『꺼꾸리에 올라』에서 우리는 그의 자아, 그의 이웃에 대한 인식, 관계, 세계로 나아가는 모습, 그의 사랑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의 존재의 실체가 된다. 작품에 수용된 그의 체험과 소환된 기억은 작가 자신에게 어떤 거울 효과를 가졌고 독자에게는 어떤 깨달음을 재촉하는지도 알아보는 것이 이 글이 찾아가는 목적지이다.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작가가 자신의 철학을 전달하기 위해서 어떤 표현 전략으로 형상화하는가 하는 점이다. 곧 작가의 인식 세계와 아울러 형상을 알아보는 일이다. 이것은 문학에서 예술적 울림은 인식에만 담기는 것이 아니라 형상에도 담기기 때문이다. 녹운의 『꺼꾸리에 올라』에서는 상관물을 통하여 주제를 드러낸다든지 수필적 상상에 의지하는 구성 전략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그 밖에도 김정옥만이 가지는 개성 있는 표현법의 실례를 들어 보이면 독자에게 작품 이해의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발문이라는 형식이지만 작품 이해를 돕는 목적도 있음을 밝혀 둔다.
2. 시선 뒤집기
수필가가 한 편의 수필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상을 바라보고 대상의 본질을 찾아내야 한다. 대상에 감추어진 곡절(曲折)을 추구해야 한다. 대상의 본질은 보이는 것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또 들리는 것도 있지만 들리지 않는 것도 있다. 대부분의 수필가들은 오감(五感)에만 의존하여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려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통찰에 이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오감만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녹운 김정옥은 이럴 때 시선을 바꾸어본다. 이렇게 ‘시선 뒤집기 놀이’를 한다.
사람살이를 뒤집어보면 어떨까. 고초 당초같이 맵다가도 꿀처럼 달곰할 때도 있잖아. 소태같이 쓰기도 하다가 양주처럼 시금털털할 때도 있고. 쓴맛, 단맛 다 보다가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날이 오면 인생 끝난 거 아니겠어. 하지만 맵기만 하지도 않고, 쓰기만 하지도 않으니 살만하잖아. ‘고진감래 흥진비래’라고. 각다분하다가도 견디다 보면 수월할 때도 오고, 즐거움이 다 하면 슬픈 일이 닥치는 것이 인생인 거지.
-<꺼꾸리에 올라>에서-
사람살이를 바라볼 때는 꺼꾸리에 오르지 않아도 생각으로 ‘뒤집어보기’를 하면 된다. ‘고초당초같이 맵다가’ ‘꿀처럼 달곰해’지는 것은 꺼꾸리에 오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시선만 거꾸로 두어서도 안 된다. 생각을 뒤집어야 한다. 생각을 뒤집으면 ‘고진감래 흥진비래’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이 글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사람살이를 바라보는 사고의 방향을 터득했음을 은근히 발설하고 있다. 이 작품이 지향하는 인식의 세계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한다.
3. 삶의 철학적 정의(定義)
김정옥의 작품을 관통하는 수필쓰기에 하나의 원리가 있다면 삶에 대한 철학적 정의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라는 말이 주는 의미를 약간 모호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정의한다’라고 하면 내포되어 있는 여러 속성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만으로 한정한다는 의미인데 비하여 이 작품이 추구하는 정의는 귀납적 수렴의 성격을 지닌다. 김정옥은 일상의 의미를 파고들어 그 원형을 찾아 삶의 철학으로 개념화한다. 이러한 개념화 과정은 논리적 추론보다 수필적 상상이 전략적으로 개입하여 문학적 미감을 보인다. 즉 물리적 천착에서부터 상상의 나래를 펴고 영성의 세계로 날아간다. 영성의 세계에서 분산된 스펙트럼은 한 가닥의 원형으로 수렴되어 개념화한다.
녹운이 정의하는 대상은 우선 자아(自我)의 세계이다. 수필은 성찰을 통하여 삶의 아픔을 치유하고 자기 성장이라는 효과를 추구한다. 성찰은 자기를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수필은 자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반성적 성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자아 정체성은 대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은 어느 측면에서 누구인가를 돌아봐야 한다. 자신의 외모, 취미, 성격의 장단점, 관심분야, 현재 존재하는 위치에서 자신의 존재 양상을 돌아보는 작업이다. 녹운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의 존재, 이웃과의 관계, 세계와 관련된 자아의 문제, 사랑을 통한 깨달음을 작품에서 밝히고 있다. 작품에서 ‘나’는 개인으로서의 나이면서 사회인으로서의 나이고, 인간관계와 세계 속에서의 나를 성찰해가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작품 <입성하다>는 고희(古稀)에 들어서면서 일흔의 성역에 호기심과 설렘을 드러낸다. ‘60과 70의 간극에서 소우주를 보고’ ‘서글픔을 떨치고’ ‘무궁무진한 미래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기를 다짐한다. 그러나 늙어감의 서러움을 떨칠 수 없다. <입장 불가함에도 불구하고>에서 70에 입장 불가한 곳이 늘어났는데도 70으로 들어오는 것들은 ‘입장 불가’하지 않는 아이러니에 답답해한다. ‘내가 입장 불가라고 말하기 전에 밀고 들어온 손님’은 신체의 노화이다. 눈, 귀, 피부의 노화를 ‘날파리, 매미소리, 검버섯’이란 상관물을 통하여 노화의 서글픔을 드러내어 현실감과 미감을 더하였다. 귀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매미가 울어대’는 이명(耳鳴)현상이 있고, 눈앞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날파리가 날아드는’ 비문(飛蚊) 현상이 오고, 피부에 줄어들지 않는 검버섯을 고백한다. 그러나 ‘세월에 묻어온’ 손님을 ‘한 식구처럼’수용하는 지혜를 보이고 있다. 늘그막에 오는 허리 통증도 ‘강물처럼’ 받아들이며 ‘물의 순리대로’ 흘러가기로 마음먹는다. 이제는 눈썹을 그리는 것도 ‘덧칠’이고 ‘개칠’이다. 그러니 ‘나잇값’을 하면서 살기로 한다. 작가가 정신적인 삶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녹운(綠雲)이란 아호를 받으면서부터이다.
구름은 가없이 높고 멀리 있어서 가까이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높은 산에 오르면 바람을 타고 성큼성큼 내려와 우리 주변에서 서성인다. 내가 먼저 다가가야 상대방도 다가온다는 인간관계의 진리를 깨닫는다.
구름은 아주 작은 물방울이 유기적으로 연대하여 뭉쳐서 지내다가 그 무게가 힘에 겨우면 지상으로 내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다 햇빛에 증발하여 생기는 수증기가 여전히 모여 또 만들어진다. 생성과 소멸이 반복된다. 소인배 같은 내 마음에 번뇌와 욕심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구름은 늘 모양이 변하며 언제나 새로운 모습이다. 하늘 위로 뭉게뭉게 피어오르기도 하고, 얇고 보드라운 새털을 펼치기도 한다. 양이 떼로 몰려다니기도 하고, 털실을 꼬아 감아 놓은 두루마리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내 삶도 구름처럼 늘 새로움을 추구하며 다양하게 변화하면 좋겠다.
- <녹운(綠雲)>에서 -
구름에서 ‘인간관계의 진리’를 배우고, ‘생성과 소멸의 반복’으로 번뇌와 욕심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아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서 속내는 녹운으로 ‘구름처럼 늘 새로움을 추구하며’ 변환과 성장을 거듭하는 자아 성숙을 기대한다. 녹운이라는 아호를 받은 특별한 일상에서 ‘초록구름’이라는 대상의 속성을 천착하여 자아의 삶을 개념화하여 철학적으로 수렴하는 모습이다.
자아는 혼자 존재할 수 없다. 이웃과 관계를 통해서만 삶의 의미는 확대된다. <손>에서는 가장 가까운 이웃 관계인 ‘양손’의 의미를 깨우치고 있다. ‘양손이 합쳐서 손뼉을 칠 수 있는 일’을 소망하고 따뜻한 마음을 유지하기를 기원한다. 이웃은 다른 한쪽의 손이고, 자아가 세계로 나아가는 길목이다. 이웃은 물리적 거리나 사회적 거리에 근린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이웃’이라고 말하면 친근감을 먼저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웃이기에 오히려 갈등관계에 있는 경우도 많다. 녹운은 작품에서 이웃과 오해와 갈등이 해소되고 협력관계 친밀관계로 변환을 꾀하는 모습을 보인다.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했는데 그것을 모르고 거스르려고 하는 것도 내 탐욕이다. 세월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손의 모습을 탓하지 말자. 양손이 합쳐서 손뼉 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기를 소망하자. 따뜻한 마음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두 손으로 기도하자. 아직은 손이 말썽 피우지 않고 자기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음에 감사하자.
손이라고 다 똑같은 손이 아니다.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를 돌보는 거칠어도 따뜻한 손, 평생 시장 바닥에서 모은 돈을 기부하는 손, 아프리카의 오지에 학교를 지어주는 봉사하는 손이 있는가 하면, 남의 것을 탐내는 시커먼 손, 거물급 큰손도 있다. 하고많은 손 중에 거칠어도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손이 주변에 넘쳐나길 소망한다.
-<손>에서-
자아는 이웃을 통해 사회로 나간다.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가진 것, 나만이 소망하는 것에 대한 탐욕을 내려놓아야 한다. 나를 내려놓으면 바로 사회나 이웃이 중심이 되는 가치관이 형성된다. 그것이 바로 자아의 변환이고 존재의 성숙이다. 손이라는 제재는 ‘늙음의 표징’으로 시작해서 ‘손의 가치’의 바람직한 관계를 통한 세계로 나아가는 길이란 의미로 개념화되었다.
이웃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수용한 작품으로 <나잇값>이 있다. 이 작품은 탁구 경기에서 작가보다 젊은 사람에게 “나이 먹고 안경 끼면 공이 안 보인다.”는 말을 듣고 섭섭해 한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노여움’과 ‘삐침’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물건에 값을 매기듯 ‘나잇값’을 깨닫는다.
나이는 그저 신경 쓰이는 숫자일 뿐 막상 실체는 허깨비 같은 막연한 개념일지 모른다. 다만 나잇값을 한다, 못한다고 말하면서 나이라는 것 속에 담긴 알맹이를 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람답게 살기도 어렵고, 나잇값을 제대로 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덕지덕지 쌓인 세월에 의미 있는 가치를 만들어 한 겹 두 겹 덧입혀 가는 삶으로 만족하며 살아야겠다. 그리고 은은한 나만의 향기를 만들고 품어가며, 유연자재하는 구름처럼 살아가리라.
-<나잇값>에서-
일상에서 흔하게 겪는 일화에서 그 본질적 속성으로 들어가면 하나의 원형을 찾아낼 수 있다. 원형에서 나온 일상이 한 가닥의 스펙트럼인 것이다. 나이라는 일상에 대한 정의가 바로 이웃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노여움’이나 ‘삐침’을 다독인다.
이웃에 대한 소중함을 인정하면 세계로 나가는 길이 넓어진다. <퍼즐>에서 이웃과 세계의 의미를 뚜렷하게 밝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도시를 이룬다. 수많은 조각이 모여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기가 어려운 것처럼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세상이 조화롭기도 쉽지 않다.’ 짧고 단순한 이 말은 조화로운 삶의 세계에 대한 명확한 정의이다. ‘있어야 할 곳이 있으면’ 세계에 기여하는 본분이다. 작은 퍼즐 조각 하나로 관계의 성숙을 이루는 과정이다.
김정옥은 작품에서 이웃관계를 부정적인 관계보다 긍정적인 관계가 많은 것으로 파악했다. 작가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관계는 이웃과의 관계, 사회와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문학과의 관계 등이 있다. 작품 <설마>에서 미래를 알 수 없는 삶에서 설마가 자주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설마는 기대감이고 소망이기에 설마 설마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라 수긍한다. 부정적인 관계인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방편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작품 <착각>에서는 문우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사과한다. 고백하기 전에 내적 갈등이 있었으나 고백과 사과를 선택한다. 이렇게 고백을 선택하는 순간은 참으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순간이다. 이 글은 ‘나’와 ‘이 선생’으로 불리는 문우간의 착각인데 사람들의 착각으로 일반화된다. 착각하는 사람들은 ‘유리한 정보만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다. 고백을 결심하는 순간 존재의 성숙을 가져오는 것이다. 사회활동에서 존재 드러내기를 하고 성취감을 느끼는 작품으로 <완장>이 있다. 완장은 그토록 그리던 문단에 오르고 문학회에서 행사를 주관하여 잘 치르고 난 뒤의 성취감을 ‘완장’이란 상관물에 빗대어 형상화 하였다.
편견인지 모르지만 여성 수필가들의 첫 수필집에는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채우는 경우가 많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사랑의 추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사랑이 수필의 제재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제재가 된 사랑이 자칫 개인적인 사랑과 행복의 구가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소재로 불려온 사랑 제재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픔이 치유될 수 있도록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야 한다. 김정옥은 사랑을 이렇게 규정한다.
사랑은 마음에 품고만 있으면 사랑이 아니다. 드러내야 사랑이다. 사랑은 베풂인 것을 알면서도 용렬한 나는 행하는 것이 어렵다. 나눌 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한 발 내어 디디면 큰 삶을 살 수 있는데 나는 그런 용기가 없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저세상, 홀연히 떠날 인간사에 아낌없는 나눔의 미덕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그가 단풍처럼 아름답다.
사랑은 가장 따뜻하고 바람직한 인간관계이다. 타인을 아끼고 또 그러한 관계를 지켜 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많은 사람이 사랑이란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 아닐까.
-<조락의 계절>에서-
사랑은 ‘드러내야’하고, ‘베풂’이고 ‘큰 삶을 살 수 있는’ 것이고 가장 따뜻하고 바람직한 인간관계라고 정의한다. 김정옥의 사랑은 손자 사랑, 자식 사랑, 남편에 대한 사랑이 있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면 책 사랑이 있다. 그런데 어느 곳에도 행복을 구가하거나 사랑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글은 없다. 익숙하면서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깊숙한 손길로 어루만지는 사랑이다. 남편에 대한 사랑 표현을 예로 들어보자. 남편들이란 ‘모자라기 짝이 없는 동물’이고 ‘종종 꼴밉다’라면서도 ‘가끔은 애틋하고 짠하다’면서 ‘엽렵하지 못한 나와 살아줘서 늘 고맙다.’고 고백한다. 이런 표현에서 보면 남편에 대한 미움은 반어적 사랑이라 해석할 수 있다. 한국의 여인들은 남편을 미워하는 듯하다가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배어나오는 사랑이 ‘한국 여성의 남편에 대한 공통분모’라는 것을 은근히 표현한다. 부부간의 사랑을 은근히 표현한 작품으로 <덧물>이 있다. 덧물은 강이나 호수의 얼음 위에 괸 물을 말한다. 덧물은 추위가 풀리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괴기 시작해서 드디어 얼음을 녹인다. 덧물의 속성을 부부 사랑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부부 사이의 냉전 뒤에 작가는 볕샅의 힘으로라도 얼음에 실금을 내려 시도한다.
다음 날, 방에서 나와 흘깃흘깃 쳐다보니 여전히 마스크를 끼고 있다. 아내의 도리는 해야 할 것 같아 궁싯거리다 얼음에 나비물을 끼얹기로 했다. 떡국에 소고기 꾸미와 황백지단, 김 가루를 얹어 멋을 냈다. 고소한 들깨칼국수도 준비했다. 남편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도 두어 봉지 챙겼다.
나비물 효과를 톡톡히 보았나. 시간이라는 자연 치유력 덕분일까. 아니면 없던 덧정이라도 생겨 경계가 좀 느슨해진 걸까. 살얼음이 가장자리부터 슬슬 얇아지는 것 같더니 덧물이 보일 듯 말 듯 한다.
-<덧물>에서-
칠순 노년의 사랑은 ‘흘깃흘깃’ 눈치를 보면서 먹을거리로 ‘나비물’을 끼얹으며 없던 ‘덧정’이라도 생기기를 기대한다. 그 결과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살얼음 가장자리가 얇아지며 덧물이 보이는 듯하다. 남편은 이렇게 ‘덧물’로 화답한다.
동짓날이다. 수필 수업을 듣고 왔더니 남편이 전문 죽 집에서 포장해 온 팥죽이 떡하니 식탁에 올라앉아 있다. 군물이 살짝 비친 팥죽이 혀끝에서 살살 녹는 듯 감칠맛이 난다. 남편이 마음에 고인 덧물을 슬그머니 얹은 건 아닐까.
-<덧물>에서-
남편의 화답이 아름답다. 작가는 팥죽의 감칠맛을 ‘남편이 마음에 고인 덧물’을 얹은 것으로 해석한다. 수필적 상상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의 덧물에 힘입어 자신의 글이 독자에게 덧물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면서 부부간의 사랑은 수필 사랑이 되고 수필 사랑은 온 인류를 사랑의 세계로 이끄는 덧물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자칫하면 부부간의 화해 과정을 서사와 설명으로 나열하여 독자에게 진부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소재이다. 작가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상을 위트와 해학으로 설명적 나열이 아니라 정감 있는 속삭임으로 보여주기를 함으로써 진부함을 물리치고 작품성을 드러냈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김정옥의 작품에 드러난 사랑은 한 가닥으로 진행되는 사랑이 아니다. 손자를 사랑하며 세계를 사랑하고, 사랑의 원형을 깨우친다. 손자에게서 논어를 배우고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정진하는 방법도 배운다. ‘책이 애첩이다’라고 할 만큼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 얻은 지혜이다. 녹운 김정옥은 남에게 베푼 사랑의 대가로 사랑이 당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랑은 사랑을 가르친다는 진리를 ‘사랑이 먼저 내 품 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라고 했다. 깊고 큰 사랑을 가진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이다.
4. 변증법적 상상의 전략
수필 창작에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상상의 전략으로 구조화해서 전달할 때 인상적으로 독자에게 공감을 얻어낼 수 있다. 변증법적 상상은 대개 제재에 대한 본질 추구로부터 시작된다. 먼저 제재로 삼은 대상의 물리적 본질을 추구한 다음에 내재적인 속성을 찾아낸다. 이러한 속성에 자아를 비추어 성찰하고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서 잘못하면 자신의 모순만을 반성하고 사고가 멈출 수 있다. 또는 제재의 모순만을 발견하여 그를 비판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하면 문학이 아니라 넋두리나 일화로 끝난다. 대상의 속성을 통찰하여 원형성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모든 대상은 우주 안에 속해 있는 하나의 구성 요소이고 우주의 운행 법칙에 따라 순행하게 되어 있는 커다란 원리를 찾아 자아를 돌이켜보면 모순은 극복된다. 상상과 사색을 통하여 모순을 극복하고 영성에 도달하게 된다. 그때 작품은 새롭게 지향해야 할 가치를 찾게 된다. 나와 세계가 합일에 이르고, 부정과 긍정이 하나로 되어 새로운 세계가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고 과정이 전개되었을 때 수필은 문학적 미감으로 독자에게 공명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변증법적 상상의 전략이 김정옥의 작품에 수용된 것이 자주 발견된다. 그의 작품 <다이어트>를 예로 들어보면 이렇다. 작가는 다이어트에 성공한 탁구교실 동료를 보고 자신도 다이어트에 도전한다. 노력한 결과 비만치료에 성공한다. 그러나 뱃살만 빼려고 시작한 일인데 얼굴과 목까지 살이 빠졌다. 배는 날씬해졌는데(긍정적 결과:正), 얼굴은 물론 목까지 ‘주름살이 자글자글’해졌다.(부정적 결과:反) 여기서 ‘한쪽이 좋아지면 다른 쪽에는 나빠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다. 오히려 통통한 사람이 질병에서 회복력이 빠르다는 기사를 보고, 쓸데없는 ‘다이어트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여기에서 육신의 무게보다 ‘마음의 무게’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 마음의 무게를 다이어트하는 것이 더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다. 욕심, 집착, 욕구의 과체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원형적 사고에 이르게 된다.(주제의식:合一) 이러한 사고는 육신의 무게와 육신의 비만이라는 속성을 통찰함으로써 얻어낸 삶의 진리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육신의 무게에 마음의 무게가 합쳐 내 삶을 짓누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두려워졌다. 몸무게보다 마음 무게 빼기는 더 어렵겠지만 둘 다 내 삶의 지표로 삼으리라. 마음무게가 가벼우면 몸무게도 덩달아 가벼워질지도 모르니 하나씩 비우는 연습부터 해야겠다.
행복에 이르는 길도 욕심을 채울 때가 아니라 비울 때 열린다는데 이제부터는 마음 다이어트를 시작해야겠다. 절대 요요가 오지 않는 특효의 비방을 써서 마음 다이어트는 실패하지 않으리라.
-<다이어트>에서-
물리적인 제재로부터 시작하여 형이상학적인 주제로 매듭을 짓는다. 이렇게 일상을 개념화하여 드러낼 때 감동을 얻어낼 수 있다. 모든 일상은 결국 삶의 생동감 넘치는 지혜로 귀결되고 감동한 독자도 다이어트의 굴레에서 함께 벗어날 수 있다. 수필의 치유의 효과이다.
5. 고백의 울림
녹운 김정옥은 작가의 말에서 모든 일상을 ‘봉숭아 씨오쟁이 터트리듯’ 고백한다고 말했다. 고백하지 않고 감추면 작품성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고백하는 것은 작가를 부끄럽게 할 수 있다. 작가가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따라 고백한 사실은 삶의 하나의 유형으로 객관화될 수 있다. 객관화된 작가의 일상은 독자의 것이 되고, 부끄러움은 모든 이의 부끄러움이 된다. 김정옥은 부끄러워 고백하지 못할 듯한 사실을 고백한 내용을 여러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내 짝짝이 타령에 한술 더 떠야겠다. 평소에 좌우 똑같은 덮개로 싸여 있어 다른 사람은 절대로 눈치 못 챈다. 남편과 나만이 알고 있는, 이른바 ‘짝가슴’이다. 모유가 충분하지 않아 두 딸을 키울 때 애를 먹었지만, 짝짝이가 된 것도 모유 수유 때문일 것이다. 물에 대한 울렁증이 있어 수영복 입을 일이 없을 터, 남들에게 짝가슴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니 걱정할 일도 아니다. 어쨌거나 이 나이까지 잘 살았는데 가슴이 짝짝인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짝짝이>에서-
이 정도의 고백에서도 공감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만의 부끄러움이 아닌 것은 ‘짝짝이’란 것이 가슴으로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기심, 증오심, 오만함, 교만함에 짝짝이투성이인 ‘마음자리에도 짝짝이’가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작품 <고백하다>에서 ‘인간의 말은 모두가 고백이다’라고 정의한다. 생각해보면 고백 아닌 말이 없으니 고백하고 치유 받는 것이 인생의 왕도라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녹운 김정옥의 수필집에서 한 가지 더 발견할 것은 아름다운 말을 수없이 살려 쓰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나비물, 볕샅, 실금, 덧정, 손돌 추위, 여줄가리, 뒤듬바리, 도긴개긴, 꼴밉다, 고지랑물’ 같은 어휘도 있고, ‘늡늡하다. 와작와작, 자박자박, 짜그락짜그락하다, 알콩달콩, 씰룩쌜룩, 곰비임비’ 같은 음성상징어도 있는가 하면 ‘핫하다, 북스타그램,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취향저격사랑법, 이모티콘, EDPS(음담패설) 같은 신세대 어휘도 적재적소에 사용하였다. 흔히 쓰는 어휘도 그 곡절을 알아내어 의미 있게 쓰는 모습이 보인다.
김정옥의 작품에서 의미 있는 형상화기법은 시점의 변화, 서술자의 전환, 어조 등 다양하지만 다 설명하기 어려워서 생략하기로 한다.
6. 휘갑치기
녹운 김정옥 수필가는 주변이 깔끔하고 따뜻하고 온화하다. 그의 표정은 늘 미소를 띠고 있으며 상대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그의 사고는 논리적이고 긍정적이다. 녹운과의 인연은 대학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교실에서 수강생으로 만났다. 만나기 전에 이미 저명한 수필가로부터 수필쓰기 수업을 받았다. 녹운은 수필 창작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강의를 열심히 듣고 강의 내용을 창작에 적용하여 거듭 퇴고했다. 등단 이후에도 창작에 필요한 도서를 구입하여 읽고 문우들에게도 권하는 순수한 문인의 길을 걸었다. 그런 열정 속에서 어느덧 수필가로서 자신만의 개성을 지니게 되었다. 수필집 《꺼꾸리에 올라》 이 한권을 읽은 독자는 언제 어디에서 녹운의 글을 대해도 그의 글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개성이 뚜렷하다.
녹운은 하나의 주제가 정해지거나 좋은 소재를 발견하면 대상의 속성을 깊이 있게 천착한다. 그 속성에 자아를 비추어 성찰한다. 그의 창작 과정을 오히려 수행의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끊임없는 본질 추구의 과정을 거쳐 삶의 일상을 개념화하고 철학적으로 정의한다.
무쇠를 담금질하여 잘 드는 칼을 벼리어 내듯이 그의 수필쓰기 작업은 끝 날이 없다. 그것은 곧 삶을 가지런히 하는 수행의 과정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도 녹운은 스스로 수필가로서 대성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독자들이 따뜻한 마음을 읽고 사랑의 덧물이 생기고 아픔을 치유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의 꿈처럼 첫 수필집이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아픔을 치유하는데 큰 힘이 되어 초록 구름의 꿈을 이루기 바란다. 아울러 한국 수필문단에 새바람을 일으켜서 수필문학사의 한 획을 긋는 수필가로 큰 발을 내디디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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