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과 상생(相生)의 미학
- 『한국수필』 8월호를 읽고 -
아침 뉴스가 무겁다. 코로나19로 확진된 환자가 1천6백 명을 넘었다고 한다. 더구나 스에즈운하로 통하는 아덴만에 파견된 청해부대 장병들은 80% 넘게 감염되었다고 한다. 드디어 지구의 여신 가이아(Gaia)가 지구별에서 하나의 종에 불과한 ‘인류’에 응징하기 시작했다. 가이아는 코로나19를 통하여 계속 변종을 만들어 인류를 압박할 것이다.
가이아의 노여움으로부터 벗어나려면 21세기의 수필은 생태문명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 근대 산업사회에서 정보문명으로 전환된 문명의 패러다임은 급격하게 생태주의 문명으로 전환하고 있다. 상생의 뜻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생태주의 사고를 심어주는 일을 문학이 담당해야 하고, 수필은 문화의 변화를 수용하는 선두에 서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수필이 선두에 서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생태문명에서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사고가 곧 상생(相生)의 문화이다. 상생이란 말은 도경(道經) 제 2장 유무상생(有無相生)이란 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있음이 없음을 이루고 없음이 있음을 이룬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상생원리이다. 불가에서는 이러한 원리를 인연생기(因緣生起)란 말로 정리한다. 이른바 연기설이다. 하나의 씨앗[因]이 싹을 틔우는데 그 씨앗이 바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씨앗만으로 싹을 틔울 수는 없다. 흙이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한다. 적절한 온도가 있어야 하고 빛도 있어야 한다. 이것은 발아의 환경 조건[緣]이다. 이와 같이 인(因)과 연(緣)이 상호 보완함으로써 우주는 지탱할 수 있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인과 연의 상생 상호작용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한다. 우주 안의 모든 생태계도 이러한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산업사회에서 인류는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삶의 현장을 마구 파헤치고 훼손해 왔다. 개발이 미덕이고 조화와 상생은 어리석고 후진적인 생각으로 치부되었다.
인연생기, 생태주의, 상생문화는 미래 수필문학이 주도해야 할 우리네 삶을 지탱하는 신생태학 패러다임이다. 한국수필 8월호에 인연, 인연생기, 생태주의로 상생을 추구하는 작품이 보여서 반가웠다. 한국수필 8월호는 특집 2 [8월의 마음]에 14편, 특집 3 [대표에세이문학회]에 13편, 특집 4[8월의 향기]에 14편, [사색의 뜰]에 14편으로 55편의 회원 작품이 게재되었다.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생태주의는 삶과 죽음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강현순은 「메리 생각」에서 애완견과의 인연과 상생의 경험을 소환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어 기르는 개를 애완이라는 의미보다 ‘반려’라는 상생의 의미를 부여하여 부르기도 한다. 애완용품점에서 구경하다가 유년시절의 애완견 ‘메리’를 추억한다. 요즘의 반려견에 비하면 불쌍하기는 하지만, 가족들과 상생하면서 착하게 살았던 메리가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고 했다. 이 작품은 애완견에 대한 변화된 문화에 놀라면서도 적응해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동물이지만 사람들과 외로움을 나누고 사람들의 보호를 받는 만큼의 즐거움으로 보답하는 인연이라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개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대한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이렇듯 사람한테 예쁜 짓, 착한 짓만 하는 개를 보고 왜 안 좋은 말 앞에는 꼭 ‘개’ 자를 넣는지 모르겠다. ‘개밥’ ‘개팔자’ ‘개떡’ ‘개고생’ ‘개 같은 인생’ ‘개판’ 등. 그뿐인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라’라는 개와 관련된 속담도 있다. 예전에는 도둑을 막기 위해 개를 키웠지만 요즘은 사람들의 고독과 외로움을 막기 위해 키우는 듯하다.
개를 사랑해서 많은 돈을 투자하면서도 말은 이렇게 하는 것이나, 싫증나면 ‘어느 날 갑자기 길에 내동댕이치’는 왜곡된 문화에도 일침을 가했다. 개를 기르는 독자들이 공감하면서 경각심을 가져야 될 것 같다.
우효순은 「골무」에서 DMZ 부근인 양구의 펀치볼 마을에서 과일 농사를 지으며 녹색 세상에 묻혀 살면서 얻은 깨달음을 작품화하였다. 서울에서 성장했지만 양구의 자연환경이 좋아서 주변을 사랑하며 살면서도 때로 상처를 받을 때가 있다. 이러한 상처를 바느질할 때의 바늘과 골무를 상관물로 표현하였다. 어린 날 친정엄마가 ‘바늘에 찔리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며’ 살라는 기원을 담아 반짇고리에 색색의 골무를 넣어주었다. 화기애애한 이 마을에서도 마을사람들끼리 서로 의심하고 확인되지 않은 일을 신고하는 바늘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남을 의심하는 검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작가는 그런 검은 마음에 골무를 끼워주고 싶다고 고백했다. 이것이 바로 바늘과 골무의 상생이다. 바늘과 실이 상생하듯 산골마을에서도 상생의 지혜가 필요함을 이렇게 드러냈다.
의심 묻혀 떠올려보는 동네 사람은 평소 내게 웃음 줄기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 닮아 순박하게 사랑 주고받던 내 사람들인 것이다. 100세 어머니 모시고 사는 어려움을 세세히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주고, 서툰 시골 살림은 언제든 팔 걷어붙이고 거들어주며, 사과밭 일로 분주한 일상이 피곤으로 나래를 접는 날이 있다 해도 초록산만큼이나 초록 물 배인 그네들 눈빛이 내게 닿으면 마법처럼 얼굴 환하게 밝혀주는 웃음 씨앗이 싹트곤 했던 내 사랑들이다. 의심 눈초리로 멀리하기엔 내가 그들을 너무 사랑하고 있어서 아팠구나. 엄마표 골무를 단단히 끼우고 의심 바늘을 힘껏 밀어내기 시작한다. 애쓰며 내보내다 보면 흔적이야 남겠지만 차츰 아픔도 빠져나갈 것이다.
생각에 따라 마음에 평온이 오게 마련이다. 수필은 창작과정이 곧 수행의 과정이다. 수행의 과정에서 남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자신의 모순을 성찰하여 변증법적으로 자신의 존재의 나아갈 길을 결정함으로 존재의 성숙을 가져온다. 이러한 수행의 과정은 수필 창작에서 대상을 해석하고 자신을 성찰하여 변증법적 사고를 찾아내는 과정과 유사하다. 이 작품은 바늘과 골무의 상생법을 보면서 펀치볼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과 ‘인생 사거리에서 혼란할 때’ 이정표를 찾게 된 것이다.
이한얼은 「사물의 무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처럼 사물과 사물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도 인연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도 인간 또는 사물, 식물, 동물의 모양으로 수없이 많은 윤회를 해왔을 것이라 믿는다. 이 작품은 모든 것은 인연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인연생기의 법칙을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이현숙은 「까치」에서 자신의 인연으로 까치를 선택하고 ‘까숙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준다. 인연인 까숙이에게 물도 주고 쌀도 주며 함께 놀아주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진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운동을 선택한 것이 원인이 되어 까숙이를 만나는 것도 인과 연이 닿은 것이라 해석할 수 있고, 까숙이에게 친절함으로 까숙이의 선택을 받게 된 인연생기의 연쇄성을 일러준다. 결국 짧은 기간의 체험에서 인연생기와 생태주의 사고로 세계를 대하는 작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이광순의 「하얀길」 은 시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면서 멀고도 어려웠던 시어머니와 소통하게 된다. 요양원에 모시기 전날 밤 시골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꽉 막혔던 응어리’가 울음으로 터지면서 갈등이 해소된다. 시어머니와의 인연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소통이 이루어지고 가슴의 응어리가 해소되는 것도 하나의 통과의례라는 생각이다.
허복희의 「까마귀 당신」은 울음소리가 큰 까마귀와 가족을 안전하게 지키는 사랑을 가진 남편과 동일시한다.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거울삼아 남편의 희생적인 사랑을 발견하고 작가 자신을 성찰하는 실존적 성숙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과 아울러 대표에세이문학회 특집으로 실린 14편의 작품은 대부분 문장이 단단하고 깊이 있는 사유로 보편화된 주제를 분명하게 담고 있었다. 수필은 시적 서정과 함께 개성이 뚜렷한 작가의 감성이 서사를 뼈대로 하여 고운 결이 되어 메시지를 실어내야 독자의 공명을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필도 문학이기에 논리와 설리만으로는 공명을 일으키기 어렵다는 점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김미정의 「무릎 꿇은 남자, 그 사람꽃」은 희생적인 한 남성으로부터 ‘사람꽃 향기’를 느끼고 자신도 그러한 향기를 지피며 살고 싶은 마음을 고백한다. 작가는 모르는 사람의 핸드백을 찾아주기 위해서 무릎을 꿇은 남자에게 감동한다. 남자가 무릎 꿇는 일의 의미는 ‘온 마음 하나로 자신을 온통 내려놓는 일’ ‘살아생전의 앙금을 푸는 일’ ‘자신이 미래의 씨앗을 심는 일’ 등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남을 도우려고 무릎을 꿇어준 남자는 ‘향기로운 한 송이 꽃’이었다고 규정한다. 불가에서는 이런 일도 인연으로 해석한다. 핸드백을 도움 받은 여성은 그만한 씨앗을 심은 것이고 무릎을 꿇은 남자는 미래의 씨앗을 심은 것이다. 이 작품의 바탕에는 그러한 인연생기의 사상이 깔려 있다.
오덕렬은 「종이 풍금」에서 종이 부대(負袋)에 그린 건반으로 풍금 치는 연습을 하면서 상상의 세계에 몰입한다. 종이에 그린 풍금에서 영감으로 소리를 들으면서 창작은 ‘형상을 만들어내는 일’이라 생각한다. 작가는 삶의 굽이마다 종이 풍금을 치면서 ‘존재의 층계’만큼의 형상을 만들어낸다고 창작의 변을 토로하였다.
이효순은 「토끼풀 화관」에서 보고 싶은 손녀를 그리워한다. 작가는 토끼풀 화관을 만들어 남편과 함께 쓰고 추억에 잠긴다. 토끼풀 화관에 얽힌 추억은 어린 시절 담임선생님이 만들어 준 화관, 작가가 만든 화관, 손녀에게 씌워주고 싶은 화관으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이 작품은 토끼풀 화관에 얽힌 체험을 소환하여 인간의 아름다움 사랑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담임선생님과의 인연, 남편과의 인연, 자녀들과의 인연, 손녀들과의 인연이 아름답게 감각적 인상으로 형상화되었다.
전성안은 「작은 영혼을 그리워함」에서 고양이와의 인연을 통하여 ‘뮤에게서 자신을 보고’ ‘작은 생명체를 돌보는 보람’을 전하였다. 인간과 동물이 함께하는 생태주의 사고를 드러냈다. 전윤권은 「마법의 시계」에서 젊음으로 돌아가서 목소리를 되찾고 싶은 심정을, 전해숙은 「사계절 내내 꾸는 꿈으로」에서 네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정옥순은 「옹이」에서 이마에 생긴 옹이를 보면서 마음에 생긴 옹이를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의 옹이는 문학으로 감싸면 된다고 생각한다. 수필과의 인연으로 수필의 문학 치유 효과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박계화는 「1달러의 식사」에서 에콰도르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느낀 상생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문화의 차이로 불편하기는 하지만 현지인과 함께 1달러짜리 식사를 하면서 현지인이 되려고 했던 체험을 작품화했다. 은영선은 그의 작품 「호칭」에서 외국과 다른 우리나라의 호칭 문화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나라는 직업이나 직함을 가지고 상대를 부르는데 사실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므로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모든 사람이 상대를 만나면서 역할이나 관계로 만난다면 서로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견이다. 입고 있는 옷이 나 자신이 아니듯이 역할은 나 자신이 아니라는 신선한 생각이다. 세상과 이름으로 마주하고 상생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깨달음을 준다. 호칭에 관하여 쓴 작품으로 손세현의 「호칭에 ‘님’」이 있다. 가정 언어에서 ‘님’을 붙일 수 있는 대상과 붙이지 말아야 할 대상을 핏줄을 기준으로 구분하여 불러야 한다는 의견이다. 요즘같이 ‘님’이라는 접미사가 남용되는 시대에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요즘 ‘아내분, 형님분, 동생분’하고 어색하게 많이 쓰이는 ‘분’에 대한 고찰도 기대해 본다. 이 글은 사실을 설명적으로 주장하는 글로 보였다.
강승택은 그의 작품 「늙으면 애 된다더니」에서 자신의 모순을 발견하고 성찰하여 정신적으로 평정을 찾는 과정을 작품에 담았다. 늙어가면서 아내와 딸의 말에 섭섭해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옹졸하고 편협한’ 생각이 있다는 모순을 발견하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요즘 부쩍 떠오르는 생각은 나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주변의 관심과 격려, 따뜻한 말 한마디의 힘으로 존재한다는 것. 결국, 이 모두가 나이 들면 애 된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결국 가족끼리도 상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굳어진다. 가족들의 언어도 듣기에 따라 관심과 사랑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가족 간의 상생하는 행복을 담아냈다.
조광일은 「피안의 고갯길」에서 서로 함께 한다는 것의 고마움을 깨닫는다. 작가는 법정스님의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를 꺼내 들고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통하는 굴목재 20여리를 걸으면서 서로 다른 인연의 소통에 대하여 깊은 울림을 받는다. 송고아사는 조계종승보종찰이고 선암사는 태고종총림이다. 같은 불교이지만 서로 다른 종단의 대표적인 두 사찰의 노력으로 소통의 길 20리가 조성되었다. 결국 모두가 하나이고 그 하나가 다른 하나와 인연이 되어 새로운 하나로 태어난다는 섭리에 대한 깨달음이다. 조계산 소통의 길을 걷는 사람은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야 하고 내리막길을 걸어야 한다. 이것은 곧 수행의 길이다. 길에는 비비추가 있고, 하늘말나리가 있고 노루오줌이 있다. 작가는 이렇게 아름다운 꽃들을 함께 수행하고 함께 사유하는 도반으로 생각한다. 중생에게는 조계종이든 태고종이든 모두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나의 뿌리이고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작가는 깨닫는다. 의상대사가 화엄경을 요약하여 지은 법성게에서 ‘初發心是便正覺 生死涅槃常共和’(첫 발심했을 때 부처님의 자리이고 생사열반이 다 같은 모양이네)라고 하여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모두가 하나라고 노래했다. 작가는 여기서 법정스님의 말씀을 되새긴다.
소통의 길, 굴목재 산행을 통해서 가장 크게 깨달은 건 ‘서로 함께한다는 것의 고마움’인 듯하다.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길을 만들어야 하고,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 상대방에게 먼저 다가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몸소 체험한 이번 탐방은 정신적으로 나를 한층 성장시켜 주었다.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말고 세상의 눈으로 자신을 비춰보라.”라는 스님의 말씀 또한 내 가슴속 깊은 울림을 심어주었다.
삶은 인연생기의 연속이라 규정할 수 있다. 법정스님과의 인연, 굴목재와의 인연, 불법과의 인연, 하늘말나리와의 인연이 씨가 되어 작가는 깨달음의 기쁨을 맛보고 있다.
수필은 창작과정에서 사유와 상상 그리고 성찰을 통하여 자아를 가꾸고 존재의 성숙을 가져오는 예술이라는 점을 이 작품을 통하여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한국수필 8월호는 좋은 작품이 많아서 독자들에게 많은 울림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수필가협회의 가족으로서 몇 가지 욕심을 내고 싶다. 첫째는 체험만 있고 작가의 해석이 없으면 공허한 넋두리로 폄훼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겠다. 수필은 작가가 체험한 사실을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삶의 개념으로 의미화해야 독자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로 문장을 짧게 쓰면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게 되고 독자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며, 비문법적문장이 나올 우려도 덜게 된다. 띄어쓰기나 맞춤법의 오류는 좋은 작품의 가치를 어이없게 떨어뜨린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어휘를 문맥에 맞는 것으로 선정하여 써야 한다. 이를테면 의미나 어감이 글의 목적에 어울려야 하고, 추상어와 구체어를 적절하게 골라 써야 작품성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조사와 어미도 골라 써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희귀한 한자어나 외래어를 지나치게 많이 쓰면 우리 민족의 정서를 제대로 담아 전달하기 어렵다. 좋은 작품에 사족일 수도 있지만 한국수필의 자부심을 위해 드린 귀에 거슬릴 몇 말씀은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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