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다
“할아버지 박혁거세 왕은 알에서 태어났어요?” 글자를 깨우친 일곱 살짜리 손자의 물음이다. “그렇지. 박혁거세 뿐 아니라 김수로 왕도 주몽도 다 알에서 나온 분들이지.” 이렇게 어린 철학자는 앎의 길을 열어간다.
영화 <말모이>에서 조선어학회 사환 김판수 역 배우 유해진의 흐느낌 장면을 보면서 함께 울었다. 까막눈이던 그가 한글을 터득하고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며 오열하는 장면이다. 글자를 아는 것으로 세상을 바로 보는 구멍을 뚫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모이’ 사업에 거룩하게 목숨을 바친다. 글자를 깨우친 우리 손자처럼 아는 사람만이 세상을 보는 눈을 뜬다. 그래서 앎은 또 다른 앎의 길을 튼다.
사전은 ‘알다’의 기본 의미로 ‘의식이나 감각으로 느끼거나 깨닫다’라고 풀이한다. 이밖에도 많은 확장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알다’라는 말이 의미 확장을 가져오듯 하나를 알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앎의 확산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 사실 이 말은 그리스의 어느 신전에 씌어 있던 말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나는 이 말을 ‘너의 무지함을 알라’는 말로 이해하고 살았다. 무지를 아는 것도 아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철학의 대상을 자연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꾸기 시작한 말인 것 같다. 나를 알아야, 나의 지적 수준을 알아야, 나의 육체적 능력을 알아야, 나의 개성을 알아야, 나의 영혼을 알아야 삶의 여정에서 수없이 부닥치는 선택의 순간에 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너의 영혼을 바로 알라’로 다시 해석하기로 했다.
어떤 스님의 설법을 들으니 ‘알다’는 ‘알(卵)’에 동사형 어미 ‘-다’가 붙어 이루어졌다고 한다. 말이 되는 말씀이다. 알은 생명의 시작일 뿐 아니라 앎의 시작이기도 하다. 겉모습만으로 알을 설명할 수는 없다. 속을 들여다보아야 노른자도 있고 흰자도 있고, 생명의 근원이 되며, 인간도 결국 일종의 알인 난자에서 기원한다는 철학적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앎의 확산이다.
어떤 사람은 ‘알다’의 ‘알’은 천손이고 생명의 신이라고 한다. 난생신화만이 아니라, 알라신, 알타이, 우랄, 알프스 같은 신과 관련된 말들이 '알'로 시작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알’은 정신을 뜻하는 '얼'과도 관계가 있을 듯하다. 알은 육체와 정신을 포함하는 생명의 근원이다. 결국 앎이 삶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지 않는가.
‘알다’는 사상과 영혼을 주관하는 알에서 근원한다. 우리의 육체 안에 깃들어 있는 신(god)이다. ‘알다’를 뜻하는 한자 知에 화살 矢가 있는 것을 보아도 ‘알다’라는 신은 삶의 길을 선택하는 기준이고 과녁이다.
(2019. 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