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아포리즘 수필

유리구슬과 지구

느림보 이방주 2013. 10. 5. 20:22

 지구는 지금도 돌고 있을까? 지구는 정말 둥글게 생겼을까? 나는 이런 의문을 품을 때가 많다. 과학자들의 귀납에 이렇게 의심을 품는다. 과학은 여러 가지 근거를 들어 증명했다고 하지만, 그 증명들을 오감으로 감각할 수 없다. 엄청나게 큰 지구가 엄청나게 빠르게 돈다면, 엄청나게 큰 바람이 일어날 것이고, 엄청나게 큰 소리도 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바람도 소리도 감각할 수 없다.

 

우주는 끝이 어딜까? 우주가 끝이 있다면 그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아득한 그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일까? 존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지만,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많은 것들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지 감각할 수가 없다. 나의 오감으로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기에는 나의 사고가 너무나 비좁고 왜소하다.

 

지구본을 보면 지구의 모양을 한눈에 볼 수가 있다. 그런데도 지구를 본을 떠서 작게 만들어 놓은 것이 지구본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유리구슬을 가지고 놀아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파란 유리구슬, 검은색 유리구슬, 투명한 유리구슬 등 갖가지 모양과 색깔 중에서 파랗게 투명한 유리 안에 하얀 구름이 박혀있는 유리구슬을 참 좋아했다. 파란 색깔이 꼭 바닷물 같았다. 아주 큰 눈으로 보면 지구는 꼭 유리구슬만할 것이다. 아주 큰 눈으로 보면 지구도 유리구슬을 보듯이 한눈에 볼 수 있을 것이다.

 

논리는 아주 간단하다. 큰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큰 것은 작은 것처럼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도 우주도 한눈에 볼 수가 없다. 지구가 도는 소리도, 지구가 자전하면서 일으키는 바람도 인간의 오감으로는 감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눈이나 귀가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큰 사람은 한눈으로 볼 수가 없다. 큰 사람의 큰 생각은 우리가 한번에 감각할 수 없다. 사랑도 큰 사랑을 한눈으로 알아볼 수 없다. 우리의 작은 가슴으로는 어머니의  큰 사랑을 감각할 수 없다. 공자나 예수나 부처님의 사랑이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 사랑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지구의 모양을 구슬처럼 한눈에 보려면 감각을 키워야 한다. 큰 사람의 큰 생각, 어머니의 큰 사랑을 오감으로 알아보려면 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작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지혜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지구가 도는 소리도 지구가 일으키는 바람도 지혜로 감각해야 느낄 수 있다. 큰 것을 큰 사랑을 인식하려면 나를 키워야 한다. 나의 영혼을 키워야 한다. 커다란 영혼의 눈으로 보아야 큰 사랑을 보고 세상의 진리를 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삶의 지혜이다.

(2013. 10. 5.)

'느림보 창작 수필 > 아포리즘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직은   (0) 2013.12.13
나무들의 지혜  (0) 2013.12.03
벗과 제자  (0) 2013.05.08
꽃인가 벌레인가  (0) 2013.04.29
염불과 잿밥  (0) 2013.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