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의자

느림보 이방주 2018. 9. 17. 21:34

의자

 

1

20144월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사를 하면서 서재를 새로 꾸몄다. 서재에서 아파트 건물 사이로 와우산이 마주보였다. 고개를 뒤쪽으로 조금만 돌리면 경찰청 건물 뒤로 백화산 정상이 보였다. 아파트 정원에 키를 재며 서있는 낙락장송을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서재가 마음에 들었다. 글을 쓸 수 있는 컴퓨터 책상은 물론이고, 독서할 수 있는 앉은뱅이 서안도 마련했다. 새로 마련한 앉은뱅이 서안은 천상의 향기가 솔솔 풍기는 편백나무로 만들어서 머리까지 맑아졌다.  가난한 수필가로서는 넘치는 서재이다.

집필을 할 수 있는 책상에 맞는 의자가 필요했다. 가격도 부담 없고 몸에 잘 맞는 의자를 구하려고 현도면에 있는 청원 가구마을에 갔다. 중국산 의자가 몸에 딱 맞아 16만원에 구입했다. 몸에는 딱 맞는데 조금 약해 보이고 인조 가죽이 국산에 비해 품질이 떨어졌다. 그래도 몸에 잘 맞아서 오래 앉아 있어도 편안하고 허리가 아프지 않아 그런대로 정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중국산 싸구려 인조가죽 의자는 참을성도 중국인만큼 좋았다. 쌀 한 가마 무게가 넘는 나를 참 편안하게 앉혀 놓고 스스로는 모든 괴로움을 견뎌냈다. 어느 날은 12시간 이상 앉아 있기도 했고, 어느 날은 새벽 2시 너머까지 올라앉아 짓이기고, 어느 날은 새벽 3시부터 올라타고 괴롭혔다. 그래도 이렇다 하는 법 없이 잘 견디어 주었다.

이 의자에서 2014년 가을에는 수필집 풀등에 뜬 그림자가 나왔다. 2017년에는 산성과 산사 탐방을 소재로 한 수필집 가림성 사랑나무도 나왔다. 특히가림성 사랑나무 원고를 정리할 때는 정말 괴로웠을 것이다. 올라 안자 밤을 새우기도 하고,  등받이를 뒤로 제키기도 하고 마구마구 짓이기었다. 여기 앉아 수필가로 등단한 여섯 분 문우들의 글쓰기를 도와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버팀목인 무심수필문학회도 이 의자를 믿음직스러운 언덕처럼 비비며 싹을 틔웠다. 두 군데의 수필창작 강좌의 강의 자료도 이 언덕에 기대어 만들어졌다.

인제는 인조가죽 허물이 닳아 벗겨지고 몸이 꾀를 벗었다. 팔걸이 뼈대가 골절상을 입고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면 피부 이식수술을 받아야 하고 뼈대에 철심을 박고 깁스를 해야 한다고 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내가 이 아이의 고통은 헤아리지 못하면서 나를 키우는 동안 이 아이는 이렇게 닳아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아이를 덜어 나를 채운 것이다. 참 무던히도 애썼는데 이제 허물이 벗겨지고 뼈도 으스러져 수명을 다 했다. 이 아이의 살갗을 벗겨 내 얼굴에 윤기를 더하고, 이 아이의 뼈대를 가져다 내 문학의 뼈대로 삼은 것이다. 나는 무심하게도 어느새 새 의자를 마련할 궁리를 한다. 얘야, 사람들의 인정머리란 게 다 그런 것이니라.

주인 잘못 만나 평생 고문당하고 끊임없이 저를 덜어 나를 채워준 중국산 싸구려 인조가죽 의자여! 너는 네 할 일 넘치게 다 했으니 후회도 미련도 없이 안녕~~~~

 

2

부끄럽다.

저녁 으스름에 의자가 배달되었다. 어느 제자가 SNS에 올린 내 의자 스토리를 읽고 새것을 사서 보냈단다. 그리고는 절대 비밀이란다. 옛것보다 훨씬 좋다. 앉아보니 편안하다.

두 아이를 나란히 놓고 여기 앉아보고 저기 앉아보면서 일만 명 가까운 제자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본다. 누굴까. 마치 금강에 발을 담그고 물방울을 한 방울 한 방울 헤아리듯이, 피라미 얼굴을 한 마리 한 마리 들여다보듯이 만 자리를 더듬는다. 이 사람일 것 같기도 하고 저 사람일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고 그럴 것 같기도 하고, 실마리가 짚이는 듯도 하고, 놓치는 듯도 하다. 학교 제자일까, 문우일까. 그렇다. 절대 비밀은 절대 비밀이다.

공연히 스토리에 올렸다. 공연히 객쩍은 짓을 했다. 주책으로 늙어가는 선생을 부끄럽게 만든 그 일만분의 일은 누구일까. 내일이면 내가 주문한 놈 배송이 시작될 터인데 서둘러 취소하고 다시 앉아본다. 혹 날 한번 안아 본 제자가 보냈나? 몸에 딱 맞네. 좋다. 그러나 부끄럽다. 기분 묘하다. 나는 작은 손으로 낯을 가린다. 온 세상이 나를 보고 손가락질하며 깔깔거리고 웃어대는 것 같다. 작은 손으로 커다란 세상을 가린다. 책상 밑으로 들어가고 싶다.


3

의자들의 세대교체, 이제 옛 의자는 버리고 새 의자에 앉아야 한다. 의자의 세대교체이다. 세대란 사람에게나 있을 법한데 의자에게도 있었나 보네. 사람이 교체되어야 하는데 그럴 맘이 없으니 의자에게 억지로 씌웠을 것이다. 의자가 대신 자리를 바뀌어 내어 준다. 내가 가고 일만분의 일이 이 자리에 와야 하는데, 내가 남고 그는 날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언젠가는 물려주어야 할 내 자리가 새로 마련되었다. 그의 배려로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한동안은 또 마음 놓고 올라 앉아 짓이길 수 있겠구나. 이제는 내가 클 일이 아니라 만분지일에게 의자를 내어줄 준비를 해야겠구나. 의자의 세대교체가 아니라 내가 물러나고 의자를 기다리는 일만분의 일에게 넘겨줄 준비를 말이다.

세상은 다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작은 손으로 우주를 가린다. 일만분의 일 때문에…….

(2018.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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