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작은 꽃병 큰 그리움

느림보 이방주 2014. 5. 7. 06:11

 

오늘 아침 꽃을 받았다. 수강생 중의 한분인 한영덕님이 황매화, 영산홍, 조팝나무꽃을 파란 유리병에 담아 오셨다. 노란 황매화는 크고 작게 두 송이고, 붉은 영산홍은 앙증맞게 한 송이고, 조팝나무꽃은 소복소복 세 송이다. 키 큰 댓잎도 분위기에 도움이 되었다. 파란 유리병과 함께 황, 청, 백, 홍, 녹이 조화롭다. 이른바 오색 가운데 죽음과 북쪽을 상징하는 흑이 빠지고 녹이 대신해서 더 싱그럽다. 싱그러운 사랑을 한 무더기 받은 것이다. 아니 조화로운 그리움을 한 무더기 받은 것이다.

 

하얀 조팝나무꽃이 먼저 눈에 가득 들어온다. 이렇게 작은 꽃병이 가슴에 가득 안기는 기분은 무슨 까닭일까? 이미 서방정토로 떠나신 어머니가 작은 유리병에 담겨 오신 듯하다. 어린날 어머니를 따라 양지쪽 따비에 냉이를 캐러 가면 밭둑에 이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봄 햇살이 가난한 어머니의 등에 볕을 들이부었다. 하얀 무명저고리에 시름이 가득해서 어린 마음에도 퍼렇게 멍이 들었다. 유복했던 친가에서 자라나 열여섯에 살만하다는 집으로 시집오셔서 궁핍을 모르던 어머니는 1961년 5월 전후 이런저런 일로 몰락하여 끼니를 걱정하게 된 가계를 혼자 꾸려야 했다. 오늘은 눈물에 마를 날이 없던 어머니의 하얀 옷고름을 보았다. 조팝나무꽃 향기처럼 피어오르는 그리움을 보았다.

 

머슴들이 떠나고 무너진 행랑 자리에 화단이 생겼다. 큰형은 화단에 황매화를 심었다. 앵두꽃도 피우고 산철쭉도 캐다 심었다. 봄이면 온갖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났다. 나는 그중에서도 황매화를 좋아했다.  이맘때쯤 황매화는 무더기로 피어서 행랑 사랑의 머슴들이 일어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활기에 넘쳤다. 황매화는 초록색 가는 줄기를 따라서 유치원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가듯 줄을 맞추어 피어났다. 이슬비 내린 아침이면 방울방울 구슬을 매달고 수양버들처럼 늘어져 있는 꽃을 한참씩 들여다보곤 했다. 스무 살이나 더 많은 형은 황매화를 한두 송이 따주기도 했다. 그런 큰형은 나의 우주였다. 오늘 아침 황매화는 형의 황매화를 닮았다. 노란 황매화 두 송이에서 아우에게 말없이 건네던 큰형의 우애의 빛을 보았다.

 

누워있는 여인의 아름다운 나신을 닮았다고 해서 미녀산, 와녀산으로 더 알려진 금수산을 넘어서는 석양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단양여고는 아름다운 두악산 기슭에 하얀 건물이라 언덕 위의 하얀집으로 불렸다. 전교생이 오백여 명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였지만, 아이들이 모두 예쁘고 청순했다. 퇴근 시간에 아이들과 언덕길을 내려오면서 멀리 아름다운 금수산에 불붙은 노을을 바라보노라면, 청년 교사의 가슴은 어느새 소년이 되어 발그레 불타고 있었다. 이런 봄날에는 하늘은 더 푸르고, 녹음이 우거졌을 금수산은 더 가까이 보였다. 언덕길 양편에 영산홍이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불타는 노을이 영산홍에 비치면 열아홉 소녀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언덕에 꽃으로 빨갛게 피어난 것처럼 아름다웠다. 아이들보다 열서너 살이나 더 많았던 나도 주책없이 가슴이 붉어졌다. 오늘 아침 붉은 영산홍에서 싱그러운 나의 젊은날을 보았다. 황매화는 젊은날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어머니도 큰형님도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다. 그러나 만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얼굴을 볼 수 없다고 해서 그 얼굴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늘 아침처럼 하얀 조팝나무꽃을 볼 때마다, 노란 황매화를 볼 때마다, 어머니도 형님도 마음속에 또렷이 살아온다. 이렇게 작은 꽃이지만 그날처럼 허옇게 무더기로 피어나기도 하고, 노랗게 흐드러지기도 한다. 금수산에 불타는 노을을 바라보며 함께 내려오던 소녀들은 이제 쉰이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옛 스승에게 전화를 걸어 할 얘기 못할 얘기 없이 마구 해대는 쉰 세대가 되었다. 이미 발효된 인생의 참맛을 알아 아무 스스럼없는 여인이 된 것이다. 전화기 너머로 푹 퍼져버린 그들의 웃음소리를 언덕위의 하얀집에 피어난 소녀들의 웃음으로 듣는다. 영산홍을 보면 빨갛게 무더기로 그리움이 피어난다. 

 

오늘 작은 꽃병을 받았다. 백발동안인 어른에게 꽃을 받은 것이다. 고희의 눈에 꽃이 피었다. 노안에 꽃이 보이고 꽃에서 의미를 찾고 꽃에서 삶의 기쁨을 발견한 것이다. 옛시조에 노안유명老眼猶明이란 말이 있다. 노인의 눈이 오히려 밝다는 말이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가치 수준만큼 아름답게 보인다. 칠순에 뿌린 문학의 씨앗은 젊은이보다 밝은 눈이 되는 열매를 거두게 된 것이다. 나는 작은 꽃병에서 어머니를 보고 형님을 보고 삼십년 전 제자들을 본다. 작은 꽃병을 큰 감동으로 받는다. 앙증맞은 한두 송이를 내 삶의 모든 그리움으로 받는다. 한 분의 꽃을 수강생 스물세 분 모두의 꽃으로 받는다. 


생각하기에 따라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 되고, 작은 파문도 마음에 들어와 큰 물결을 일으킨다. 오색이 하나로 조화되고, 하나가 따로따로 다르게 태어난다. 노인의 눈도 소녀의 감성이 될 수 있고, 먼 옛날이 오늘이 될 수도 있다. 모두 다르지만 하나로 조화를 이룰 수도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 작은 것은 작지만 큰 것이 되고, 모두는 다르지만 하나가 될 수 있다. 오늘 작은 꽃병에서 오색이 하나가 된 그리움을 본다.

(2014. 4. 14.)


 

*** 이현보

聾岩에 올라 보니 老眼이 猶明이로다 

人事이 변한들 山川인들 가실까 

岩前에 某水某丘이 어제 본 듯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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