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2007년 시월 마지막 날 일기

느림보 이방주 2018. 11. 27. 10:35

200710월의 마지막 날 일기

 

새벽에 일어나 산책을 가려는데 뒷마당 낙엽이 즐비하다. 시멘트 바닥 위의 이슬에 젖어 쌓인 낙엽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운동장 구석이나 자연석으로 쌓은 담장 축대에 쌓인 낙엽은 보기 좋은데 말이다. 교문 바로 앞에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에서 쏟아진 낙엽은 바람에 날려 파도가 멈추어버린 것처럼 숨이 멎어 있다. 그런 낙엽은 쓸지 않아도 보기 좋다. 그건 그냥 가을이다.

 

빗자루를 찾아 들고 쓸기 시작했다. 시멘트 바닥 위에 너저분한 낙엽, 국화 화분 사이에 쌓여 있는 낙엽, 깨진 바닥 틈에 끼어 있는 낙엽, 그것들을 대나무 싸리비로 휩쓸었다. 어둠 속에서 낙엽이 쓸려 가는 소리가 제법 스산하다.

 

낙엽을 쓸며 어제 한 말실수를 생각했다. 수업을 막 들어가려는데 교감 선생님이 애들 서너 명만 보내 주세요. 왜 그러시는데요. 분리수거한 것들을 정리하고 치워야 해요. 청소시간에 시키시지요. 얼릉 치워야지 보기 싫어. 예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교감 선생님, 교감 선생님은 청소하지 마세요. 왜요? 안 좋아요? 선생님들이 불편해요? 예 안 좋지요. 선생들이야 다 그냥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아이들이 보기 안 좋아요. 교감이 청소하시면 애들은 교감선생님은 원래 청소하시는 분이구나. 이렇게 생각해요. 그래도 더러운 걸. 낙엽이 뭐가 더러워요 하려다 말았다.

 

교감은 문자 그대로 '학교를 보라'는 것이지 청소가 아닙니다. 청소를 하려면 용인을 한 명 더 채용하도록 건의해야 합니다. 본질을 찾아야지요. 하고 싶었다. 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자리가 그 자리인 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청소 지도를 하는 사람이지 청소를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산다. 사실 이 넓은 공간을 80명 아이들이 깨끗이 치우고 살려면 수업시간을 포기해야 한다. 약간 지저분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청소 지도를 하고 아이들이 깨끗이 생활하려는 자세를 가르치면 되는 것이다. 공간이 너무 넓어 지도의 수준을 넘어서면 용인을 시켜야 한다. 교감은 학교를 바라보고 업무를 파악하고 지도해야 한다. 창의적인 교육방법을 구안해서 제시하고 뒷받침해야 한다. 교감들에게, 교사들에게 그런 시간 여유를 주어야 한다. 청소 때문에 본질을 잊게 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능력 없는 교사나 교감들이 청소로서 무능을 보상하려 한다.

 

그러나 나의 오지랖 넓은 그 말이 착한 교감선생님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아 내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수업하는 교단 교사로서 내 본질을 알고 그것을 본분으로 삼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뒤돌아 볼 여유가 없다. 나는 본질을 잊고 청소나 다른 것으로써 보상하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내내 교감선생님에게는 미안하다.

낙엽은 한 무더기가 되었다. 선배 선생님이 인라인 스케이트를 메고 나가면서 가을을 쓸어요?

아니, 그냥 운동 삼아서요. 아침에 청소를 하면서 다른 교사가 보면 공연히 쑥스럽다. 그 때 하는 대답이 '운동 삼아서'이다. 절대로 근무 평정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근무평정 때문이 아닌데도 다른 교사들은 다 그렇게 본다. 그렇게 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신경 쓰인다.

 

아니 서른여섯에 담임이 없을 때 출근하면 교장처럼 학교를 한 바퀴 돌면서 쓰레기를 주웠다. 지난 번 학교인 금천고에서 내내 그랬다. 사실 운동 삼아서인데 교장 교감이 보면 보기 좋고 동료교사가 보면 웃기는 게 아침 청소이다. 내내 하던 아침 청소를 작년에는 안했다. 교감 선생님이 하도 말려서 하지 못했다. 이유는 체통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체통? 교무부장이 무슨 체통? 그것도 웃기는 이유다. 청소는 아무나 다 하는 것이라는 게 평소의 나의 소신이다. 더러운 것을 먼저 발견한 사람이 하는 게 청소이다. 그러나 한 살 적은 교감이 그렇게 말리는데 더 할 수가 없었다.

 

가을을 쓰는 동안 동녘이 붉게 타오른다. 똥이 마렵다. 큰일이다. 마무리를 져야 하는데---

마무리? 마른 대나무로 아랫배를 쿡쿡 쑤시는 것 같다. 억지로 마무리를 하고 관사로 뛰어 들어 왔다. 시원하다. - 시원하다. 이런 마무리를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될까?

 

관사에 와 있으면 세 번 고독한 나를 발견한다. 변기에 앉아 있는데 신문이 없다. 신문을 보지 않으면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대신 한국수필이나 수필문학을 갖다 놓고 신통하지 않으면서도 내내 단골 필자인 이들의 수필을 읽는다. 더 막힌다.

 

밥을 먹고 나서 코펠에 바닥에 눌어붙은 눌은밥풀떼기를 뗄 때 소리가 너무 클 때 심각한 고독을 발견한다. 좁은 부엌에서 엷은 코펠에 악착같이 눌어붙어 있는 밥풀떼기를 떼려면 온 주방 안이 쩡쩡 울린다. 소리만큼 고독하다.

 

출근할 때 관사를 아침 햇살에 곱게 빛나는 노란 자물통을 철컥 잠글 때 또 고독하다. 퇴근하면서 종일 햇살에 달구어져서 따끈따끈한 자물통을 비틀어 열 때 또 고독하다. 자물통에는 고독이 너덜너덜 묻어 있다.

 

그러나 이 나이에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아내 없이 늘 혼자 사는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고독을 견딘다. 내게는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고 좋은 사람들의 모임도 있고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문자 보내는 후배도 있고 문학도 있지 않은가?

 

오늘도 단풍에 불타는 이화령에는 아침 햇살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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