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쇠비름처럼

느림보 이방주 2018. 8. 27. 04:13

쇠비름처럼


2018년 8월 5일

 주중리에서


 

쇠비름처럼 살아볼 일이다.

오늘은 어떤 꽃이 보일까. 어떤 들풀이 나를 부를까. 주중리 농로는 대부분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단단한 콘크리트 밑에 뭔가 생명들이 깔려 숨을 몰아쉬고 있지는 않을까. 굼벵이도 잠을 잘 테고 지렁이도 꼼지락거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풀씨도 그 밑에서 옅은 숨을 몰아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콘크리트 농로는 사람들에게만 편리할 뿐 다른 생명들의 숨통을 졸라대는 폭력이다. 간악한 인간의 두뇌가 창안해낸 폭력이란 말이다. 인간은 식물의 줄기나 뿌리나 씨앗을 먹고 자신의 생명은 유지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남의 명줄은 조르고 있는 셈이다.


농로 시멘트 바닥에는 여기저기 죽은 풀이 나뒹군다. 바랭이도 있고 쇠비름도 있다. 사람들이 뽑아 죽음의 땅에 내던진 것이다. 논에서 뽑아 던진 피도 있다. 피는 논흙덩이를 안고 나와서 시멘트 바닥에 흩어놓는다. 자전거 가는 길을 방해는 하지만 콘크리트에서라도 뿌리를 벋고 살아야 하는 들풀에게는 생명줄을 기댈 커다란 언덕이 된다. 그 한 줌의 흙이 명줄을 이어가는 '서릿발 칼날진 그 위'라는 위기의 절정이 된다.


길바닥에 던져지는 들풀 중에 가장 참혹한 것은 쇠비름이다. 쇠비름은 주로 채소밭을 벌겋게 차지하고 뻗어간다. 제 가족을 모두 거느리고 배추나 다른 남새에게 주어진 땅을 대신 차지하고 영역을 확대해 나간다. 다른 풀들은 어린 싹을 호미로 득득 긁어 놓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는데 쇠비름은 그냥 쓰러져 비들비들 말라가는 척하다가 이슬로라도 한 방울 목을 축이면 잔뿌리 끄트머리로 모래알 한 알을 붙잡고 목숨을 부지하면서 살아날 기회를 엿본다. 그걸 아는 농부는 쇠비름을 뽑아 뿌리를 하늘로 향하게 뒤집어 놓는다. 얼마나 원수 같으면 흙을 탈탈 털어서 홀랑 뒤집어 놓을까. 쇠비름은 뙤약볕 아래서 붉은 잎줄기가 가뭄에 말라죽는 지렁이처럼 까맣게 말라 명줄이 끊어질 위기에서도 살아날 기회를 노린다. 그러다가 여우비라도 한 차례 지나가면 다시 살아난다. 이미 죽어 썩어버린 다른 들풀더미 위에서 끈질기게 뿌리를 뻗어서 죽은 줄기를 뒤집고 이파리를 파랗게 살려낸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시멘트 바닥 갈라진 틈을 비집고 올라와 머리를 들고 일어나 나온다. 처음에 이파리 두 쪽이 기어 나와서는 점점 자라서 회색 죽음의 세계를 벌건 열정의 힘으로 뻗어 나간다. 삶의 환경이 험하면 더 빨리 꽃을 피운다. 생명력 넘치는 붉은 줄기 두툼한 초록색 이파리들 사이에서 노란 꽃이 피어난다. 꽃이 지고 나면 씨앗주머니에서 까만 씨앗이 터져 나와 제 자손을 퍼트린다. 쇠비름에게 혹독한 환경은 그냥 더 단단하게 살리려는 신의 시험이고 은총이다.


이 가뭄에 폭염에 참 모질기도 하다. 그도 그럴만하다. 마른 밭둑에도 습기 많은 논둑에도 아니면 바짝 마른 길바닥에도 쇠비름이 붉은 줄기를 유혈목이처럼 벋어가고 있다. 그런데 주변엔 풀이 다 죽었다. 일손 달리는 어느 농부가 제초제를 뿌린 것이다. 그런데 쇠비름은 제초제를 영양제로 착각했는지 오히려 이들이들하게 퍼진다. 맷방석만하다. 시멘트 포장도로 위에도 유혈목이 모가지를 내밀었다.


쇠비름도 이렇게 모질게 살아남아야 하는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기에게 주어진 하늘의 명령을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옛날부터 쇠비름의 모진 생명력이 인명을 살려 냈다고 한다. 하얀 뿌리, 붉은 줄기, 녹색의 잎, 노란 꽃, 검정색의 씨앗으로 오묘하게 오색을 갖추고 갖가지 영양소와 약효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만병에 유용하여 때로 다 죽게 된 사람도 살려낼 수 있다고 들었다. 쇠비름, 모질고 질기고 독하다고 탓하지 말자. 그 놈에겐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나도 한때 문학을 포기하려 한 적이 있었다. 나를 등단시켜 준 모지母誌에서조차 내 글을 실어주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이게 뭔가. 이게 문단이라는 곳인가. 등단 초기를 넘어 첫 수필집 축 읽는 아이를 낼 때까지 시멘트콘크리트 아래에 깔려 있는 쇠비름이었다, 정말로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문단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러운 축 읽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쯤 자비로운 문우의 소개로 수필 전문지로부터 청탁을 받았다. 가문 유월의 저녁에 내린 이슬 한 방울이었다. 나는 이제는 그의 꽃이 되고 싶다를 보냈다. 한 방울의 이슬도 놓치지 않으려고 백번도 더 살피고 고쳐 썼다.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라는 뜻인지 다른 계간지에서 바로 청탁서를 보내왔다. 나도 발을 디딜 땅이 있구나. 내가 서 있는 곳은 '서릿발 칼날진 그 위'만은 아니구나. 나는 불가마에서 나를 다시 구워내는 마음으로불의 예술을 보냈다. <불의 예술>은 여기저기 불똥을 튀기고 다녔다. 청탁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유약으로 나를 포장하지는 않았다. 연줄이 없는 문단은 내게 시멘트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것보다 더 모질었다. 쇠비름은 도깨비바늘과는 다르다. 저를 뽑아내는 인간의 바지에 붙어 부접 좋은 땅으로 옮겨가는 변칙을 쓰지는 않는다. 머리가 두 쪽이 나도록 콘크리트 바닥을 깨고 나온다. 혹독한 문단이 나를 쇠비름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쇠비름처럼 살아볼 일이다. 혹독한 환경은 신이 내린 시험일뿐이다. 신의 시험은 풀어내야하는 삶의 문제이지 주저앉으라는 핍박은 아니다. 대지는 어느 생명에게나 공평하게 은총을 내린다. 척박한 땅을 주면 끈질긴 생명력도 준다. 대지의 가르침대로 노란 꽃을 피우고 씨오쟁이를 터트려 새끼들을 키워갈 일이다. 나를 닮은 새끼들이 뿌리를 내리고 노란 꽃을 피울 날을 기다릴 일이다. 다 디디고 일어서면 누가 나를 뽑아 시멘트 바닥에 던질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내던져 버림받아 명줄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쇠비름'이란 이름이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쇠비름처럼 모질게 살아볼 일이다. 쇠비름이 대지에서 모성을 받았다면 내 문학의 어머니는 문단이다. 나는 아직 미생未生이다. 그래도 쇠비름에게 배운 정석定石으로 살아볼 일이다. 누구에게든 영양이 되고 영약靈藥 이 되게 살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