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사랑으로 꽃을 피우는 자귀나무꽃

느림보 이방주 2018. 8. 1. 15:21


사랑으로 꽃을 피우는 자귀나무

2018731

좌구산 삼기저수지에서

 

 

저녁 일찍 먹고 좌구산 아래 삼기 저수지에 갔다. 이미 저녁 그늘이 저수지를 덮었다. 산기슭이 저수지로 내려오는 곳에 산책할 수 있도록 나무 잔도를 놓았다. 잔도는 한낮의 볕에 후끈후끈 달아 있어도 물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다르다. 산비탈에 소나무가 가지를 축축 늘어뜨리고 보내주는 시원한 바람에는 솔향이 묻었다. 아내는 앞에 서고 나는 백곡 김득신 선생의 시를 읽으며 천천히 걷는다. 따라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칡덩굴이 시비詩碑 주변을 뒤덮을 때 야릇한 향기가 풍긴다. 칡꽃 향기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다. 자귀나무 꽃 향기였다. 자귀나무 꽃이 아직 남아 있다. 올여름에 반드시 자귀나무 꽃 사진을 찍으려 벼르기만 하다가 내년을 기약했는데 여기서 만나는구나. 자귀나무가 꽃을 피우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다 시들어 꽃잎이 떨어져 말라버렸는데 몇 송이가 힘겹게 남아 기다리고 있다. 가뭄 속에서도 사십도 폭염 속에서도 견디고 제 색깔을 지켜내고 있다.


나뭇잎은 말라 떨어지고 꽃의 주검도 말라 비틀어져 널브러졌는데 몇 송이가 오히려 곱게 남아 있다. 아직도 남은 향기가 좋다. 연두색 곧은 꽃대 위에 불꽃놀이 매화송이가 떨어지는 것처럼 퍼졌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꽃잎이고 어떤 것이 수술이고 암술인지 짐작할 수 없다. 그런데 꽃대 연두색으로부터 서서히 노랑으로 바뀌더니 연한 분홍색이다가 진한분홍색으로 끝은 맺은 수많은 꽃 바늘 끄트머리에 아주 작은 이슬방울 같은 것이 하나씩 맺혀 있다. 그것은 바늘 모양의 꽃잎이 아니라 수술이었다. 바늘 같은 수술 끝에 노란 방울들은 사랑의 정분精粉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암술이 바로 눈에 뜨였다. 암술은 수술의 성 안에서 조금 굵은 대궁 위에 별모양의 암술머리가 있고 거기서 별빛이 반짝이듯 몇 개의 긴 바늘이 퍼져 나왔다. 자귀나무 꽃은 수많은 수술의 울타리 안에서 여왕의 왕관 같은 암술머리와 짜릿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때 축복의 매화포가 검은 하늘을 환하게 밝혀 주리라.


자귀나무 잎은 갸름한 타원형 작은 잎들이 하나의 잎자루에 양쪽으로 죽 매달려 있다. 해가 서산에 지고 주위가 어둑해져서 아무도 보는 이가 없으면 수술과 암술의 사랑이 이루어진다. 해질녘 꽃이 피고 수술이 암술에 사랑의 가루를 뿌리는 순간 이파리들은 안으로 오므라들어 서로 부둥켜안는다. 사랑의 열기를 한 방울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해질 무렵 사랑이 이루어졌으니 이제 곧 밤이슬이 내리면 저 잎사귀들이 서로 끌어안고 잠자리에 들리라. 그래서 금슬 나무라 하지 않는가. 잎사귀들이 운우지락을 누리며 밤을 지내고 아침이슬 맞으면 사랑 나눈 잎사귀들 울력으로 연홍색 꽃송이도 더 새뜻해지겠지.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사랑을 한다. 누구보다 진한 사랑을 한다.


버드나무 아래에서 푸드덕 물새가 난다. 무슨 일인가. 우리 내외도 발걸음이 바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