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꽃 피는 한가위
주중리에서
2018년 9월 23일
5시 30분 기침했다. 주중리에 갔다. 어제 봐두었던 동부 꽃을 찍고 싶었다. 어제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다 보니 예쁘게 활짝 핀 꽃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쯤은 아무래도 '뽁'하고 소리를 내며 신비스런 봉오리를 터드렸을지도 모른다. 아침이슬이 강아지풀꽃에 하얗다. 강아지 꼬리 털보숭이 같다. 가을은 아침 기운이 다르다. 여름 이슬이 투명한 구슬이라면 가을 이슬은 하얀 성에꽃처럼 신비롭다.
누렇게 고개 숙인 볏논을 지나 어느 비얄밭에 이르렀다. 수로에는 이미 물이 말랐다. 동부는 비얄밭 개바자에 덩굴이 기어올라 보라색으로 꽃을 피웠다. 버선코 모양인 미색 봉오리는 꽃으로 피어나면 엷은 보랏빛이 된다. 예쁜 나비를 닮았다. 널찍널찍한 잎사귀 녹색이 짙어 꽃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이미 풋꼬투리가 생겨 푸릇한 놈도 있고, 연두색으로 풋기를 잃어가는 놈도 있고, 어느새 노랗게 익어 수확할 때가 된 놈도 있다. 그런 옆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꽃을 피운 것이다. 아직 미색 버선 모양의 봉오리로 때를 기다리는 놈도 있다. 그래서 동부는 한 번에 수확이 안 된다. 들을 오고가며 바구니에 몇 꼬투리씩 따다가 맷방석에 널어 말린다. 여름내 그렇게 모아 한가위 송편 속으로 쓴다.
한가위 송편 속으로 동부고물이 좋다. 콩고물도 좋고 흑임자도 좋지만 나는 동부고물로 속을 넣은 송편을 참 좋아했다. 솔잎향이 진한 햅쌀로 빚은 송편을 물어 떼면 햇동부 특유의 가을향이 입안에 가득해졌다. 그리고 입안에 포실포실한 촉감도 고소한 맛도 좋았다. 도회의 한가위는 그런 황홀한 촉감도 고소한 맛도 전설이 된 지 오래다. 어느 중노인이 동부꽃 사진을 찍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중늙은이에게도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나온 사람이 수상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가을 한가운데, 주중리 들녘에는 가을빛이 가득하다. 꽃은 꽃끼리 어우러지고, 볏논은 볏논대로 풍성하다. 동부꽃 피는 들녘은 어제나 그제나 그리고 오늘이나, 가을이나 여름이나 봄이나, 조용히 아주 조용히 제 할일만 한다. 이제 내일이면 한가위이다. 지붕처마를 지나온 달빛이 행주치마 자락에 내려앉는 마루에서 밤이 깊도록 동부를 까시던 갈라진 엄마 손이 그리운 팔월 열 나흗날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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