鳳鳴洞 四百年 소나무 鳳凰松 由來碑文
봉명동 사백살 소내무 명명 추진위원회 최헌식 위원장의 부탁을 받은 봉명동 400살 소나무 봉황송 유래비문을 드디어 완성했다.
송정2봉명동 사백살 소나무 명명 준비위원회 최헌식 위원장으로부터 이 부탁을 받은 것은 5월 30일이다. 최헌식 위원장은 세계직지문화협회에 있는 청주시 일인일책담당 임정숙과장으로부터 나를 소개받았다고 했다. 최헌식 위원장으로부터 추천 의뢰를 받는 순간에 비문을 쓸 수 있는 적임자로 나를 생각해낸 임정숙과장님이 엄청나게 고마웠다. 내가 무슨 씨앗을 심었길래 그 분이 나를 생각해 냈는지 정말 기막히지 않은가? 인연이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보다. 최헌식위위원장과 임정숙 과장과의 인연, 나와 임정숙과장의 인연이 나와 소나무와의 인연으로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처음 두려웠지만 이렇게 인연이 이루어지는 흐름을 믿고 분명 좋은 비문이 내게 내려질 것이라는 어떤 신비스러운 예감 때문에 대책도 없이 그냥 하겠노라고 대답해 버렸던 것이다.
최헌식 위원장을 만나는 날 봉명동 일대의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우선 봉명동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인 대학 후배 송문규교장과 최헌식 위원장을 만나 소나무를 보았다. 이날 박진호 동장도 한 자리에 모였다. 소나무는 봉명동 1677번지에 있는 어린이 공원 한 가운데에 서 있는데 그 위용이 대단했다. 400년이란 세월에 비해 밑동은 2.2m 정도라 그리 크지 않게 보였지만 가지는 꿈틀꿈틀 용틀임하며 하늘로 치솟는 형국이었다. 이런 모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부근의 백봉산, 과상뫼 유래비, 봉명동 자랑비 등을 답사하고 돌아오는 글에 월명산 금단산을 돌아 보았다.
봉명동에 대한 각종 문헌과 과상뫼 마을을 형성한 의령남씨들의 사적, 의령남씨가 처음 이 소나무를 심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인터넷과 문헌을 통해 조사하였다.
일주일을 고민 끝에 결국 다음과 같은 유래비문을 완성하게 되었다.
비문이니 지역의 역사니, 소나무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금석문이라는 것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었으나 최선을 다했다. 그래도 추진위원들이 모두 흡족해 해서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졌다.
7월 14일 오전 현장에서 명명식과 비문 제막식을 갖는다. 그날 참석해야 한다.
무릇 산은 고을을 나누고 사람은 물길로 통한다. 백두대간 속리산 천왕봉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분기 피반령 못미처 팔봉지맥을 낳고 팔봉지맥은 팔봉산 구룡산으로 갈라져 진대마루 과상뫼 원송절에 매화송이 같은 봉우리들을 툭툭 내던지더니 여기 봉명동(鳳鳴洞)에 이르러 백봉산 금반산 월명산을 꽃봉오리처럼 빚어내었다. 한남금북정맥에서 발원한 무심천은 미호천으로 금강으로 서해로 흘러든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뿌리 깊은 산 아래 삶의 터전을 일구어 물길을 따라 세계로 뻗어나간다.
조선개국일등공신의성부원군강무공(朝鮮開國一等功臣宜城府院君剛武公) 남은(南誾)은 의령남씨(宜寧南氏) 시조 남군보(南君甫)의 오세(五世)이다. 강무공의 오세인 어모장군훈련원정(禦侮將軍訓練院正) 남홍(南鴻)은 서기 1540년에 낙향하여 이곳을 세거지로 삼았다. 십이세 오위장공조판서(五衛將工曹判書) 응호(應浩) 장악원정(掌樂院正) 응수(應洙) 형제는 이곳에 집성촌을 형성하여 대대손손 살아왔다. 응호의 아들 진무령국원종일등공신 통훈대부영월군수(振武寧國原從一等功臣 通訓大夫寧越郡守) 대현(大賢)이 광해군 10년 서기 1618년에 19세로 무과에 급제함을 기념하여 1621년에 응호 응수 형제가 심은 소나무가 400년이나 건재하니 청주시가 1992년 2월 보호수로 지정하였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니 연원 깊은 소나무 덕을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하여 2018년 봉명2송정동사백살소나무명명추진위원회를 결성 4425명 동민이 참여 3138명의 찬성으로 5월 29일 봉황송(鳳凰松)이라 확정하여 이날을 생일로 삼고 6월 29일 명명식과 함께 마을 상징으로 보존하기로 하였다.
봉황은 새 중 으뜸이요 백봉산 자락에서 대나무 열매를 먹으며 힘차게 울었다는 전설이 있어 봉명동이니 봉황송이란 이름은 비단에 꽃을 얹은 격이다. 의령남씨는 대를 이어 장원급제하였고, 고을에는 인재가 그침 없으니 봉황송 정기의 덕이다. 봉황새 울던 백봉산에서 문무를 연마하던 선현의 뜻과 400년 꿋꿋이 하늘을 우러러 용틀임하는 봉황송 숨은덕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지덕을 지닌 인재가 연년세세 무궁무진함을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기리고자 한다.
수필가 이방주 삼가 짓다.
2018년 6월 29일
봉명2송정동사백살소나무명명추진위원회
◎◎◎ 추진위원회에서 쉬운 말로 고쳐 달라는 요구가 있어 고친 최종 비문
봉황송 유래비
무릇 산은 고을을 나누고 사람은 물길로 통한다. 백두대간 속리산 천왕봉에서 한남금북정맥이 분기 피반령 못미처 팔봉지맥을 낳고 팔봉지맥은 팔봉산 구룡산으로 갈라져 진대마루 과상뫼 원송절에 매화송이 같은 봉우리들을 툭툭 내던지더니 여기 봉명동(鳳鳴洞)에 이르러 백봉산 금반산 월명산을 꽃봉오리처럼 빚어내었다. 한남금북정맥에서 발원한 무심천은 미호천으로 금강으로 서해로 흘러든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뿌리 깊은 산 아래 삶의 터전을 일구어 물길을 따라 세계로 뻗어나간다.
조선개국공신 강무공(剛武公) 남은(南誾)은 의령남씨 시조 남군보(南君甫)의 5세이다. 강무공의 5세인 어모장군 남홍(南鴻)은 서기 1540년에 낙향하여 이곳을 세거지로 삼았다. 12세 공조판서 응호(應浩) 장악원정 응수(應洙) 형제는 이곳에 집성촌을 형성하여 대대손손 살아왔다. 응호의 아들 통훈대부 대현(大賢)이 광해군 10년 서기 1618년 19살로 무과에 장원급제함을 기념하여 1621년에 응호 응수 형제가 심은 소나무가 400년이나 건재하니 청주시가 1992년 2월 보호수로 지정하였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니 오랜 역사를 지닌 소나무 덕을 널리 알리고 보존하기 위하여 2018년 봉명2송정동400살소나무명명추진위원회를 결성 4425명 동민이 참여 3138명의 찬성으로 5월 29일 봉황송(鳳凰松)이라 확정하여 이날을 생일로 삼고 6월 29일 명명식과 함께 마을 상징으로 보존하기로 하였다.
봉황은 새 중 으뜸이요 백봉산 자락에서 대나무 열매를 먹으며 힘차게 울었다는 전설이 있어 봉명동이니 봉황송이란 이름은 비단에 꽃을 얹은 격이다. 의령남씨는 대를 이어 장원급제하였고, 고을에는 인재가 그침 없으니 봉황송 정기의 덕이다. 봉황새 울던 백봉산에서 문무를 연마하던 선현의 뜻과 400년 꿋꿋이 하늘을 우러러 용틀임하는 봉황송 숨은덕으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지혜와 덕성을 지닌 인재가 연년세세 무궁무진함을 소망하는 마음을 담아 기리고자 한다.
수필가 이방주 삼가 짓다.
2018년 6월 29일
봉명2송정동400살소나무명명추진위원회
'문학생활과 일상 > 삶과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 홍차 체험 (0) | 2018.07.30 |
---|---|
김은숙 시인 가족 문집 표사 (0) | 2018.06.14 |
장엄한 백두산 신비로운 천지 (0) | 2018.05.24 |
무술년 불기 2562년 보살사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요식 (0) | 2018.05.23 |
가림성 사랑나무 찾아가기 (0) | 2018.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