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등산과 여행

세계자연유산 제주도 여행기 - 제 5일차

느림보 이방주 2018. 1. 24. 16:55

세계 자연유산 제주도 여행기 -제 5일차


2018120() 맑음

 

여정 : 고산리선사 유적지 제주곶자왈도립공원 추사관 산방산(산방산 보문사, 산방사, 산방굴사) 남원큰엉해안 경승지

    

 

어제 추자도 다녀온 피로가 풀리지 않아 늦게 일어났다. 아침에 빵을 구워서 딸기잼을 발라 간단히 먹었다. 어차피 나가서 제주 특미로 점심을 과하게 먹을 것이니까 말이다. 9시 넘어서 출발했다.


오늘 운전 거리는 다른 날보다 길다. 어쩌면 제주를 일주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한라산 중턱의 산간 도로로 고산리 선사유적지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는 해안도로를 타고 오기로 했다. 네비에 고산리선사유적지를 입력만 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데려다 줄 것으로 믿었던 것이 잘못이다. 현대 네비에 검색 조건을 추천으로 하고 목적지를 입력하면 100% 도시를 통과하게 한다. 오늘이 그랬다. 조천읍 와흘에서 제주시까지 내려갔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유턴해서 돌아왔다. 네비를 무시하고 지도를 보면서 1118번 지방도로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다가 1119번 지방도로를 따라서 한경면 쪽으로 달렸다. 네비는 계속 서귀포시를 통과하라고 난리를 쳤지만 그대로 1119를 지나 1115번 지방도로를 달렸다. 이 도로를 달리는데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렸다. 속도 제한이 많고 카메라가 있다. 그리고 제주의 차들은 과속하지 않는다진짜 중요한 이유는 주변의 나무와 경관이 좋아서 도저히 빨리 달릴 수 없었다. 마치 이국의 도로를 달리고 있는 기분이다. 이런 곳을 운전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내 차가 다시는 여기를 달릴 수 없을 것이다. 하긴 한 번 가져와 보니 이렇게 편리하고 좋으니 다시 가지고 올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서귀포시에는 동백이 이미 만발해서 길가가 온통 꽃밭이다. 도로변에 심은 동백이 만발하여 붉은 꽃가루를 풍겨놓은 것 같다. 아니면 붉은 백 비단에 샛노란 금실로 수를 놓아 펼쳐놓은 듯하다. 여기는 한라산 너머 제주시보다도 봄이 더 일찍오는지 따뜻하다.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사람 살기 좋을 것 같다.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산간도로에서 평지로 내려서자 들에서는 양배추를 비롯한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귤밭은 온통 금빛으로 보석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야말로 금밭이다. 초록 나뭇잎 사이로 노랑 귤 열매가 대비되어 더 아름답다. 귤값이 싸서 우리는 사 먹기 좋지만 이 분들은 정말 금밭이 될지 의문이다. 보는 사람은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는 땀이고 피이다. 그것이 삶이다.


1.  고산리 선사 유적지


고산리 선사유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유적지에는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만 한 채 덩그러니 폐허처럼 서 있고 아무것도 없다. 주변은 지표조사를 했던 곳인지 평평한 곳에 잡초만 무성하다. 안내 표지판만 두 개 서 있었다. 건물에 들어가려니 건물은 완전히 폐쇄했다. 마당을 여기저기 파헤쳐 주차하기도 어렵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몹시 분다. 썰렁하다.



2. 제주곶자왈도립공원


차를 돌렸다. 제주 곶자왈도립공원으로 갔다. 곶자왈이란 나무와 덩굴식물, 이끼, 양치류 등의 식물과 용암석 등이 얼크러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제주에는 몇 군데 곶자왈이 있는데 이곳 대정은 곶자왈이 가장 크고 유명하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것 같다. 주차장에 차가 가득하다.



제주 곶자왈도립공원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신평·보성·구억리의 곶자왈 일대를 포함하는 도립 공원.

 

[개설]

곶자왈은 수풀이 우거져 원시림 지대를 형성하며 빗물이 지하로 흘러들어 지하수를 만들기 때문에 제주 생태계의 허파로 불린다. 서귀포시 대정읍 4개 마을[무릉리·신평리·보성리·구억리]에 걸쳐 있는 약 1546757에 이르는 규모의 곶자왈을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제주 곶자왈 도립 공원으로 지정하였다.

 

[건립 경위]

제주의 대표적인 자연 자원인 곶자왈은 미래 제주 환경 자산 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해 무분별한 개발 사업으로부터 보호하고, 2012년 세계 자연 보전 총회[WCC] 개최를 맞아 제주의 특성인 곶자왈을 도립 공원으로 지정하여 세계인들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또한 곶자왈 지역에 체험과 학습 기능을 갖추어 스토리텔링과 연계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곶자왈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 보전 필요성 등을 방문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변천]

제주특별자치도는 제주 국제 자유 도시 개발 센터[JDC], 곶자왈 공유화 재단과 함께 업무 협약식 체결[2010. 12. 29.] 및 제주 곶자왈 도립 공원 기본 계획을 수립하였고 환경성 검토 협의회를 개최[2011. 5. 17]하여 환경 훼손 예방 대안 등에 대한 검토를 거친 후 사전 환경성 검토서와 도립 공원 계획 주민 공람을 통해 의견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사전 환경성 검토서와 도립 공원 계획에 반영하였다. 이후 환경부 영산강 유역청 협의를 거쳐 환경부에 도립 공원 지정 계획 협의 및 제주특별자치도 도립 공원위원회 심의 등 행정 절차를 거쳐 제주 곶자왈 도립 공원 지정 및 공원 계획’[2011. 12. 31를 지정·고시 하였다.

 

[구성]

대상 역은 대부분 생태계 보전 등급, 지하수 보전 등급, 생태 자연도가 각각 2등급, 경관 보전 등급은 4등급이며 토지 이용 상황은 대부분 임목지 상태이다. 제주 곶자왈 도립 공원의 용도 지역은 곶자왈을 보호하기 위해 전체 면적의 92.9%는 공원 자연 보전 지구, 7.1%는 공원 자연 환경 지구로 지정하였다. 자연 보전 지구에서는 개발 행위를 전혀 할 수 없고, 자연 환경 지구에는 곶자왈 전망대, 탐방 안내소, 탐방로, 쉼터, 주차장 등 공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설만을 친환경적으로 조성하여 체험과 학습 기능을 갖춘 도립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현황]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제주 곶자왈 도립 공원지정을 통해 2012년 세계 자연 보전 총회[WCC] 개최 전까지 탐방로, 쉼터 등을 우선 시설할 계획이며, 장기적으로는 인근 청수 곶자왈 지역 등 도내 곶자왈 지역을 도립 공원으로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따라서 곶자왈의 무분별한 개발 사업을 막고 체계적인 보전 관리와 학습의 장 및 도민의 건전한 여가 쉼터 제공 등 자연 휴양 공간으로써 지속 가능하게 할 계획이다.




입장료를 받는다. 성인은 1인당 1000원이다. 아내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많이 걸어 들어간다. 이름 그대로 나무가 많고 덩굴 식물들이 서로 얼크러져 있었다. 새들이 계속 따라오며 지저귄다. 나름대로 곶자왈을 설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용암석에는 이끼가 자라고 있거나 콩짜개 덩굴이라는 식물이 엉겨 붙어 자라고 있어 수분이 유지되는 것 같다. 콩짜개덩굴은 용암석에만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라 나무에도 붙어 기어오르고 있다. 용암석에는 이끼도 자라고 있다. 모두가 공생하며 서로의 생명을 유지해 주는 모습이다. 콩짜개 덩굴은 콩을 반으로 쪼개놓은 것처럼 크기나 모양이 똑 같은데 진한 초록으로 반짝반짝 윤이 나서 보기 좋다. 화초로 가져와 집에서 길러도 보기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그 놈도 제가 좋아하는 환경이 있을 것이다. 가뭄이 들어 시들시들하다가도 물을 한 방울만 주어도 반짝 살아난다고 한다.


콩짜개 덩굴 말고도 눈에 많이 띄는 것은 고사리 종류이다. 이 식물은 그냥 대충보면 고사리와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저마다 종류가 다르다. 엄청나게 여러가지가 있다.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길은 나무 데크를 놓기도 하고 자연 그대로 두기도 했다. 청주는 미세먼지가 아주 나쁨 수준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상쾌하기만 하다. 콧구멍이 뻥 뚫리는 것 같다. 비가 내리면 냇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용암석 아래로 그대로 스며들어서 지하수가 된다고 한다. 한 두어 시간을 걸었다.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우리에게도 이렇게 큰 숲이 있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곶자왈도립공원 안내소

산책로

용암석에 뿌리를 내린 이끼와 콩짜개

고사리 식물

돌에도 콩짜개

전망대 아래에서

전망대에서 본 숲


곶자왈


숲에서

고사리의 일종

나무에 기어오르는 콩짜개


3.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추사관)


서귀포 추사 김정희 유배지

[정의]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남아있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유배 생활과 관련된 흔적.

 

[개설]

조선 시대의 대정현(大靜縣)은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과 안덕면, 한경면 일대로서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유배지로 인식되고 있다. 1495(연산군 2) 환관 김순손(金舜孫)이 연산군의 난폭함을 지적하였다가 충군형을 받고 유배된 이래 조선 왕조 동안 총 60여 명이 유배되었다. 특히 1840(헌종 6) 대정현에 마지막으로 유배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8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제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대정에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김정희의 유배 생활과 관련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추사, 대정에 유배되다]

추사 김정희는 경주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영조의 사위였던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며,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은 예조 판서를 비롯하여 이조·공조·형조·병조의 판서를 두루 지낼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김정희 역시 1809(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충청우도 암행어사·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적이였던 안동 김씨 세력의 탄핵을 받아 1840(헌종 6)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김정희의 유배 노정을 살펴보면, 충청도 천안, 전라도 완주를 거쳐 해남에서 화북포로 하여 제주도에 들어온 후 대정현으로 들어갔다. 김정희는 처음 대정현 안성리 포교 송계순의 집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다시 강도순의 집[오늘날의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으로 옮겼다. 이후 식수 문제로 인해 다시 창천리로 옮겨 거처하였다. 추사는 이후 섬이라는 고립성과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인 제주도에서 가족과 친지, 친구 등 지인들과 격리되어 8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외로운 생활하게 된다.

1848(헌종 14) 유배가 풀려 복귀하였으나 1851(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성행하던 때라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고,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서 일흔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절망과 긍정, 세한도를 낳다]

본디 유배된 죄인은 행동이 제한되는 게 보통이다. 외부와의 연락은 서신으로만 가능하며 음식을 나르는 경우나 관료를 제외하고는 완전히 차단되어 지루한 생활이 반복된다. 추사 역시 위리안치형으로 집 주위에 가시나무가 둘러쳐 있어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형식적일 뿐, 타 지역으로의 이동은 제한이 있었으나 대정현 내에서는 이동이 가능하였다. 이에 추사는 대정향교 현판에 글을 쓰고 산책을 하는 등, 지루하지만 여유로운 유배 생활을 하였다.

추사는 시··화에서 조선 최고라고 알려져 있다. 특히 대정현 유배 생활은 그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추사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여러 서체를 익히고, 그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추사체를 대정현 유배 생활 중에 완성하였다.

또한 유배인 추사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매진하였다.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歲寒圖)[국보 제180]는 김정희의 최고 걸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이라 평가받는다. 추사는 1844(헌종 10) 나이 쉰아홉에 수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어 자신의 심정을 간접적이나마 토로하였다.

추사가 유배 생활 중 남긴 5181수의 시와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많은 서신이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추사의 글을 살펴보면, 추사가 유배지 제주를 자신이 궁극적으로 속해야 할 공간으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배라는 절망과 외로움 속에서 일단 유배지의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태도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을 수용하는 성격과 태도는 추사가 83개월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면서 유배지에서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게 하였다.

추사는 예술 활동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써도 제주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제자가 삼천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교육 활동에 힘쓴 추사의 제자로는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이상적·강위·허련 등이 있으며, 대정현 유배 중 강기석·강도순·강사공·김구오·김여추·김좌겸·박계첨·이시형·이한우·홍석우 등이 그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다. 또한 민규호의 기록에 따르면, 추사가 제주에 온 뒤 글을 배우려고 찾아온 자가 대단히 많았고, 두어 달 동안에 인문이 크게 열려서 탐라의 황폐한 문화를 개척한 것은 추사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적고 있는 등 추사는 19세기 제주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추사의 자취 찾기, 만들기]

추사가 생애를 보낸 곳이라면,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 유배 생활을 하였던 제주도 대정, 그리고 북청 유배 생활을 마치고 남은 여생을 보냈던 경기도 과천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모두 추사와 관련하여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하면서 조선 시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추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 대정읍에서는 추사가 대정현에 유배되어 살았던 강도순의 집을 1984년 강도순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복원하여 사적 487호인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를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세한도사본을 비롯하여 추사 김정희가 대정향교 동재 현의 글씨로 써 주었다는 의문당 현판, 그리고 기증받은 추사 김정희와 친인척의 관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대정에서는 2001년부터 매년 마을 주민들을 중심으로 추사문화예술제를 개최하고 있다. 예술제에서는 추사서예대전을 비롯하여 추사 선생 유배 행렬 재현, 대정고을 역사 사진전 등 다양한 행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추사의 대정 유배에 대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에서는 제주 유배문화의 녹색 관광자원화를 위한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추사 유배길을 비롯한 추사 김정희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특히 추사 유배길은 제주 유배문화의 녹색 관광자원화를 위한 스토리텔링 콘텐츠 개발 사업1차년도 과제로 추사 김정희가 83개월 동안 유배 생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대정을 중심으로 스토리텔링이 이루어져 지역의 공간을 역사 인물 스토리텔링의 매체로 활용하였다. 추사유배길은 추사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기획되어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를 중심으로 대정읍과 안덕면에 걸쳐 만들어졌다.

제주 관광의 한 트렌드가 된 올레길과 같이 추사 유배길 또한 3코스로 구분되어 있는데 집념의 길이라 명명된 1코스는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를 시작하여 송죽사터, 첫 번째 유배지 터, 드레물, 동계 정온 유허비, 한남 의숙 터, 정난주 마리아 묘, 남문지 못, 단산, 세미물, 대정향교,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로 순환된다. ‘인연의 길이라 명명된 2코스는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를 시작으로, 수월이 못, 제주옹기박물관, 곶자왈 지대, 서광승마장, 오설록으로 이어지며, ‘사색의 길3코스는 대정향교를 시작으로 완당인보, 산방산, 추사아호, 안덕 계곡으로 이어진다.

추사 김정희와 관련한 유배길은 기존의 산발적으로 존재했던 추사 관련 이야기들을 체계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로 한정되어 있던 공간을 대정읍 일대로 확장하여 지역 홍보와 발전에 많은 효과를 거둘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와 같이 추사 김정희와 관련한 다양한 사업들이 추진되면서 추사 김정희의 대정 유배 생활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됨과 동시에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콘텐츠로 활용되어 김정희의 대정 유배가 재해석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는 지역으로 서귀포시가 변화하고 있다.

 

곶자왈도립공원에서 나오니 오후 두시가 넘었다. 길가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아주 간단히 먹었다. 흑돼지돌솥비빔밥인데 값도 싸고 맛도 좋다. 그리고 종업원들이 아주 친절햇다. 시간이 많이 가서 제주 전쟁 역사 평화공원을 포기해야 했다.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에 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추사관에 들어갔다. 추사의 일생과 학문, 글씨, 정치, 교우관계, 삶 등을 상세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오히려 추사의 고택이 있는 충남 예산보다 훨씬 잘 해 놓았다. 세한도는 문인화로서 최고의 예술성과 정신적 가치를 지닌 예술품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추사가 이곳에 와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그 제자 이상적이나 차로 맺은 친구 초의선사, 그리고 추사를 거두어준 집주인 강아무개 등과의 인간관계라든지 마을 청년들에게 가르친 학문이라든지 그의 올곧은 삶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선비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이들의 관계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하였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지식인이 아니라 지성인이었다. 나는 학문의 목적을 대학을 들어 생각하곤 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고 在親民하고 在止於至善이라는 기본 목표가 바로 학문의 목표라고 생각해 왔다. 밝은 덕을 밝히고 대중을 새롭게 이끌어 깨우쳐 주기 위한 인품을 갖추는 것이 바로 대학의 목표이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이 치우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지극한 선에 머물 수 있어야 한다. 진리를 알아야 대중을 가르칠 수 있고 대중을 가르친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최고의 선에 머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至善이란 무엇인가? 가장 좋을 것일 수도 있고, 가장 착한 것일 수도 있고, 가장 진리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덕을 갖추고 거기에 이른 경지가 바로 知性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선비는 지식인이 아니라 지성인이라야 한다고 본다. 추사나 초의선사나 이상적 같은 이들은 바로 지성인이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추사의 삶은 늘 씨앗을 뿌리는 하루 하루였다. 그러므로 그것이 꽃이 되고 열매가 되어 그에게 돌아와 그의 주변을 아름답게 했다. 주변 사람에게 존경받고 추사체를 이루어 낸 것이라 본다. 추사를 연구하여 업적을 거둔 수필창작교실의 회원인 유진경 박사가 인연이 되어 내가 추사와 초의 선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참으로 뿌린 것도 없이 복으로 돌아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늘 감사하고 있다.

추사의 유배지는 대정읍성 안에 있었다. 읍성을 한 바퀴 돌아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 그만 두었다. 읍성은 제주의 용암석으로 쌓아 마치 민가의 돌담보다 조금 높아 보였다. 읍성 안에 추사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가도 있고, 초등학교도 있다. 설명에 의하면 15세기 초에 현감이 쌓았다고 하고 4개의 문지와 치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제주 3대 읍성 중의 하나라고 한다. 시간이 없어 다 돌아보지 못해 안타갑다. 



추사관 입구

추사 김정희


추사와 추의선사

통시

허벅

대정읍성 일부

 

4. 산방굴사

차를 돌려 산방산으로 향했다. 산방산 주차장에는 관광객이 북적거리고, 막 도착하여 주차하는 차와 관광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와 외국 관광객들이 뒤엉켜 다소 무질서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차 요금은 받는 곳도 있고 그냥 주차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가만히 보니 사설주차장과 공영주차장이 붙어 있다. 잘 모르고 사설주차장에 주차하면 주차요금을 내고, 그렇지 않으면 공짜다. 그런데 사설 주차장이 들머리에 가깝고 빈 곳이 많아 누구나 그곳에 주차하도록 되어 있다. 간신히 공짜인 공영 주차장에 주차하고 산방굴사에 올라갔다. 가는 길에 규모가 큰 산방산 보문사에 들렀다. 금빛 거대한 약사여래가 저녁 햇살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법륜을 돌리며 마음 속으로 기도하고 아내는 법당에 들어갔다. 옆에 산방사라는 사찰이 또 있었다. 그냥 버리고 산방굴사로 올라간다.



산방산

산방산은 높이 395m이며, 모슬포로부터 동쪽 4해안에 있다. 유동성이 적은 조면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종상화산(용암원정구)이다. 화구가 없고 사면경사가 50° 내외이며, 사방이 절벽을 이룬다. 신생대 제3기에 화산회층 및 화산사층을 뚫고 바다에서 분출하면서 서서히 융기하여 지금의 모양을 이루었다. 북쪽 사면 일대는 인위적인 식목림과 초지를 이루고 있다. 산정부근에는 구실잣밤나무·후박나무·겨울딸기·생달나무 등 난대림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유일한 섬회양목 자생지이기도 하다. 암벽에는 지네발란·동백나무겨우살이·풍란·방기·석곡 등 해안성 식물이 자생하고 있으며, 제주도에서는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도라지가 서식하고 있다. 학술연구자원으로 매우 가치가 높아 1966년 천연기념물 제182-5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또한 산양이 서식하고 있다.

 

이 산에는 옛날 한 포수가 한라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잘못해서 산신의 궁둥이를 활로 쏘자 산신이 노하여 손에 잡히는 대로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진 것이 날아와 산방산이 되고 뽑힌 자리가 백록담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여신 산방덕과 고승(高升)이란 부부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곳의 주관(州官)으로 있던 자가 산방덕의 미모를 탐내어 남편 고승에게 누명을 씌우고 야욕을 채우려 하다가 이를 알아차린 산방덕이 속세에 온 것을 한탄하면서 산방굴로 들어가 바윗돌로 변해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높이 200m의 남서쪽 기슭에 있는 산방굴은 해식동굴로 부처를 모시고 있어 산방굴사라고도 하는데, 길이 10m, 너비 5m, 높이 5m 정도이다. 고려시대의 고승 혜일(蕙日)이 수도했다고 하며, 귀양왔던 추사 김정희가 즐겨 찾던 곳이다. 굴 내부 천장 암벽에서 떨어지는 물은 이 산을 지키는 여신 산방덕이 흘리는 사랑의 눈물이라 하며, 마시면 장수한다는 속설에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산의 남쪽에는 화산회층이 풍화된 독특한 경관의 용머리해안이 있으며, 이곳에 하멜 표류기념탑이 건립되어 있다. 산정에서 바라보는 남해의 마라도·형제도·화순항의 경관이 뛰어나며 이는 제주10경의 하나이다. 정상으로 오르는 4곳의 등산로가 있으나, 주로 북쪽 사면을 이용한다.

 




산방굴사에 올라가는 계단이 힘겹다. 아내가 매우 힘들어 한다.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시원찮은 데다가 며칠 동안 강행군을 했기 때문이다. 산방굴사는 처음 가지만 가서 보면 반드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억지로 가면 고행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유 있게 올라가면 수행이 된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산방굴사는 거대한 굴 안에 석불을 모셨다. 아내만 부처님께 올라가 촛불을 켜고 삼배를 올리고 내려왔다. 나는 올라가지 않으려 했는데 아내가 초를 사주면서 아들 며느리와 손자 손녀의 이름을 쓰고 건강 발원을 하라 한다. 맞아.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촛불을 켜고 삼배를 올렸다.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오는 길에 약수를 한 구기 떠서 마셨다. 물은 수조에 가득 괴어 있어서 어떻게 바위에서 물이 나오나 하고 두리번거리면서 물 나는 곳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가만히 보니 굴사 천정에서 한 방울씩 똑똑 떨어졌다. 한 방울씩 떨어져 모아 괴어있는 물을 한 바가지나 마셨다. 마치 약사여래가 내려주는 약수를 마시듯이 말이다. 촛불공양에 대한 부처님의 감응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발원은 금방 이루어진다. 내려오는 길이 더 힘들다. 계단이 수없이 많고 층이 높아 무릎이 아팠다.


산방산

보문사 대웅보전

보문사 약사여래

보문사에서 내려다 본 바다

산방굴사

내려오는 길이 더 힘들다

산방산과 산방사

 

5. 남원 큰엉해변명승지


440분이다. 남원 큰엉해변명승지에서 노을을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540분이 넘어서 큰엉해변명승지에 도착했다. 바다가 참 맑고 깨끗하다. 출렁이는 파도가 절벽에 부딪친다. 올레길을 따라 서쪽으로 걸었다. 길이 잘 다듬어져 있고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워서 낮에 한 두어 시간 걸으면 좋을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걸어 보자. 오늘은 일정이 빡빡하여 아내가 많이 힘들어했다. 동백꽃이 붉게 흐드러진 올레길을 30분쯤 걸으니 정말 서쪽으로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아름답고 장엄하다. 파도는 쉬지 않고 바닷가 절벽을 때리고 하얗게 부서진다. 제몸이 하얗게 포말로 부서질 줄 알면서도 쉬임없이 검은 용암을 때린다. 물안개가 하얗게 올라오는데 태양은 붉게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해가 서쪽 섬 사이로 꼴깍 넘어가자 주변이 금방 어둑어둑해진다. 빨리 차를 돌려 산간도로를 또 달려 보아야 한다. 어느새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큰엉해변명승지

올레길 동백

올레길에서

바다 풍경

낙조

낙조

낙조

낙조


이 부근에 동백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동백 명승지가 있다고 하는데 사방이 어두워지니 어쩔 수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다.서둘러 산간 도로를 달려 숙소로 돌아왔다. 피로가 몰려온다. 따뜻한 물에 몸을 씻는 동안 아내가 하얗게 밥을 지었다. 오늘의 보시가 밥까지 달다. 배우고 깨달은 것도 많다. 하루가 참 길고도 두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