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박주가리는 깔끔해

느림보 이방주 2017. 8. 31. 13:48


박주가리는 깔끔해


2017년 8월 31일

마로니에 시 공원에서

 

박주가리 열매는 가을이 되면 밭두렁이나 산기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작은 유주 같기도 하고 벌어지기 전의 으름 같기도 하다. 그래서 눈에 잘 뜨인다. 열매를 보아야 비로소 꽃은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해 한다. 꽃이 피었을 때는 유심히 보지 않기 때문에 꽃의 모양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새벽 산책길에서 박주가리 꽃을 발견했다. 마로니에 시 공원 울타리를 타고 소복소복 피었다. 지난해 가을 열매가 달렸을 때 덩굴과 잎을 보아 두었기 때문에 박주가리 꽃인 줄 바로 알았다.

박주가리는 꽃도 잎도 덩굴도 깔끔하다. 잎이 유난히 깔끔하다. 잎은 약간 길쭉한 하트 모양이다. 꽃대 하나에 희거나 분홍색 꽃 여러 송이가 소복하게 모여서 피어난다. 나는 하수오 덩굴을 보지 못했는데 사람들 말에 의하면 하수오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한다.

도톰하고 먹음직스러운 잎은 벌레가 갉아먹을 만도 한데 흠집하나 없다. 덩굴에서 잎을 떼어보면 상처 난 자리에서 하얀 진액이 나온다. 이 진액에 독성이 있다고 한다. 벌레들이 조금이라도 갉아먹었다가는 온몸이 마비되기도 한다니 얼마나 지독한지 짐작이 간다. 그래도 먹고 온몸이 마비되는 멍청한 벌레는 없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박주가리가 독으로 제 몸을 깨끗하게 간수하듯 벌레들에게도 독을 알아보는 지혜가 있다. 그래서 박주가리 잎은 만질만질하고 마비된 벌레도 없다.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윤이 난다.

나는 모기가 잘 물지 않는다. 여름에 모기가 많은 산골에 가도 옆에 아내가 있으면 모기는 착한 아내만 물고 나는 물지 않는다. 아내 뿐 아니라 누구라도 한 사람만 옆에 있으면 모기는 절대로 내 피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그렇게 흔하던 벼룩도 내게는 잘 대들지 않았다. 내게는 모기나 벼룩을 마비시키는 독이 있나 보다. 일설에 의하면 인정이 없는 사람의 피는 벼룩이나 모기 입맛에 쓰다고 한다. 굶주린 모기가 저녁 식사를 하려고 연한 살갗에 침을 박으려는 순간 몰인정한 손바닥으로 내려치면 그대로 모기의 가련한 삶이 끝나버리는 것이다. 벼룩은 내 피 맛이 쓰다는 것을 미리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모기도 내 성품이 잔인하고 인정머리 없고 매몰차다는 것을 미리 아는 지혜를 타고 났나 보다.

벌레들도 박주가리에 독이 있는 줄 알고 모기도 내 피를 맛보기 어렵다는 것을 미리 다 알고 있다. 내가 눅눅한 자리에는 벼룩이 있고 풀숲에는 모기가 있다는 것을 미리 다 알고, 기다리고 있다가 이놈들이 살갗에 침을 박기 전에 반사적으로 내려치는 매몰찬 품성을 지니고 있듯이 말이다. 사람이나 미물이나 다 생존의 지혜를 지니고 있다.

내게는 자랑거리가 남에게는 독이 된다. 내 독을 자랑하지 말자. 내가 남의 독을 미리 알고 있듯이 남들도 내 독을 먼저 알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다. 미사일이 있으면 사드가 있듯이 말이다.

박주가리의 예쁜 꽃이 나를 유혹한다. 아침에도 찬란한 독이 나를 유혹한다. 그러나 내게는 독에 속지 않는 지혜가 있다. 나는 예쁜 꽃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독에는 절대 속지 않는 독이 나를 지켜준다.

박주가리 깔끔한 잎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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