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무궁화가 피면

느림보 이방주 2017. 8. 6. 16:37

무궁화가 피면

 

201777일 

 미동산 수목원에서

 

    벌써 무궁화가 피었다. 활짝 핀 무궁화를 보면 '아니 벌써'라는 생각이 퍼뜩 든다. 마루 끝에 앉아 담장 아래 피어난 무궁화 꽃을 바라보시며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안채랑 사랑채를 이어 쌓은 토담 아래에 열두 살 내 키보다 큰 무궁화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연분홍 꽃이 한 송이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무궁화 꽃이 반가웠다. 할머니는 볼이 오목해지도록 곰방대를 빨아들이면서 '무궁화 꽃이 피었으니 인제 백일만 지나면 쌀밥 먹는다.'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잔바람에도 흔들리는 호밀 대처럼 연약한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여름엔 누구나 먹는 보리밥을 유난스럽게 싫어하던 철없는 손자였다.

미동산 수목원에서 무궁화 전시회를 한다. 정문에서부터 길 양쪽에 도내 각 시군에서 가꾸어 꽃을 피운 무궁화를 전시했다. 나무 화분에 심은 무궁화가 참 예쁘고 소담하게 꽃을 피웠다. 종류도 무궁무진하다. 홍단심은 홍단심대로 백단심은 백단심대로 깔끔하고 고고하다. 꽃잎도 수술도 하얀 배달계는 무명옷을 잘 손질해 입은 한국의 여인처럼 수수하다. 한 송이가 피었다 지면 옆에서 새로  한 송이가 피어난다. "무궁무궁 무궁화 피고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네.'하는 노랫말처럼…….

스마트폰에 무궁화꽃을 담으려니 할머니가 그립다. 백일만 있으면 쌀밥을 먹는다던 할머니는 지금은 이 세상에 안 보인다. 연약한 손자에게 간절하게 쌀밥을 먹이고 싶던 할머니도 나보다 오히려 보리밥이 더 싫으셨을 것이다. 할머니는 저 언덕에서 아직도 손가락을 꼽고 계실까.


할머니, 점심에 모밀국수를 먹었슈. 인저는 유, 쌀밥이 싫증나유. 옛날에는 밥이 읎서 할 수 읎이 먹었던 모밀국수를 먹었다니께유. 파전을 안주로 막걸리도 마셨슈. 그리운 할머니, 지금은 쌀밥도 괴깃국도 그립덜 않은 세상이 돼버렸단 말유. 모밀국수에 파전이 맛나고, 그렇게 싫던 보리밥을 쌀밥보다 비싸게 사먹는 요상한 세상이 되었단 말유. 보리밥에 열무김치를 얹어 고추장에 쓱쓱 비벼야 밥 먹는 것 같은 세상, 할머니는 잘 모르시쥬? 그런디 고런 요지경 같은 세상이 되어 버린걸유.  무궁화가 무궁무진 피고 지고 또 피듯이 참고 기다리며 손가락 꼽아온 덕인지 천지개벽을 했슈. 쌀밥에 괴깃국이 그립지 않은 세상, 무궁화 덕인개뷰. 아니, 참고 기다리는 걸 가르쳐 주신 할머니 덕인개뷰. 뻬속까장 아리고 저린 할머니 사랑 덕인걸 지도 다 알고 있다닝께유. 할머니도 몇 해만 더 사셨으면 쌀밥을 실컷 잡숴보는 건디, 내 할머니나 남의 할머니나 한국의 할머니들은 복도 참 지질이도 읎슈. 오천년동안  여윈 손자들 바라보며 애간장만 태우다 밥숟가락 놓으셨으니, 에구……. 


할머니는 여든 다섯이 되던 1968년 쌀이 귀한 음력 7월 초사흗날 아미타부처님을 외며 앉아서 돌아가셨다. 무궁화가 피지 않아도 쌀밥을 먹을 수 있는 정토로 찾아가셨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5년도 안 되어 이 나라는 여름에도 쌀밥 먹는 나라로 바뀌었다. 나라 경제가 나아진 덕도 있었지만, 양석만 먹어도 황감하던 논에서 오배출까지 생산되는 '통일벼'란 새 품종이 나왔기 때문이다. 손자들에게 그토록 쌀밥을 먹이고 싶던 할머니 음덕이라는 건 나이가 들어서야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도 쌀밥을 먹을 때마다 할머니를 생각하지는 못한다. 무궁화가 피어야 담배를 눌러 담으시며 넌지시 나를 건너다보시던 할머니가 떠오른다. 환갑이 넘은 나는 아직도 미몽이다.

미동산 수목원에 아름다운 무궁화가 피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다시 살아오신 것처럼 또 피어났다. 무궁화는 져도 바로 핀다.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이 땅에 할머니가 없어지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간절히 기다릴 것도 신기할 일도 아니지만 이제 100날만 지나면 햅쌀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