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란사 답사
▣ 답사일 : 2016년 8월 21일
▣ 위치 :충남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 북쪽 백마강변
▣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마곡사의 말사
▣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 98호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년(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년(인조 7)과 1797년(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 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泗沘城)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민족대백과사전-
고란사 극락보전
[답사기]
부소산성을 돌아보는 중에 반드시 들러보게 되는 사찰이 있으니 고란사이다. 고란사는 부소산에 갈 때마다 들러오지만 그 때마다 새롭다. 고란사는 낙화암에 있는 백화정에서 돌아 오른쪽으로 돌계단을 밟고 10여분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길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백화정에서 백마강만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가버린다. 그러나 백마강을 좋아한다면 조금만 더 내려가면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돌계단을 조심스럽게 밟고 내려가니 1500년을 버틴 사찰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고란사는 그 연혁이 분명하지 않다고 한다. 백제 때 왕들이 기도하던 내불전이었다고도 하고, 백제 멸망 이후에 왕과 대신들의 놀이터였던 것을 삼천궁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었다고도 한다. 대부분 신라 사찰이나 백제 사찰의 경우 원효대사, 의상대사 등의 고명한 스님들의 창건기나 연기설화가 존재하는데 고란사는 그 설화가 분분하다.군에서 발행한 안내서에는 고려시대에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었다고 되어 있다. 다 믿어지지 않는다. 백제시대 왕들의 내불전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 고란사 연혁이 제대로 전하지 않는 현실만 봐도 땅에 묻힌 백제의 역사가 안쓰럽다. 웅진에서 64년 그 이후 멸망시까지 사비시대(538~660) 122년의 왕궁터조차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니 말이다.
절이 앉은 자리는 그리 넓지 않지만 앞에 바로 백마강이 있어 답답하지 않았다. 절 아래 바로 백마강 유람선 승선장이 있어서 오는 손님을 맞기는 편하겠지만 스님은 세속의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며 염불을 외야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유람선 안내 방송이나 음악소리가 더 그럴 것 같았다. 하기야 날마다 들으며 그것을 수행의 소리로 삼으면 어지러울 까닭도 없을 것이다.
고란사 당우는 단순하다. 본전으로 극락보전이 있고, 영종각이 있다. 뒤편으로 삼성각이 바위위에 간신히 몸을 의지하고 붙어 있었다. 극락보전은 정면이 5칸 측면이 4칸으로 주변의 공간에 비해 비교적 큰 편이었다. 겹처마로 팔작지붕이다. 단청과 벽에 불화가 아름답다. 부처님이 진리를 찾아 떠나는 것을 소를 찾아 가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종각은 대부분의 사찰이 범종각이라 이름 짓는데 영종각이라 이름 지었다. 종소리를 들으면 영혼의 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인지 영혼을 울리는 소리인지 모를 일이다. 삼천궁녀의 죽음이 사실이라면 백마강에 잠긴 한스런 영혼들이 위로받을 수 있었으면 좋겟다.
고란사는 조용하다. 본전인 극락보전은 열려 있으나 스님은 자리를 비웠다. 스님은 한 분이었는지 두 분이었는지 알길이 없다. 마당가에 기념품 가게 아주머니는 절을 찾아온 관광객을 상대로 흐트러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내는 마당을 건너 오른쪽 계단으로 바로 극락보전으로 향했다. 나도 아내를 따라 극락보전에 들어갔다. 당연히 극락보전일 것이다. 백제의 유민이나 왕이나 유신의 넋을 위로해야 하니까 말이다. 백제 유민들의 한이 얼마나 크면 백제 지역의 고찰들은 대부분이 극락보전일까. 본존부처님인 아미타여래(목조아미타여래좌상,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418호)는 미소가 없다. 아미타부처님 오른쪽에 대세지 보살은 오른손을 가슴가지 올리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놓았다. 아미타부처님 왼쪽에는 흰색의 관음보살이 앉았다. 관음보살이라고 되어 있다. 양식이 약간 다르다. 두 손 모두 무릎 위에 올려 놓았고 왼손에 병을 들었다. 중생을 위한 약을 담은 그릇인가? 주변에 수많은 나한상이 있다. 아마도 극락왕생을 위하는 신도들의 기원이 담기었을 것이다.
촛불이 꺼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스님은 멀리 가지는 않은 것 같다. 삼배를 올렸다. 삼배를 올리면서 어떤 생각이었을까? 이번만은 정말 가족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성왕이나 의자왕의 한을 생각했다. 언젠가 백제의 역사가 고물고물 땅에서 솟아 올라서 이 하늘 아래 퍼져 나가길 기대했다.
영종각을 돌아 고란정으로 갔다. 바위 석벽 저 아래에 아득하게 물이 괴어 있다. 물은 마시기만 하고 담아가지는 말라고 적혀 있다. 그래 물은 담아가서는 안된다. 자루가 기다란 구기를 들어 물을 길어 올렸다. 키가 작거나 어린이들은 물을 뜨다가 사고가 날 우려도 있었다. 물을 한모금 마셨다. 시원하다. 그러나 속까지 후련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내도 따라 마셨다. 물을 담아가지 말라는 말을 어기고 배낭에 있는 500mm 물병에 담았다. 병에 물이 떨어지고 얼음 덩어리만 있었기에 부처님의 은혜를 담아가듯 담았다. 그러나 큰 욕심은 내지 않았다.
아내도 삼성각에는 가지 않았다. 극락보전 벽에 그려진 불화를 보다가 아쉼움을 남긴 채 마당으로 내려왔다. 스님이 계셔서 다만 한 5분이라도 사찰과 부소산성과의 관계를 이야기로 듣고 싶었다. 스님은 자리를 지키며 신도나 탐방객에게 말씀을 주셔야 한다. 스님은 부처님의 제자이고 사제이고 대중의 스승이기에 대중을 부처님께 인도하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스님은 부처님과 대중을 이어주는 나무(신단수 world tree) 가 되어야 한다. 스님은 대중의 영혼에 영양을 주는 영양사가 되어야 하고 대중의 영혼을 맑게 헹구어주는 세탁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스님은 말씀(법문)을 거부하거나 피해서는 안된다.
힘겨운 돌계단을 올라 부소산문을 나왔다.
목조 아미타여래좌상과 대세지보살
영종각
극락보전 벽에 그린 불화
고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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