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신앙도량 성흥산 대조사 답사
▣ 위치 :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성흥로197번길 112
▣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
▣ 창건 시기 : 백제 성왕 5년 (527년), 고려 원종 때 중창
▣ 답사일 : 2017년 4월 16일 일요일 (가림성 가는 길에)
▣ 창건 개요
대조사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부여읍지(扶餘邑誌)』에 의하면 이 절은 인도에 가서 범본(梵本) 율장(律藏)을 가지고 돌아와서 백제 불교의 방향을 달리한 겸익(謙益)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사적기를 참작하여 기록한 현판에 의하면 이 절은 527년담혜(曇慧)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창건주에 대한 설은 다소 다르지만 이들이 모두 6세기 초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이 절은 고려 원종 때 진전장로(陳田長老)가 중창하였고, 그 뒤 1989년에는 명부전, 1993년에는 종각, 1994년에는 미륵전을 각각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통보전과 용화보전·명부전·산신각·범종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대웅전 뒤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보물 제2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한 노승이 이 바위 밑에서 수도하다가 어느 날 한 마리의 큰 새가 바위 위에 앉는 것을 보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어느새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하여 있었으므로 이 절을 대조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절에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0호인 삼층석탑 1기가 있다. 이전에는 옥개석(屋蓋石)만 있었으나, 1975년 옥신(屋身)이 발견되어 복원하였다.
원통보전과 삼층석탑이 있는 대조사 전경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조성시기: 고려시대. 보물 제217호)
부여군 대조사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으로 보살상의 머리 위 부분과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고 이 보관은 이어지는 부분이 보수되었으며, 왼쪽 어깨 일부가 부서진 상태이다.
보살상은 약 10m의 크기이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에 관한 명문이나 문헌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조성 배경은 알 수 없다. 비록 석조보살상이 미륵보살이라고 명명되고 있지만, 그 근거는 미흡하다고 할 수 있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보물 제218호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형식적인 면에서 유사하다. 다만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전체적인 비례가 좋고, 하나의 돌을 다듬어 조각하였다는 점과 부드러운 모델링을 구사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통견 형식의 법의를 입고 있으며,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양손으로 금속제의 연꽃 가지를 잡고 있다. 약 5등신의 신체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아래쪽으로 내려가면서 폭이 넓어져 안정감을 준다. 머리 위에는 원통형의 보관과 그 위에 가로로 긴 장방형의 보개를 2중으로 올려놓았다. 아래쪽의 보개 밑면에는 빗물이 얼굴로 타고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가장자리 부분을 돌아가면서 얕게 파내었다. 네 모서리에는 장식을 매달기 위해 뚫은 구멍이 남아 있으며, 지금도 동령이 매달려 있다. 원통형 보관에는 특별한 문양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들 보관과 보개는 보살상과 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원래부터 이러한 형태를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보살상은 하관이 넓은 삼각형의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 부은 듯한 눈두덩, 살짝 굽은 콧등, 음각으로 새겨진 콧날, 긴 인중, 살짝 내민 입술, 얇고 섬세하게 조각된 귀를 가지고 있다. 상호는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이다. 또한 정갈하게 빗은 머리카락은 정면과 측면, 뒷면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양쪽 귀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양어깨 위를 덮고 있다. 목에는 한 줄의 음각으로만 표현된 삼도 있다. 한편, 보살상의 몸은 고려시대 전기에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한 석조 불상과 같이 대충 돌을 다듬은 다음,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각 진 어깨, 모호하게 처리된 양 손, 법의의 주름 표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보살상의 몸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그저 표현을 위한 표현에 그치고 있다. 특히 오른쪽 팔 뒤로 넘어 온 법의 자락은 마치 칼로 도려낸 듯 딱딱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나마 목 뒤를 감고 있는 옷깃의 입체적인 처리와 가슴걸이 영락 장식의 섬세한 표현이 약간의 사실감을 부여해 준다.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방형의 보개와 원통형 보관, 5등신에 가까운 신체 비례, 부리부리한 눈, 넓은 하관 등을 통하여 볼 때,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모델로 하여 고려시대 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길쭉한 삼각형에 가까운 조형, 면류관과 유사한 방형 보개, 원통형 보관 등 고려시대 전기에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석조 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고려시대 전기에 유행했던 지방적인 특징을 지닌 대표적인 불사의 예이다. 보살상에 보이는 형식과 양식은 충청도 지방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던 것으로서 고려시대 전기의 불상 연구에 있어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대조사석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5호)
대조사 원통보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일부만 남아있던 것을 1975년에 다른 일부를 찾아 다시 세운 것이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인데, 탑신의 2·3층 몸돌과 꼭대기의 머리 장식은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기단은 각 층마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에 받침을 두었는데, 1·2층은 3단, 3층은 2단으로 새겨 불규칙한 모습이다. 지붕돌의 처마는 가운데에서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 이르러 가볍게 위로 들려있다.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비율이 비교적 낮아 안정감을 주고 있는 탑으로,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부여 대조사 목조보살좌상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5호)
대조사(大鳥寺) 원통보전에 봉안된 목조보살좌상이다. 불상 높이 82.5㎝, 무릎 너비 55.5㎝.. 대조사 목조보살좌상은 고개를 앞으로 숙인 자세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으며, 무릎이 높고 넓어 안정적인 비례를 보인다. 얼굴은 사각에 가까운 방형이며, 꽃·구름·화염보주로 장식된 화려한 보관과 그 옆으로 휘날리는 곡선적인 관대, 그리고 간결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옷주름 등이 특징이다. 방형의 넓적한 얼굴에 기다란 눈, 오뚝한 콧날,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긴 입술을 표현하여 근엄하고도 자비로운 인상을 준다.
착의법은 편삼과 대의를 입은 변형통견식이며 밋밋한 가슴 위로 수평의 승각기가 보인다. 옷주름이 간결하면서도 예리하고 깊이감이 있어 강한 힘이 느껴지며 오른쪽 발목에서 반전되어 직선으로 늘어뜨린 옷주름이나 왼쪽 무릎에 넓게 지그재그식으로 맞주름이 잡힌 옷자락 등은 이 불상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수인은 중품하생인을 취하였다.
안정감 있는 비례에 넓적한 방형의 얼굴, 그리고 화려한 보관과 수평으로 휘날리는 관대의 표현과 양감 있는 옷주름 등이 특징이며 이는 혜희(慧熙, 惠熙)가 조성한 1655년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 1662년 순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660호)과 유사하다. 그러나 혜희가 조성한 불상들의 결가부좌한 다리 앞의 가운데 옷주름은 곡선적인데 반해 대조사 불상은 직선적으로 처리하여 차이점도 발견된다. 따라서 대조사 목조보살좌상은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혜희 또는 혜희에게 영향을 받은 조각승에 의해 17세기 중반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나 안정적인 신체 비례, 방형의 얼굴에 변형통견식 착의법 등 조선 후기 17세기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인다. 여기에 얼굴의 세부 표현이나 옷주름, 보관의 표현 등에서 17세기 중엽경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한 조각승 혜희의 특징과 조형성이 발견된다. 이 목조보살좌상은 보존 상태가 좋고 조형성이 뛰어나 17세기 불상이나 혜희 유파 연구에 있어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미륵 신앙
미륵신앙이란 지난날 석가모니불이 그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미륵에게 장차 성불하여 제1인자가 될 것이라고 수기(授記)한 것을 근거로 삼고, 이를 부연하여 편찬한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을 토대로 하여 발생한 신앙이다.
이 삼부경은 각각 상생(上生)과 하생(下生)과 성불(成佛)에 관한 세 가지 사실을 다루고 있다.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고 노력하면, 이 세상을 떠날 때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날 뿐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염부제(閻浮提:사바세계)로 내려와 제일 먼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미륵신앙의 중심은 미륵(Maitreya)이다. 원래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mitra)로부터 파생된 마이트레야는 자비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한자문화권에서는 미륵보살을 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불러 왔다. 관세음보살을 대비보살(大悲菩薩)이라 부르는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미래불 미륵은 석가모니불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사상을 근거로 출현하여, 자씨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미륵하생경≫과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에 의하면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갔고, 지금은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하여 56억7000만 년이 지난 뒤, 인간의 수명이 차차 늘어 8만 세가 될 때 이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나 화림원(華林園)의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며, 3회의 설법[龍華三會]으로 272억 인을 교화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솔천의 미륵보살이 다시 태어날 때까지 중생구제를 위한 자비심을 품고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하는 자세가 곧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미륵보살을 믿고 받드는 사람이 오랜 세월을 기다릴 수 없을 때는 현재 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자[上生], 또는 보살이 보다 빨리 지상에 강림하기를[下生] 염원하며 수행하는 신행법이 인도·중국·티베트·한국·일본 등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구원론적인 구세주의 현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이념으로, 지나치게 이론적인 종교라고 비판을 받고 있는 불교가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신앙형태가 곧 미륵신앙이다. 미래세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념이 표출된 희망의 신앙이라는 면에서 우리의 불교사 속에서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근현대의 미륵신앙
불교계에서 분파된 신흥종교 중 전통적인 불교의 미륵신앙을 그들의 교리 속에 절충하여 가진 경우가 있다. 주로 증산교(甑山敎) 계통과 용화교(龍華敎)가 그 대표적 예이다. 증산은 평소 제자들에게 금산사의 미륵불로 강림할 것이라고 말해 왔다고 한다. 또는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 불양탑(佛養塔)이나 차지하리라.”,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들어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증산은 금산사와 미륵불에 대하여 관심을 표하였으며, 이로부터 증산의 제자들은 금산사를 차지하여 후천세계(後天世界)를 주재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의도는 순수한 불교의 미륵신앙이라기보다 증산의 가르침에 의한 미륵불의 출세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증산의 제자 김형렬(金亨烈)은 한때 금산사에 미륵불교라는 한 교파를 세우고 금산사의 미륵불을 증산의 영체(靈體)로 신봉하기도 하였다.
김형렬의 뒤를 이어 유제봉(柳濟鳳)·최선호(崔善湖) 등이 미륵계(彌勒稧)를 조직하고 금산사의 미륵불을 신앙하는 활동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서백일(徐白一)이 세운 용화교는 금산사를 본거지로 삼아 한때 그 교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1966년 교주 서백일이 피살된 뒤 그 교세는 쇠퇴했지만, 금산사 주변의 용화동(龍華洞)을 중심으로 용화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1950년대에는 강성태(姜聖泰)를 중심으로 미륵존불숭배회(彌勒尊佛崇拜會)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금산사 미륵전을 중심으로 찾아들었던 대부분의 미륵 신자들은 증산교 계통의 신흥종교 신도들이었다. 이들의 미륵신앙은 불교의 전통적인 미륵신앙과는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으므로, 전통적인 미륵신앙을 전개하기 위해서 이종익(李鍾益)은 불교십선운동본부(佛敎十善運動本部)를, 송월주(宋月珠)는 미륵정신회(彌勒正信會)를 각각 조직하기도 하였다
답사기
대조사 답사는 처음이 아니다. 얼마 전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 연선생 내외와 우리 내외가 함께 왔었다. 이번에 다시 찾아와 미륵보살을 다시 한번 보게 된 것은 행운이다. 당시에는 이 산 위에 이렇게 훌륭한 산성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대조사는 조계종 제 6교구 마곡사의 말사이다. 마곡사의 말사라는 것보다 내게 다른 의미를 주는 것은 백제부흥군의 발자취가 있는 산성의 아래에 있는 사찰은 대개가 큰법당이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극락전이다. 그런데 대조사는 원통보전이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것이다. 원통보전 뒤에는 큰 바위가 있고 바위 옆에 석조 미륵보살입상이 있다. 그래서 나는 대조사를 미륵 신앙도량이라고 이름하고 싶었다.
가림성으로 올라가는 중에 오른쪽으로 대조사 입구가 있다.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지고 그 사이로 벚나무가 이제 막 낙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갈림길에서 대조사쪽으로 들어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다. 장송이 하늘을 가려 그윽하다는 느낌이 든다. 미래에 사람들이 꿈꾸는 세상은 바로 이런 세계인가? 큰 길이 주차장으로 더 내려가는 길과 절 마당으로 들어가는 갈림길 쯤에서 바라보면 가람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당은 풀 한 포기 없이 깨끗하다. 이 절 스님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마당이 말해 준다.
원통보전과 佛乳井 사이에 커다란 벚나무가 꽃이 지기 시작하면서 보랏빛 애 잎이 나고 있었다. 벚나무는 꽃이 지고 잎이 나기 시작할 때 다시 한번 꽃을 보는 기분이다. 그래서 벚나무는 눈처럼 하얀 꽃과 보랏빛 새잎과 가을의 줅은 단풍까지 세번 꽃을 피운다. 벚나무 보랏빛 가지가 원통보전 부연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원통보전 단청은 언제 새로 했는지 깨끗하고 아름답다. 법당 뜰에 커다란 개 한마리가 배를 깔고 누웠다. 눈을 지그시 감고 깊은 사유에 빠졌다. 원통보전 앞에 삼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은 기단이 2층이라 언뜻 5층탑이 아닌가 싶다. 석탑 주변은 깨끗하게 청소는 되어 있으나 무너진 철책이 그냥 방치되어 있다. 석탑 주변을 철책으로 보호하는 것도 보기 안 좋은데 무너진 것을 방치했다. 범종각은 새로 조성했는지 깨끗하다.
요사채 마루에 신도 두 분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법당에 들어가려니 개가 지키고 있어 내키지 않아 그만 두었다.
대조사 입구
원통보전과 삼층석탑
삼층석탑과 원통보전
단청이 깨끗한 법당 앞에 누렁이
삼층석탑 앞에서 그냥 삼배만 드렸다. 이렇게 맨입으로 삼배만 드릴 때 민망하다. 요사채와 원통보전 사이를 지나 미륵보살입상 앞으로 올라갔다. 미륵보살전에 가기 전에 미륵보전이 있다. 미륵보전 앞을 지나 왼쪽으로 올라가면 거대한 미륵보살 입상이 나온다. 사람들이 몇 분 들렀다 내려간다. 어느 착한 아드님 내외가 어머님을 모시고 와서 미륵보살님께 예를 표하고 있었다. 미륵보살은 보수중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보수하려는지 보기 흉한 철제 버팀목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조사 미륵보살입상이 특이한 것은 절집이 모두 동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혼자서 동북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자리에 바위가 있어서 바위 모양대로 조성한 것인지 어떤 의미가 있어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먼 미래가 북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륵보살입상은 주변과 잘 어울린다. 옆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리고 낙락장송이 머리 위에 가리고 있다 . 다만 생각에 바위가 미륵보살님 뒤에 있고 소나무도 그렇게 있었으면 어떨까 싶었다. 여기서 삼배를 올렸다. 먼 미래에 와서 중생을 제도한다는데 조금 더 일찍 오셔서 시끄러운 세상을 구제해 주셨으면 좋겠다.
미륵보전은 안에 미륵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그 대신 뒷벽을 모두 투명한 유리로 대신하여 안에서 미륵보살입상이 보이도록 했다. 미륵보전의 주불은 바로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미륵보전
오늘 답사는 대조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림성에 있어선지 이미 마음은 가림성에 가 있다. 마당을 건너 부지런히 발걸음을 옯기는데 원통보전 옆에 佛乳井이 있다. 부처님의 젖과 같은 샘물이라는 의미이다. 이 사찰에 물이 귀해 고생했는데 최근에 홍성성당의 장끄렝깡 신부님이 물줄기를 찾아 주어서 샘을 파고 물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부처님께 올리는 감로수를 신부님이 찾아 주었다니 참 기이한 인연이다. 또 신부님이 찾아준 샘물을 굳이 불유정이라 이름한 것도 특이하다. 그 분이 미래의 부처님은 아닐까 하고 혼자 헛생각을 해보았다.
미륵신앙의 도량이라고 할 수 있는 대조사를 들러 나오며 이상하게 자꾸 최근에 탄핵당한 박근혜 전대통령이 생각난다. 인터넷에 진짜뉴스인지 가짜뉴스인지 요즘 단식중이라고 한다. 벌써 한 열흘 째 단식중이라는데 국내 뉴스에는 어느 언론사에서도 발표하지 않았다. 일본의 한 신문이 발표했다고 인터넷에 떠도는데 일본놈들 말을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다. 이쯤해서 그 분이 단식할 성격은 아니라고 본다. 아마도 가ㅉㅈ자 뉴스일 것이다. 아무튼 측은하기 이를데 없다.
그는 미륵신앙을 믿었던 것 같다. 최필립인지 최태민인지를 미륵으로 알고 믿었던 것 같다. 스물 몇 살 그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비명에 잃고 아버지 마저 또 그렇게 잃어버리고 그런 엄청난 충격 속에서 허망함을 의지할 곳이 없을 때 최태민이라는 미륵에 더 크게 의지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어린 나이의 트라우마가 어른이 되어서도 지속된 것은 아닐까? 나랑 임진생 동갑네이지만 어찌 나만큼 세상 여러가지 물을 마셔 보았을까?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제주 삼다수만 마셨다고 한다. 그래서 해외에 나갈 때도 삼다수를 가져 갔다고 하니 한심한 노릇이다. 금강물도 마셔보고, 태백산 골짜기 물도 마셔보고 빗물도 받아 먹어보고 바위틈에 졸졸 흐르는 물도 마셔 보고, 눈내린 태백산을 등산하다가 눈을 녹여 라면을 끓여먹어보기도 했어야 어느 하나의 미륵에 현혹되지 않았을 것이다. 책을 한 권도 안 읽은 사람보다 더 위험한 사람은 책을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 위험한 사람은 사이비 종교 하나만 맹신하는 사람이다.
미륵신앙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미륵보살로 하여금 아주 먼 후세대에 새로운 세상을 제도하도록 가르침을 준 것인데 혹세무민하는 많은 사기꾼들이 이용해 왔다. 궁예는 자기 스스로 미륵이라 하며 독재를 했다. 오늘날 독재자들이 마치 자신이 미륵이라도 된듯이 혹세무민하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나는 증산 같은 것도 이런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최태민이라는 사기꾼을 아직도 미륵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최근까지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의 '새누리'라는 것이 미륵부처님이 도래한 새로운 세상이 아니겠는가? 그는 최태민의 미륵세계를 건설하려는 허황된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용화세계의 '龍'은 우리 말로 '미르'이다. 그들이 만든 '미르재단'이란 이름도 심상치 않다. 그런 점을 분석해 보았으면 좋겠다.
신앙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존재이다. 그러나 교리 공부를 하지 않고 무조건 믿으면 최태민 같은 헛된 미륵에 현혹되고 만다. 인간의 고통스런 삶을 구제하고자 하는 종교가 혹세무민이 되고 만다. 교리 공부를 하면서 신앙을 가져야 한다. 미륵신앙도 교리를 제대로 알아야 미끼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요즘 대통령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중에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다 적폐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또 그 사람만이 최선이라고 무조건 믿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를 보면 이 시대의 '궁예'를 보는 것 같다. 비판없이 무조건 따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적폐다. 참 답답하고 위험하다.
대조사를 나오며 미륵신앙과 잘못된 미륵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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