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한국의 사찰

우암산 관음사 답사

느림보 이방주 2016. 5. 20. 11:20

우암산 관음사 답사


관음사 사적기

 

관음사의 창건과 역사를 알아봅니다.

천년의 향기 관음사는 후기신라 말 원룡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일설) 우암산(牛岩山) 관음사(觀音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5교구 본사 법주사 말사로서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관음사는 도심지에 인접한 산지가람이면서 사명(寺名)에서 알 수 있듯 관음신앙(觀音信仰)의 근본 도량이다. 관음사는 청주의 진산(鎭山)격인 우암산 서남쪽 제삼봉(第三峰)아래 있으며 흥덕사지 뒷산을 안산(案山)으로 하고 무심천 물줄기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

    이 절은 후기신라 말 창건되어 고려 시대 서원(西原)지방의 불교를 꽃피우던 계향사(桂香寺)란 절로서 역사적으로 법향(法香)이 짙었던 도량이다. 계향사는 조선중기까지 향등(香燈)을 이어오다 조선 중기에 폐사(廢寺)되었다가 1943(712) 인봉스님께서 옛 석등(石燈)을 찾아 향과 불을 밝히니 사명을 관음사로 고치고 끊어졌던 향운이 다시 타오르니 인봉스님을 중건주로 추앙하고 그 부도를 절 초입에 세워 그 공을 기리고 있다. 1983년 월암(月庵) 이두(二斗)스님께서 주지로 오시면서 퇴락한 법당, 요사를 헐고 화려했던 고려양식의 40평 목조 극락보전을 건립하고 천불전, 요사인 계월사, 삼성각 등 중창불사를 거듭하여 도량의 면모가 새로워졌다. 유물로는 철확(鐵鑊)무쇠솥이 있고, 고려시대의 향로, 발우, 찻잔과 여러 형태의 기와(각 시대별) 연화문 수막새 (후기신라 시대) 계향사라고 명문이 있는 기와가 발견되어 사중에 보관중이다. 1976년 서원학회 발굴조사단에서 더 많은 청자파편과 기와편을 발굴하였다. 이로서 관음사는 옛 계향사의 면모를 복원하고 수행과 포교의 중심사찰로 거듭나게 되었다.

    관음사는 현재 신도회를 비롯하여 10여개 정도의 신행단체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 선도와 어린이 포교에 앞장서고 있으며 불교문화대학을 운영하여 불교문화를 알리고 선도하고 있다. 그리고 관음사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과 도심야경은 발아래 은하수를 보는 것처럼 청주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라 할 수 있다.

 

천불보전

천불전에는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위시한 누지불까지 협겁천불을 모신다. 부처님이란 진리를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따라서 삼신불, 삼세불, 천불, 삼천불과 같은 다불(多佛)사상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 조성된 것이 사찰의 천불전 혹은 불조전이다.

천불전에는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을 위시하여 누지불까지 협겁천불을 모시며, 과거 장업겁천불, 현재 현겁천불, 미래 성수겁천불의 삼천불을 모신 사찰도 있다.

 

극락보전

중생들을 왕생극락으로 인도하시는 아미타부처님과 그 협시보살들을 모시었다. 극락전 혹은 극락보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시는 아미타부처님과 그 협시보살들을 모시 법당이다. 사찰에 따라서 미타전, 아미타전, 무량수전, 수광전이라고도 하는데, 일부사찰의 경우에는 극락전이 사찰의 주된 전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극락보전의 부처님

극락보전에는 아미타부처님과 그분의 협시보살로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혹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진다. 일찍이 아미타부처님이 법장비구로 수행하던 시절에 그 유명한 48대원을 세워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서방의 극락정토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그때 세웠던 서원에 따라 누구나 일념으로 '아미타불'이란 명호만을 불러도 극락에 왕생시켜 괴로움을 물리치고 불도에 정진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대자대비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아미타불신앙은 예로부터 사후신왕과 관련하여 서민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아 왔다. 따라서 전국의 사찰에는 아미타부처님이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많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부처님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거나 미타정인(九品印)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수인을 하고 계신다.

-관음사 홈페이지에서


가깝지만 자주 가지 못하는 관음사에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어젯밤 태풍에 가까운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시끄럽게 불어댄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바람을 어찌 피할 수 있으랴. 부는 대로 맞으며 견뎌내는 것이 바로 지혜이다. 관음사를 가는데 차를 타고 청주대학교 앞에서 내려 대학 캠퍼스를 지나 후문으로 나가는 방법도 있지만 걸어서 가기로 했다. 여기서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캠퍼스로 간 다음 예술대에서 우암산 순회도로를 통하여 아주 여유만만하게 걸으면 된다. 바람아 불어라. 한번 견디어 보리라.

카메라 가방에 물을 한 병 넣고 예술대를 향하여 걸었다. 바람이 불어 오히려 시원했다. 그러나 볕은 따갑다. 바람막이를 벗어 가방에 넣었다. 서두를 것도 없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예술대에서 우암산 우회도로가는 길이 조금 가파르지만 그정도가 문제 되지는 않는다. 우회도로에서 인도가 있어서 가끔 지나 다니는 차들도 전혀 관계가 없다. 인문대 후문에 이르면 바로 관음사 진입로와 마주친다. 인문대는 80년대 초 초등학교에서 주경晝耕을 마치고, 밤에는 이곳에 와서 야독夜讀을 하며 학문의 꿈에 부풀어 있던 곳이다. 그날이 새삼스럽게 그립기도 하다. 여기까지 차를 가지고 와서 주차하고 올라 가도 되기는 된다.


일주문 대신에 큰 바위에 대한불교 조계종 관음사 표지가 크게 새겨 있다. 더 오래된 절인 우리 보살사는 이런 표지석도 없다. 만들면 되는데 말이다. 진입로에는 차를 타고 올라가는 신도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도로 위에 주차 시설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 오르자 주차장이 있다. 몇 대밖에 주차를 시킬 수 없다. 그러니 절이란 걸어다녀야 하는 곳이다. 부처님 앞에서나 "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할 것이 아니라 걷는 것이 곧 수행이고 염불이라 생각한다. 땀이 흐르는 것이 바로 세파를 씻어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천불보전 앞에 도착했다. 천불보전은 웅장하다. 마당 가득히 화려한 연등이 매달려 있다. 절의 움직임을 알 수 있다. 보살 몇 분이 천불보전 안으로 들어간다. 스님은 보이지 않는다. 극락보전에서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 천불보전을 뒤로 하고 극락보전으로 올라 갔다. 올라가는 계단에 포대화상이 크게 웃고 있다. 저 양반은 언제 봐도 사람 좋은 웃음이다. 그냥 동네 아저씨를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이 복을 받으려 배를 쓰다듬어서 배에서 수택이 난다. 그것도 수행이다.


극락보전에 들어가니 스님 혼자서 독경을 하고 계시다. 문에 들어가기 전에 불전을 찾느라 지갑을 꺼내보니 1000원짜리도 5000원짜리도 없다. "아, 이런"  작은 동전지갑에 분명 5000원짜리가 있었다. 열어보니 없다. 할 수 없이 아깝지만 10000원 짜리를 주머니에 넣고 들어 갔는데 스님이 계시다. 꼭 그분이 내 치졸한 행동을 지켜본 것 같아 뜨끔했다. 아니 스님이 보지 못했더라도 10000원짜리를 불전함에 넣으며 약간은 떨고 있었을 내 모습을 부처님이 다 보았을 것이다. 짚이는 대로 불전을 놓지 못하고 이리 저리 작은 것을 찾은 내가 잠시 부끄웠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 이해하실 것이다. 그래서 불쌍한 중생이 아닌가? 돈이란 돌고 돈다고 돈이다. 어쩔수 없이 도는 것이 돈의 본질이다. 불전으로 넣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어딘가를 향하여  돌아갔을 것이다. 나올 때는 절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건 언제라도 내 손을 떠날 돈이었으니까 말이다.



관음사 들머리

주차장에서 바라본 천불보전

천불보전 앞에서 극락보전 가는 계단 가운데 포대화상이 있다.

삼층석탑과 극락보전이 화려하다


마애불


마애불은 자연적인 바위벽에 부조한 것이 아니라 돌을 다듬어 세운 것이다. 자연의 큰 바위벽에 부처님을 그리고 신앙심을 불어넣어 만든 마애불이 아니라서 섭섭하기는 했다. 그러나 불상이란 다 허상인 것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 모시고 사는 부처님이 참 부처이다. 불상이란 그래서 불상이라 하지 않는가? 마음 속에 모신 부처님을 상으로 형상화하여 모신 것이 불상이다. 어디어 무엇으로 만들었다하여 더 나은 불상 더 못한 불상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마음에 모신 부처님이 참 부처님이다.

이 절이 매우 오래된 절이기는 하나 오래된 절이 그대로 남은 것이 아니라 최근에 시조를 쓰시는 이두스님이 주지로 오시면서 옛부터 전해오던 계향사를 재건하다시피 한 절이다. 이두스님은 지금 관음사 소속이면서도 관음사에 계시지 않고 요양 중이시라고 들었다. 이두 스님은 내가 내륙문학회 회장일 때 가끔 모임에 나오시던  문학 동인이시다. 시조를 쓰시는 시조시인인데 나오셔도 별 말씀이 없이 빙긋빙긋 웃으시다가 속세의 음식을 몇 술 뜨고는 말없이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시를 쓰셨다. 그런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렇게 조용하시던 스님시인께서 관음사 부흥을 위해 큰 일을 하셨다니 참 부처님의 원력의 크기는 가늠할 수가 없는 일이다.


관음사는 신도가 많고 각종 신도회 모임 잘 된다고 들었다. 몇 해전 찬불가 작곡 발표회도 열었는데 주지 스님이 직접 찬불가를 작사한 것도 많아서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 작곡발표회에 친구 내외분이 출연하는 바람에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임이 잘되는 관음사가 부러웠다. 침체된 보살사에 비해서 말이다. 올라와서 직접 보니 조금 비좁고 갑갑한 면은 있으나 생명력 넘치는 모습에 흐뭇했다.


돌아오는 길에 보현사에 들렀다. 태고종이라 조금 분위기는 달랐다. 대웅전에 들르지 않고 그냥 내려왔다. 올라간 길을 되짚어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종교와 신앙과 나의 이념에 대하여 말이다. 뭔지 모르겠다. 대학 캠퍼스에 내려오니 학생들의 생기가 새롭다. 머리 긴 여대생들이 책을 끼고 걷는 모습, 반바지만 입은 남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달리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그런 젊음이 내게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러나 젊음을 재는 척도는 나이가 절대적은 아닐 것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변하는 시대에 어떻게 적응하는지, 새로운 책을 읽고 있는지, 자신을 위해서 새로운 일을 찾아 추구하고 있는지 같은 것도 젊음을 재는 척도가 될 것이다.

숙제 하나를 해결한 것 같아 후련하다.

(2016.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