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한국의 사찰

운주산 비암사 백제 영산대재 참관

느림보 이방주 2017. 4. 16. 21:12

제 1344차 운주산 비암사 백제 영상대재 참관


▣ 일시 : 2017년 4월 15일 오전 09시 30분 부터 오후 1시 20분

▣ 장소 : 세종시 전의면 운주산 비암사

▣ 주관 : 비암사

▣ 후원 : 세종특별자치시,  천안전씨 종친회, 비암사 대중 일동

▣ 식순 

  1부(세종시 비암사 백제 영산 대재) : 개회사, 괘불이운, 타종, 삼귀의, 찬불가와 찬탄곡, 권공과 축원, 우리말 반야심경, 시식과 범패, 사홍서원, 백제국왕대신 칠세부모 법계함령등중 및 백제부흥군들을 위한 위령 문화행사. 폐회사

  2부(세종시 백제대제) : 세종시백제대제 유래, 헌다, 추도사, 헌화 및 분향, 문화 공연

▣ 문화행사 내용 :회심곡, 8악기 연주 및 백제불교춤, 백제풍류 선무, 사물놀이

▣ 함께 간 사람 : 없음


◈ 비암사의 유래

비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확실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창건된 절이라고 전하고 있다. 신라 말에 道詵이 중창하였으며, 그 뒤의 뚜렷한 역사는 전하지 않고 있으나, 조선시대 후기에 편찬된 《全域誌》에 비암사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그 무렵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근대에 들어와 극락전  앞뜰에  있는 높이 3m의 고려시대 삼층석탑 정상 부분에서 사면군상이 발견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91년 대웅전을 지었으며, 1995년 극락보전을 중수하고 산신각과 요사 2동을 지었다. 1996년 범종각을 짓고 1997년 요사 1동을 지었다.

석상중 계유명전씨아미타삼존석상은 국보 제 106호, 기축명아미타여래제불보살석상과 미륵보살반가석상은 보물 367호와 368호로 지정되어 국림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극락보전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79호로 지정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이며, 전 내에 아미타불을 안치하였고, 불상 위의 닫집과 조각물들은 그 수법이 우수하다. 이밖에 사면군상이 발견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119호인 삼층석탑과 부도 3기가 있다.  (불비상은 국립청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인데 영산대재 안내문에는 이렇게 예전처럼 되어 있다)


◈ 출발

토요일이다. 어제 대구에서 수필의 날 행사가 있었는데 가지 않았다. 오늘 비암사영산대재를 참관하는 것이 훨씬 의미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아내와 함께 가고 싶었는데 아내는 보살사에 올라가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그러면 혼자 가는 수밖에 없다. 공연한 사람과 함께 가면 시간을 내 맘대로 하지 못할 수도 없다. 웬만한 사람들은 점심 먹으러 간 것처럼 점심 공양이 끝나면 면 그냥 가자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침 7시 40분에 출발했다. 공업단지 뒷길로 달려 서청주나들목을 지나 청주역에서 좌회전하여 충청대 앞에서 조치원행 도로와 만났다. 조치원에서 1번 국도를 잠시 타고 북으로 가다가 연서면 연화사 앞을 지나 고복저수지 옆 도로를 달렸다. 세종시 연서면 일대는 온누리가 모두 꽃동산이다. 도로는 벚꽃이 낙화되어 차가 지날 때마다 눈송이처럼 함께 따라 날리고, 도로 주변은 연분홍 복숭아꽃과 백설 같은 배꽃이 만발했다. 비암사 가는 길이 마치 극락으로 들어가는 길목처럼 아름다웠다. 특히 고복저수지가 끝나갈 무렵 고개를 넘을 때는 아직도 만발하여 남은 벚꽃이 꽃구름이 일어난 듯 뭉게뭉게 아름다웠다. 연서면 전체가 말 그대로 꽃의 축제를 이루고 있는 듯했다.

비암사에 가까이 가자 꽃은 끝나고 온산이 연두빛으로 덮여 봄이 치맛자락을 여미며 다가오는 것처럼 신비롭다. 8시 40분에 비암사 입구에 도착했다. 아직 교통 통제를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경찰관들이 나와서 차량 진입을 막고 주차장으로 안내하여 걸어 올라가야 했다. 일찍 오기를 잘했구나. 느티나무 아래 사찰 주차장에는 행사를 준비하는 차량 몇 대만 있었다. 준비하는 사람 이외에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이다.


◈ 준비

사찰은 고요하다. 비암산이 연둣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뜰에 벚꽃이 아직 남았다. 비암사의 상징인 느티나무 아래 계단을 밟았다. [아니오신 듯 다녀 가소서] 이 말이 내안에 진하게 파문을 일으킨다. 그것은 올 때마다 그렇다. 내 다섯 번째 수필집의 제목을 이렇게 예정하고 있는 것도 그 잔잔한 파문에서 연유한다. 오늘도 그렇다. 아니 오신 듯 다녀 가소서. 가까이는 비암사의 말이고 크게는 우주가 인간에게 주는 삶의 메시지이다.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아니 오신 듯 다녀가소서. 정말 그렇게 다녀 가리라.


절마당에 올라서자 극락보전 앞에 비암사의 보물 불비상을 머리에 이고 있던 삼층석탑이 고고하다. 탑 앞에 삼배를 드렸다. 탑 너머 극락보전 현판이 순진하다. 아미타여래가 성큼성큼 걸어나와 일필휘지로 써서 올린 것처럼 거침 없고 부끄러움도 없다.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이 주불이다. 650년경 삼한에 유행했던 정토신앙의 흔적이라고만 보기에는 너무 그 이유가 너무 처절하다. 내가 답사한 운주산에 있는 또 다른 사찰 고산사로부터 서천 건지산성 안에 있는 건지산 봉서사에 이르기까지 산성 아래에 있는 사찰들이 모두가 극락보전이 큰법당이다. 백제 부흥운동의 발길이 닿은 곳의 사찰은 모두가 정토신앙의 도량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만 정토신앙 유행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부흥군의 처절한 저항이나 유민들의 시달림을 짐작할 만하다. 지금도 아미타불을 자꾸 되뇌이면 정토에 귀의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백제 유민이 라도 된 듯 '나무아미타불'을 외며 극락보전 부처님 앞에 삼배를 올렸다.


비암사 극락보전 뒤편에는 대웅전이 있다. 이 대웅전 불사가 있은 것은 바로 몇해 전의 일이라고 한다. 극락보전 불단 아래에 굉장히 커다란 함이 있었는데 아무도 마치 금기처럼 열어보지 않다가 어떤 주지스님이 열어보니 괘불 탱화가 있었다. 그런데 탱화에 모셔진 부처님은 석가모니불이었다. 주지스님은 곧 대웅전 불사를 일으키고 탱화를 대웅전에 모셨다. 오늘 영산대재에는 석가모니불의 탱화가 야단에 모시고 법석을 열게 되어 있다.


절집으로 올라가는 찻길

걸어서 올라가는 계단 길 - 아니 오신듯 다녀가소서

극락보전


절집을 한 번 돌아보고 설선당 앞에서 기웃거리며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극락보전은 문이 닫혀 있고 대웅전은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스님들은 대웅전 앞에 모여 있고 주지 스님은 마당에서 다른 스님이나 신도들의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먼데서 왔는지 보살 한 분이 차를 극락보전 앞까지 끌고 왔다. 나는 눈쌀을 찌푸렸으나 영산재에 올릴 떡을 준비해 온 것 같았다. 트렁크를 열자 떡 상자가 하나 가득 나왔다. 여자 신도들의 발길이 바쁘게 움직인다. 탁자 위에 떡을 놓고 분류하고 제단으로 갈 것과 점심 공양에 쓰일 것으로 나누는 것 같았다. 남자들이 천막을 치느라 분주해서 나도 카메라를 목에 걸고 천막을 들고 도왔다.

형형색색의 주련들이 내 걸리고 제단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음식과 과일 꽃이 올라갔다. 아름답다. 사람들의 손놀림이 재고 단아하다. 범패를 맡은 여섯분의 스님은 오른쪽 천막에 앉아 연주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백제 8악기를 연주할 악사들이 오고 불교합창단이 자리를 잡자 마곡사 산하의 말사 주지스님들이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다. 세종시장이 늦게 도착하여 자리를 잡자 사회를 맡은 스님이 개회를 선언했다.


제단을 마련하는 중

재를 준비하는 신도들

대웅전 앞의 모습

제단이 준비되고

달마스님 닮은 석상은 늘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아름다운 마당패랭이에 둘러싸인 원광석 이 또한 부처님이 아닐까

범패를 연주할 스님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준비 끝-대웅전 모든 문이 열렸다.

범패를 연주할 원명스님와 여섯 스님들 입장


드디어 괘불이운의 순서라고 사회를 맡은 스님이 선언했다. 젊은 스님들이 대웅전에 모여들었다. 커다란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대웅전으로 달려간다. 내 카메라는 아주 작지만 나도 극락보전 앞을 지나 대웅전으로 갔다. 주지스님을 비롯한 스님들이 석가모니부처님 연좌 앞에 섰다. 염불이 시작되었다. 범패와 찬탄이 울려퍼진다. 원명스님의 염불소리는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린다.

여덟 분의 스님들이 연좌 아래 기다란 상자를 열고 괘불을 들어 모셨다. 이운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이런 의식을 처음 보는지라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커다란 괘불을 스님들이 어깨에 메고 돌아서서 문을 나섰다. 제단에서는 부처님을 맞이하는 염불과 범패와 불교무용이 계속된다. 무용은 바라를 들고 추는 바라춤과 부채를 들고 추는 나비춤이다. 바라춤을 출 때 바라가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모습이 눈이 부시다. 그러는 동안에 여섯분 스님이 괘불탱을 제단에 모셨다. 매우 조심스럼고 경건하게 괘불 걸이에 걸자 부처님은 상호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괘불이운 준비

함에서 괘불을 꺼내고

괘불을 어깨에 메고 제단으로 모신다.

조심 또 조심

괘불을 걸고


부처님은 봄하늘에 오르고 바라춤은 빛을 받아 번뜩이고

염불은 계속되고

드디어 괘불이운

범패 스님들 -원명스님은 안보이네

괘불이운을 마치고


괘불탱이 하늘에 걸리자 범종이 5차례 울렸다. 합창단이 삼귀의를 합창할 때 천막 아래 내빈들이 모두 일어서서 함께 합창했다. 물로 나도 함께 했다.


-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사회보는 스님은 범패와 찬탄이 지루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음악과 염불과 찬불가를 듣고 있노라니 나를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백제로 데려다 놓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특히 연기 지역 주민들이나 백제 유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웅진이나 사비로부터 쫓겨온 유민들 중에는 왕족도 있고, 궁녀도 있고, 높은 벼슬아치도 있고, 시중의 백성도 있었을 것이다. 그 분들이 품에 안고 다니면서 정토를 그리던 부처님이 바로 불비석이다. 그리고 이 절을 세우고 유명을 달리한 부흥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삼층석탑의 꼭대기 복발 대신 모셨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은밀하게 불비석을 모셔놓고 비암사라 칭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나는 찬불가와 찬탄곡이 끝날 때까지 합장하고 서 있었다.

다음에는 주지인 노산스님의 권공 축원이 있었다. 노산스님 인사말씀 중에 "부흥군이 신라와 힘을 합쳐 당군을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냈다"는 언급이 있었다. 나는 내가 들어온 사실과 달라 의아했다. 특히 비암사는 백제 유민들 가운데 이 부근에 살던 천안전씨들이 불비석을 만들고 헌납하여 백제 역대 제왕과 부흥군의 넋, 그리고 고통받다 돌아가신 칠세부모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마음으로 창건되었다고 생각해 왔는데 주지스님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백제 유민이 군사를 일으켜 자신을 망하게 한 신라와 힘을 합쳐 당군을 몰아내려 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백제부흥군은 신라와 당에 저항하여 싸운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이쯤해서 본래의 식순을 어기고 세종특별자치시장의 추도사가 먼저 있었다. 시장님은 백제부흥운동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분은 세종시의 의미로 행정중심복합도시, 정치적 발원을 하면서 백제 유민의 꿈이 행정 복합도시로 이루어져 금강의 기적을 이루어 대한민국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할 것이라고 했다. 오늘의 행사와는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이야기만 하고 조치원 복숭아꽃 축제에 가야 한다면서 자리를 떴다. 생각에 세종시는 그냥 경비지원이나 하고 참석하여 얼굴은 내거나 공치사를 하지 말고 조용히 있는게 좋을 것 같았다.

 

우리말 반야심경이 있은 후 천안전씨종친회장이 추도사를 했다. 그 분의 말씀은 또 다르다. 종친회장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말씀을 하며 추도사를 했다. 비암사 신도회장이라는 분도 나와서 한 말씀했다.

이어 백제국왕대신칠세부모를 위한 헌화, 헌향, 헌다가 있었다. 헌다는 주지스님 이하 스님들과 사부대중과 함께 내빈 중에서 함께 하고 싶은 이들에게 모두 기회를 주었다. 이 때 범패와 함께 하는 모습을 보니 의식이 많이 정제되고 경건해졌다. 사홍서원을 함께 했다.


-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다음에 백제국왕대신칠세부모, 법계함령등중 및 백제부흥군을 위한 위령 문화행사가 있었다. 먼저 중학교 1학년 학생인 이예진의 회심곡이 있었다. 소리가 청아하고 내용을 살려 소리를 했다. 회심곡을 들으면 사람의 일생이나 한 국가의 운명이나 나고 성장하고 죽는 것은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중앙대학교 국악과 이수민 교수가 중심이된 8악기 연주와 백제불교춤이 있었다. 백제 음악과 백제 불교춤을 복원하여 보여주었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백제의 예술을 보는 것 같아 감격했다. 그렇게 노력하는 분들이 있어 백제 문화는 조금씩 소생하고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다음은 백제 풍류선무가 있었다. 이것도 의미를 잘 모르겠지만 그림 같은데서 본 백제인의 모습을 재현하여 보여 주는 것으로 매우 신기하다.

사물놀이는 20명이 나와서 했는데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닌 것 같고 백제 예술과도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기뻐했을 것이다.


주지 노선스님의 축원

불교 합창단의 찬불가

스님들의 바라춤과 나비춤

바라춤

큰 스님들


주지 이하 사부대중의 헌다

이예진 양의 회심곡

8악기연주와 백제 불교춤

8악기 연주와 백제 불교춤

백제 풍류선무


1부 행사가 끝나고 2부행사는 세종시 문화원이 주최하는 백제 대제이다. 백제대제는 경과보고, 헌다(초헌, 아헌, 종헌) 순서로 진행되었다. 2부 행사 할 때 세종시장이 나타나서 초헌을 했다. 아헌은 세종시 의장, 종헌은 세종시 역사문화연구원이라는 여성이 했다. 매우 형식적인 행사이다. 김이 다빠진 2부는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2부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바람이 불어 제단을 휩쓸었다. 이미 1부행사에서 모든 것이 끝났는데 제단의 여러가지 제물도 바꾸지 않고 그냥 재탕으로 진행하는 대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화원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전혀 우리 문화와 어울리지 않는다. 남의 제사에 와서 제사 끝났는데 철상도 하지 않고 헌다를 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그래도 추도사와 헌화 분향을 진행했다. 바람이 불자 괘불탱이 흔들리더니 윗 부분이 찢어졌다. 문화행사를 정치적 행사로 굴절시키려한 세종시에 불계가 섭섭했나? 부처님은 그만한 일로 섭섭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그림은 훼손되지 않았다. 스님들이 나와서 서둘러 괘불을 내려 법당으로 모셨다. 백제대재는 괘불 없이 역대 제왕의 위패만 모셔놓고 진행했다. 볼수록 어색하다.


9시 30분에 시작한 의식이 오후1시 20분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1부 행사가 끝나자 스님들은 다 들어가고 내빈석도 텅 비었다. 모두 점심공양하는 곳으로 가벼렸다. 그래도 의식이니까 나는 그냥 자리에 앉아 그들의 행사를 지켜보았다. 

모든 행사가 끝나고  산채 비빔밥을 먹었다. 일하는 보살들이 과일과 떡을 내와서 감사히 공양했다. 무지개떡과 증편이 특히 맛있었다.


이예진 양 세종 아리랑

2부행사의 문화공연의 하나로 살풀이가 진행되고 있다.


돌아오는 길 꽃잎은 흰나비처럼 날고 볕은 따갑다. 비암사와 만남은 내가 백제 산성에 애착을 갖게된 동기가 된다. 비암사의 불비석이나 느티나무, 삼층석탑, 극락보전의 현판, 그리고 온순하기 이를데 없는 비암산, 비암산 너머 금성산이 있는 금이성 등 나와는 정말 소중한 인연이다. 고복저수지에는 사람들이 많다. 메기매운탕집 고가네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둘레길을 걸으며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5,60대 여인들의 모습이 평화롭기 이를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