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호박꽃은 아침마다 사랑을 한다

느림보 이방주 2016. 8. 1. 22:52

호박꽃은 아침마다 사랑을 한다


2016년 7월 19일

주중리에서


호박꽃은 아침마다 사랑을 한다.

이른 아침 주중리에 갔다. 자전거로 10분만 달리면 농촌의 공기로 숨쉴 수 있는 곳이다. 주중리 사람들은 길가 자투리땅에 호박을 심는다. 어느 지점에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았다. 막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되비치는 호박꽃이 보였기 때문이다. 호박꽃을 보면서 혼자 웃었다. 암꽃은 암컷처럼 골이 지고 수꽃은 수컷처럼 우뚝 섰다.

암꽃으로 피는 수량은 열에 하나 정도밖에 안 된다. 게다가 대개 호박잎 뒤에 숨어서 핀다. 널따란 호박잎을 제치며 찾아야 보인다. 암꽃은 밤새 있었던 일을 들키기나 한 것처럼 부끄럽다. 아니 호박꽃은 밤에 사랑하지 않는다. 일벌의 날개에 이슬이 마르는 아침이 되어야 사랑을 한다.

수꽃에서 꽃가루를 길어 올리는 일벌을 보면서 문득 꽃들의 비밀스런 사랑이 궁금했다. 일벌이 꽃가루를 길어 올릴 때 수꽃은 어떤 기분일까? 내가 백두대간 능선을 내달릴 때 느꼈던 상승과 분사 후의 나른함 같은 쾌감을 경험할까? 아무래도 아닐 것 같다. 여왕벌을 위하여 평생을 기다리다 단 한 번의 사랑으로 일생을 마감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하는 수벌만도 못한 것이 수꽃이다. 수컷으로 우뚝 서 있는 수술이 무슨 소용이랴. 골진 암술에 가까이 갈 수조차 없으니 말이다. 일벌 매파의 날개에나 묻어나는 꽃가루로 분사하는 쾌감을 어찌 맛보랴. 오늘 아침 갑자기 수컷들이 측은하다. 나는 내가 수꽃이라도 된 양 시들해진다.

일벌이 수꽃에서 길어온 사랑을 전해줄 때 암꽃은 어떤 느낌일까? 아픔일까, 쾌감일까, 오르가슴orgasme일까? 쾌감을 몸으로 받을까, 마음으로 느낄까? 아무래도 수술이 직접 다녀감만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암꽃은 일벌이 다녀가면 꽃 아래 없는 듯 숨어 있던 어린 열매의 성장 속도가 빨라진다고 한다. 온몸에 동력을 넣은 듯 활력이 인다고 한다. 일벌이 수꽃의 사랑을 전하는 순간에 성장이 가장 활성화된다고 한다. 그렇구나. 암꽃은 오르가슴을 얻어내는 것이구나. 호박꽃이란 아름다운 별명을 가진 문우가 있다. 외롭게 살다가 늦은 나이에 새출발하여 사랑에 푹 빠졌다. 이른 아침 사랑을 하는 호박꽃을 보면서 호박꽃 친구의 사랑도 몸이든 마음이든 절정에 오르기를 빌어본다.

아침이 되면 호박꽃은 사랑을 한다. 호박꽃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알고 사랑을 열매로 맺으니 다만 호박꽃은 아니다. 호박꽃은 당당한 생명임을 깨닫는다. 사람이나 호박꽃이나 사랑이라는 섭리로 산다. 호박꽃은 인류들이 누리는 쾌감도 없이 남의 영양을 만들어 낸다.

들꽃은 이렇게 우리네 생명줄이다. 나는 오늘 아침 허공에 가득하게 내리는 보배로운 섭리의 비를 작은 내 그릇에 담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