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김천시 불영산 청암사
▣ 경북 김천시 불영산 청암사 답사
▣ 2016년 4월 3일
▣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
▣ 소장 문화재
종목 | 명칭 | 시대 | 지정일 | 비고 |
보물 제296호 | 김천 청암사 수도암 석조보살좌상 (金泉 靑巖寺 修道庵 石造菩薩坐像) | 고려 | 1963.01.21 | 수도암 |
보물 제297호 | 김천 청암사 수도암 동·서 삼층석탑 (金泉 靑巖寺 修道庵 東·西 三層石塔) | 신라 | 1963.01.21 | 수도암 |
보물 제307호 | 김천 청암사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金泉 靑巖寺 修道庵 石造毘盧遮那佛坐像) | 신라 | 1963.01.21 | 수도암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 | 청암사 대웅전(靑巖寺 大雄殿) | 일제 | 1985.08.05 |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 | 청암사 다층석탑(靑巖寺 多層石塔) | 신라 | 1985.08.05 |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8호 | 청암사 보광전(靑巖寺 普光殿) | 일제 | 1994.04.16 |
|
▣ 사찰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이다. 858년(헌안왕 2)도선(道詵)이 창건하였고, 혜철(惠哲)이 머물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에 의룡율사(義龍律師)가 중창하였고, 1647년(인조 25) 화재로 소실되자 벽암(碧巖)이 허정(虛靜)을 보내 중건하였으며, 1782년(정조 6) 4월 다시 불타자 환우(喚愚)와 대운(大運)이 20여년 후에 중건하였다. 그 뒤 1897년(고종 34)경에 폐사되어 대중이 흩어졌으나 1900년대 초에 극락전을 건립하였으며, 이어서 응운(應雲)이 보광전을 건립하다가 입적하자 대운(大雲)이 이를 받아서 완성하고 42수(手)의 관세음보살상을 봉안하였다. 1911년 9월에 다시 화재로 인하여 전각이 불타자 대운이 1912년 봄에 다시 당우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육화전(六和殿)·진영각(眞影閣)·정법루(正法樓)·일주문(一柱門)·사천왕문(四天王門)·비각(碑閣)·객사 등이 있고, 계곡 건너 100m 지점에는 극락전(極樂殿)·보광전(普光殿)·요사채 등이 있는 극락암(極樂庵)이 있다.
이 중 육화전은 과거에 강원(講院)으로 이용되었던 건물이고, 정법루는 현재 종각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대웅전 앞에 있는 높이 약 6m의 석탑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층 석탑에 여래상이 양각되어 있으나 탑신이 4층이어서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 절 입구의 부도군에는 벽암대사의 사리탑을 비롯하여 태감(泰鑑)·지성(智性) 등의 공덕비가 있다. 또 일주문 안에는 사적비를 비롯하여 회당비각(晦堂碑閣)과 대운당(大雲堂)의 비각이 있다. 이 절의 부속 암자로는 유명한 수도도량인 수도암(修道庵)과 1905년에 비구니 유안(有安)이 창건한 백련암(白蓮庵)이 있다.
일요일 아침 아내와 청암사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미평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 남청주 나들목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떠날 때는 기대를 갖고 떠난다. 나는 사실 청암사에도 뜻이 있었지만 김천시 지레면에 있다는 흑돼지 삽겹살에 얇지만 진한 뜻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친구들이 다녀와서 극찬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지사 탐방 때 감탄했던 터라 직지사 말사인 청암사에 더 큰 뜻이 있었다. 또한 비구니스님들의 수도 도량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가는 길은 항상 멀게 느껴진다. 추풍령 휴게소에서 쉬면서 커피를 마셨다. 나는 고등학교 때 떠나지 않는 배고픔을 달래주던 풀빵을 샀다. 그러나 그 때만큼 맛있는 것은 아니었다. 추풍렬 휴게소에서 떠나면 김천이 바로 거기인 줄 알았는데 멀다. 가는 길에 궁거움 때문일 것이다. 김천에서 청암사도 멀었다. 길은 아주 좋았는데 청암사 입구까지 가는 동안 자꾸 시계를 보았다. 네비게이션에 의존하다보면 지름길이 있는데도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고 좋은 길이 있는데도 구도로를 일러 주는 경우가 많다. 우회도로를 두고 굳이 면소재지 작은 골목을 돌고 돌아 다시 우회도로로 들어간다. 아마도 세상 구경을 제대로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불영산청암사에 도착했다. 일주문은 다른 절에 비해 호화롭지 않았다. 일주문 근방을 깨끗하게 다듬어 놓았다. 주차장은 일주문 밖에 있는데 사람들이 차를 경내로 타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일주문에서 별로 멀지 않은데도 말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 들어갓다. 주변에 진달래가 한창이고 울창한 송림이 보기 좋다.
천왕문 근처에 무질서하게 주차된 차들이 많다. 사람들이 밖에서 웅성거리고 서 있었다. 사천왕은 벽화로 그려져 있다. 삼배를 드리고 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니 산에서 흘러오는 시내가 있고 시내를 건너는 돌다리가 있다. 돌계단 쪽으로 가는 길과 다리를 건너 찻길로 걸어가는 길이 있다. 작은 다리를 건너 계단으로 올라 바로 대웅전으로 향하기로 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계수가 사찰을 둘로 나누는 것 같았다. 대웅전과 요사채등 절집과 불교 대학 같은 수련 장소가 나뉘어 있다. 두부분을 이어주는 다리가 극락교였다.
극락교로 가기전에 우비천이라는 옹달샘이 있었다. 설명에는 이 산의 소가 누워있는 형상인데 절집이 그 소의 코 부분이라서 코에서 나오는 샘물이라 했다. 샘물을 한 구기 떠서 마셨다. 소의 콧물치고는 맛이 괜찮았다. 우비천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기 전에 보니 작은 폭포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한 보살이 폭포수가 떨어지는 모습을 사진 찍으려고 거기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폭포수의 어떤 모습을 찍으려고 할까? 흐르는 물에서 부처님 형상이라도 한 번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다리 주변의 바위에는 명문이 보였다.
일주문
우비천 牛鼻泉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작은 폭포
명문
아내를 따라 극락교를 건넌다. 참 기분이 묘하다. 이 다리를 건너면 극락이란 말인가? 불심이 큰 사람들은 극락이라 좋아하겠지만 옅은 불제자인 나는 이 다리를 건너면 곧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세속의 생각이다. 대웅전은 청기와이다. 가만히 들여다 보니 페인트 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청기와이다. 대웅전은 단청이 바래서 고색창연하다. 오히려 더 아름다웠다. 문을 다 달아 놓고 스님과 몇 신도가 법당에 있다. 대웅전은 그리 크지 않았다.
청암사 대웅전
대웅전은 석축을 견치돌쌓기로 2단으로 조성한 후 그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기둥 위에는 외이출목(外二出目), 내삼출목(內三出目)의 공포(栱包)를 결구(結構)하였으며, 기둥 사이의 평방(平枋) 위에는 문포(問包)를 2개씩 놓아 다포(多包)집을 이루었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목부(木部)에는 금단청(錦丹靑)을 하였다. 벽체는 판벽으로 구성하고 정면 3칸 모두에 4분합굽널정자살 들문을, 양 측면에는 건물 앞쪽 칸에만 외짝 굽널정자살문을, 배면에는 3칸 모두에 외짝울거미널문을 달았다.
정면과 양 측면의 굽널정자살문은 모습이 같으며, 배면의 울거미널문은 중방 알에 시설된 아주 작은 문이다. 바깥에 뻗어 있는 살미는 앙서 둘과 수서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데 앙서 윗면과 수서 아랫면을 연화각으로 장식했다. 주심포 및 간포의 수서 뒤는 봉두각으로, 모서리 귀한대의 수서 위에는 용두각으로 조각한 장식 부재를 외목도리와 장혀에 끼워 놓았다.
대운대사가 4차 중창을 끝내고 중국 강소성으로부터 석가상을 조성하여 대웅전에 봉안하고 1914년 여러 가지 성보를 제작하여 대웅전에 봉안하여 보전이 이루어졌다. 대웅전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1.26×0.76m], 후불탱[3.1×2.75m], 산신탱[1.97×0.63m], 신중탱[1.38×2.12m], 칠성탱[1.37×2.12m], 독성탱[1.38×0.84m]과 함께 소종(小鐘)[높이 0.56m]과 수번(繡幡)[2×0.6m]이 있다.
대웅전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고 어칸 뒤쪽에 내진 고주 두 개를 세워 후불벽을 치고 그 앞에 불단을 설치하였다. 판벽으로 꾸며진 후불벽 앞에는 탱화가 걸려 있고 불상 상부에는 3개의 닫집이 나란히 시설되어 있다. 후불벽 뒤쪽에는 양 측면을 판벽으로 막아 배면 문을 통해 이용할 수 있는 수납공간을 마련하였다.
내부 운궁은 구름무늬로 조각하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달리 연봉과 연꽃무늬로 조각하여 화려하게 꾸몄다.내부 모서리 운궁 상부에는 용두각한 바깥 귀한대와 달리 봉두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첨차는 마구리를 직절하고 밑면을 사절했다. 두 개의 대량 위에는 양 측면 운궁 상부에서부터 휘어 오른 측면보가 걸쳐 있는데 보머리가 용머리로 조각되어 있다. 옥개부는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청기와를 얹고 용마루 양단을 취두로 장식했다. 외부는 금단청으로, 내부는 모로단청으로 되어 있다.
- 디지털김천문화대전 -
법당에서는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청암사는 매월 첫 주 일요일에 정기 법회를 연다고 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주지스님인 듯한 비구니스님께서 법문을 하고 계셨다. 사람들은 법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 서서 법문을 듣고 있었다. 뒤로 돌아 올려다 보니 정법루正法樓에 신도가 가듣했다. 아내는 법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뜰에서서 법문을 듣도 나는 목탁소리에 맞추어 때로 삼배를 올리다가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했다.
진영각이라는 전각 앞에는 청매가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 꽃 사이로 대웅전을 바라보기도 하고 진영각을 보기도 했다. 법당에 올라가고 싶었으나 참았다. 또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싶은데 마당에 서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민망해서 가만히 서 있다가 법문이 끝나고 백팔참회를 함께 하고 예불이 다 끝난 다음에 법당에 들어가 삼배를 올렸다. 법당으로 올라가다가 뜰에 낯선 조형물이 있어 보니 석사자상이었다. 사자가 법당 좌우를 지키고 있었다. 법당을 위해 2단으로 높이 석축을 쌓아 올렸는데 1단 위에 모란이 두 그루 있다. 사찰에 모란도 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다른 절에서도 모란을 보기도 했다.
인현왕후가 숙종에게 폐위되고 잠시 이곳 극락전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런데 극락전은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희빈 장씨의 모함으로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나 이곳까지 내려와 이 깊은 산중에 머물면서 무슨 생각으로 지냈을까를 생각하니 마음 아프다. 인현왕후는 후에 희빈 장씨의 모함이 드러나서 복위되었으나 몇 해를 살지 못하고 곧 붕어하고 만다. 아마도 폐위되어 여기 저기 쫓겨다니면서 겪은 마음의 고생이 병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극락교 앞에서 본 절집
대웅전과 다층 석탑
진영각 대웅전과 인현왕후가 머물렀다는 극락전
매화사이로 진영각이 보인다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백팔참회는 계속되고
승가대학
대웅전의 모습
석사자상
극락교에서
법회가 끝나고 승가대학과 극락전 범종각 등을 둘러보고 싶었으나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를 맞으면 얼마나 맞을까 그냥 맞으면서라도 다니려고 하는데 아내의 재축이 심하다. 아내는 불전에 참배하고 정성을 다하면 그만인 불심 깊은 불제자이다. 나는 사찰 이곳 저곳을 돌아보면서 이것저것 궁금증을 풀어야 하는 불심 얄팍한 불제자이다. 나는 나중에 다시 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내를 따라 나섰다. 비는 바로 그친다. 스님을 만나 차라도 한 잔 얻어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차는 그만 두고라도 마당에 서서라도 대화를 나누고 궁금증을 풀고 싶었다. kbs에서 방송한 것이 있다니 다시보기를 해야겠다.
차를 타고 지례면 흑돼지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절에서 백팔참회를 하고 곧바로 육식을 하는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산문을 나오면 곧바로 시속의 중생이 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흑돼지 고기는 소문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고기맛은 그냥 괜찮다 하더라도 불친절하고 음식상이 청결하지 않았다. 손님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지만 고기 이외에 부식으로 나오는 것은 형편없었다. 김치부터 된장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오히려 회남의 보은식당이 깨끗하고 맛있고 고기도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고기맛이 좋다고 한다. 나는 오히려 고기보다 청암사에 더 감동하였다.
다시 오고 싶은 절이다.
'여행과 답사 > 한국의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암산 관음사 답사 (0) | 2016.05.20 |
---|---|
충남 서천군 한산면 건지산 봉서사乾芝山鳳棲寺 (0) | 2016.04.07 |
경상남도 남해 금산 보리암 (0) | 2016.03.07 |
계룡산 3대 사찰 중의 하나인 신원사, 백제 마지막 태자 부여융의 사연이 깃든 고왕암 (0) | 2016.03.05 |
충남 예산 봉수산대련사 (0) | 2016.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