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한국의 사찰

계룡산 3대 사찰 중의 하나인 신원사, 백제 마지막 태자 부여융의 사연이 깃든 고왕암

느림보 이방주 2016. 3. 5. 16:41

계룡산 3대 사찰 중의 하나인 신원사 

백제 마지막 태자 부여융의 사연이 깃든 고왕암



2016년 2월 11일


비운의 왕자

부여융이 소정방과 김유신에게 쫓겨

숨어 지내던 작은 암자

계룡산 신원사 고왕암에 들렀다.

융피굴에 들어가 보고 나오니 풍경 소리가 애처롭다.


▣ 신원사 개요

  - 대한불고 조게종 제 6교구 마곡사의 말사 신원사

  -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화리 8

  - 문화재 : 국보 299호  노사나불화

                보물 제 1293호 중악당 건물

                지방문화재 제 80호  대웅전 건물

                지방문화재 제 31호  5층 석탑

                지방문화재 후불탱화 2점

  - 창건 : 백제 의자왕 11년 (651) 고구려 보장왕의 국사이다 백제로 망명한 보덕화상에 의하여 창건


▣ 답사기


계룡산 신원사을 답사하게 된 것은 백제 31대 의자왕의 왕자인 부여융이 백제 멸망에 앞서 피신했던 암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었기에 가서 직접 그 굴(융피굴)을 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나라의 패망과 함께 만인의 선망인 왕자가 피신해야만 했던 역사의 비운을 직접 보고 싶었다. 왕자는 어떻게 그 비운을 맞이했을까? 왕자가 피신했던 석굴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이 불같이 일어났다.


2월 11일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 신원사를 내비에 입력하고 달렸다. 차는 동부우회도로- 세종시 공주를 지나 계룡 갑사 진입로를 지나 1시간 조금 넘어 신원사 입구 매표소에 앞에 머리를 대었다. 매표소에서 70세는 넘었을 것 같은 분이 나와서 날보고 '경로'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하니 2000원을 내라고 했다. 고왕암만 가면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데 굳이 그런 말을 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냥 고암암 가는 길을 물으니 처음이냐면서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면서 신원사도 들렀다 가라고 한다.


차를 타고 신원사 입구까지 가도 주차장이 없다. 불경하게도 주차장은 경내에 있었다. 차를 세우고 급하게 해우소에 들렀다가 경내를 살펴보았다. 마음이 고왕암에 있었기에 건성건성이었다. 그리고 곧 후회할 것이다. 이왕이면 자세히 조금 더 성의를 가지고 보는 것이 후에 다시 오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경내는 잘 다듬고 가꾼 흔적이 없다. 공사를 하는지 차가 드나들어 여기저기  허물어진 자국이 그대로 있었다. 나무 도막이 뒹굴고, 낙엽과 비닐 조각이 날렸다. 구석에 쌓아 놓은 눈에 먼지가 섞여 보기 흉했다. 참배객은 많다. 설끝이라 부처님께 세배라도 드리려는 대중이 이렇게 많은데 스님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마당을 서성인다.

대웅전에 들렀다. 참배객이 법당에 가득하다. 수없이 삼배를 올리는 신도들이 연신 들어오고 나간다. 이럴 때 스님 한 분이라도 오셔서 나지막하게 염불을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기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가는 곳마다 다 부처님이고 하는 일마다 다 불공이라 하니 스님의 염불을 바라 무엇하겠는가? 내가 읊조리는 노년의 옹아리만으로도 염불이고, 법당 뒷산 새소리가 다 염불이라 여기면 되는 일이다. 까짓 게으른 중의 염불만 못하겠는가 생각하니 원망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가방을 내려 놓고 목에 걸린 카메라도 내려 놓았다. 물론 모자를 벗고 옷깃을 여몄다. 부처님을 우러러 삼배를 올렸다. 대웅전은 그리 크지 않다. 의자왕 때 창건하여 조선조 태조 때 왕명에 의해 무학대사가 중창한 후 조선 고종 때 명성황후의 후원으로 보련화상이 중창했다고 한다. 후면에 소나무가 아름답고 멀리 계룡산의 한 봉우리가 솟아 대웅전을 지키고 있다. 법당을 크지는 않지만 주변의 산과 어울려 아름다웠다. 법당 앞에 5층석탑이 정면으로 세워져 있어 석가모니 부처님과 한 줄로 서있는 모습이다.  처음에는 이 탑이 문화재로 지정된 석탑인 줄 알았는데 정작 문화재 5층석탑은 범종각 뒤에 숨어 있었다. 


생각에 이 절에서 아름다운 전각으로 범종각을 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범종각은 그리 오래된 건물 같지는 않았으나  중악단을 빼고는 아름다움으로 치면 으뜸이라 생각되었다. 범종각 뒤에 고려시대의 지은 것으로 알려진 오층 석탑을 돌아 보았다. 봄이 되면 꽃이 피어 주변이 아름다울 수도 있겠지만 현재는 어쩐지 천대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도 없고 낙엽이 쌓인 속에 찾아오는 이도 없이 천년 이끼를 입은 채 그대로 서 있다.


중악단은 조선 태조대왕의 명으로 무학대사가 지어 왕실의 기도처로 내려오다가 폐사된 것을 고종 때 명성황후의 서원으로 재건되어 현재까지 내려온다고 한다. 신원사에서는 해마다 명성황후를 추모하는 천도재를 이곳에서 지낸다고 한다. 건물은 그 지난 세월만큼 고색창연하고 아름다웠다. 중악단에 참배하려다 산신을 위하는 느낌이 들어 들여다보기만 하고 그만 두었다. 묘향산에 상악단, 계룡산에 중악단, 지리산에 하악단이 있었는데 중악단만 남아 있다고 한다.


주변 산봉우리와 잘 어울리는 대웅전

신원사 경내

대웅전 앞의 탑

범종각

중악단

문화재인 5층석탑

대웅전 앞의 탑 앞에 있는 석조 부처님상

풍경


해가 저물어 다른 전각은 훗날로 미루고 서둘러 고왕암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리가 얼마되지 않아 차를 두고 걸어갈까 하다가 시간이 늦어 차를 가져가기로 했다. 경사가 급하고 운전이 어려울 것 같다. 가파른 경사로를 오르려니 차 바로 앞의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느낌으로 페달을 밟을 때 약간 두렵기도 했다. 내려올 때가 더 걱정이 되었다. 쓸데없이 옛날에 타던 무쏘 생각이 간절하다. 무쏘라면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올라챘을 것이다. 옛 것은 다 그리운 것이다. 왜냐하면 옛 것은 좋은 것만 생각나고 나빴던 기억은 잊어버린다. 마지막 엄청난 경사로를 오른 다음 금릉암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좁은 시멘트 포장길을 천천히 걸어 소나무가 우거진 모롱이를 돌아가니 작은 주차장이 보인다. 차를 한 5대 정도는 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자리에 서서 산을 올려다 보니 계룡산 준령들이 눈에 들어 온다. 산은 어느 산이나 어디서 보나 장엄하다. 여기서부터는 오솔길이다. 길은 좋은 길이 아니다. 바윗돌이 삐죽삐죽 올라왔다. 옷을 덥게 입었는지 땀이 나기 시작한다. 갑자기 신선암봉 중암을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보이는 산세는 중암만 못하다. 오르막길이다. 주변에 단풍나무 같은 온갖 활엽수들이 빼곡하고 집채만한 바위들이 포진했다. 과연 왕자가 피신할 만한 곳이다. 아마도 돌계단은 최근의 부지런한 스님이 조성한 것 같다. 아름들이 나무들과 주변 바위를 이용해서 교묘하게 돌계단을 만들었는데 웬만해서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조릿대 숲을 지나 고왕암의 처마가 보였다. 이제 다 왔구나 잠시 서서 땀을 식혔다. 부여융도 이곳쯤에서 땀을 식혔을까? 부왕이 잡혀가고 패망한 나라를 버리고 이곳까지 도망올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부왕에 대한 원망이 있었을까? 자신을 돌아보며 수없이 후회했을까?



고왕암 [古王庵] 

계룡산 중턱에 위치한 고왕암은 서기 660년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명으로 부설거사의 아들 등운스님이 창건했다. 이후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 김유신이 백제를 침공했을 때 태자 부여융이 고왕암 융피굴에 7년 동안 피신해 있다가 잡혀갔다 해서 사찰 이름을 고왕암(古王庵)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고왕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 마곡사의 말사 중 하나인 신원사의 산내 암자이다. 고왕암 주변으로는 융 태자가 피난했었다는 융피굴과 융 태자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충마(忠馬)가 슬피 울다 떨어져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마명암(馬鳴庵)터가 있다.

서기 660. 김유신장군이 이끄는 신라군 5만여 명과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당나라군은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인 탄현(대전 동쪽 마도령)과 백강으로 쳐들어갔다. 백제의 계백 장군은 결사대 5천여 명을 이끌고 황산벌(충청남도 연산)로 나가 싸웠다. 5만의 신라 대군과 대적하기에는 백제군의 숫자가 너무 적었고, 결국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는 모두 전사했다.

이후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백제인 13,000명을 잡아 당나라로 이송했다. 이로써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백제는 680여년 만에 멸망했다. 당시 사비성 백마강과 금강유역에 모여든 망국(亡國) 백제인들은 왕과 유민들이 당나라군에 끌려가는 것을 보며 오열했고, 망국의 한은 1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충남 공주시 계룡산에 위치한 고왕암(주지 견진스님)은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부터 망국의 한이 서려있는 마지막 의자왕까지 백제의 31명 왕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10월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두산대백과사전


고왕암 마당에 들어서니 절집보다 더 커다란 바위가 막아선다. 고왕암이란 현판을 달고 있는 본전 법당은 산 밑에 바짝 의지하고 서 있다. 법당은 신원사를 바라보고 있고 백제 온조왕부터 의자왕까지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웠다는 백왕전은 본전을 시위하고 있다. 법당을 지키듯 서 있는 맞은 편의 커다란 바위벽에는 마애약사여래불이 부조되어 있다. 법당에 들어가기 전에 스님의 거처가 있었다. 스님은 안 계신지 고요하다.


법당에 들어갔다. 중년의 남자 신도 한 분이 묵상에 잠겨 있다. 바닥이 차다. 나는 방석도 깔지 않고 카메라와 가방을 내려 놓고 시주를 하고 삼배를 드렸다.  부처님을 우러러보았다. 솔직히 나는 아미타부처님과 석가모니부처님을 구분하지 못한다. 비로자나부처님은 그 수인으로 금방 알 수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대웅전이면 석가모니부처님, 극락전이면 아미타부처님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런데 고왕암은 현판이 고왕암이니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생각으로는 아미타부처님이어야 할 것 같은데 수인은 석가모니부처님 모습이다. 협시불은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저 있다.


백왕전은 커다란 자물쇠가 잠겨 있다. 바위벽에 부조로 새겨 모신 약사여래를 돌아 보았다. 자연석에 새겼는데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다. 옷자락이 늘어진 선이 금방 손을 들어 움직인 모습이다. 입술, 눈썹, 코의 모습도 살아 미소짓고 있는 모습이다. 이마에서 금방이라도 땀방울이 구를 것 같은 느낌이다. 자연굴 법당 원효굴 다 돌아 보았으나 막상 융피굴(왕피굴이라고도 함)을 보지 못했다. 안내도 없고 주변에 석굴은 보이지 않았다. 쉽게 찾을 수 있으면 피신처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승방앞에 가서 또다시 기척을 해 보았다. 스님은 계시지 않는다. 마침 샘물가에 보살 한 분이 계시다. 스님이 계시냐고 했더니 출타하셨단다. 스님이 계시면 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고 좋은 말씀을 들을 수 있을 텐데  아쉬웠다. 다시 왕자님 숨었던 굴이 어니냐고 물으니 바로 따라 오란다.


공양주 보살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다시 문을 열고 뒤안으로 들어가니 거기 굴이 하나 있었다. 굴 안에는 여러가지 식재료들이 쌓여 있었다. 하긴 이런 곳에 김치 항아리를 두면 자연 냉장고가 될 것이다. 여기 숨어 있으면 아무도 피신처라고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굴은 깊지 않았다. 들어가 볼까 생각도 했지만 식재료나 항아리 그릇 같은 것이 있어 공양주보살께 미안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햇다. 굴이라 우선 음습하고 추워 보었다. 가서 웅크리고 앉아서 부여융의 흉내를 내고 싶었다. 부여융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기서 숨어 있다가 잡혀가서 당나라에 끌려 갈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


부여융은 이곳에 숨어 있다가 탄로나서 당나라 소정방의 군사에게 포로가 되었다. 아마도 신라의 군사가 와서 체포하여 소정방에게 넘겼을 것이다. 그리고 의자왕과 다른 왕자인 부여태 등 왕족과 백제의 고관들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 당에서 고종의 온갖 수모를 다 겪었다고 한다. 부여융의 수모는 수모로 끝난 것이 아니라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의 부흥군을 토벌하는데 앞장 서게 된다. 자의에 의한 것인지 당의 요구를 버릴 수 없는 것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역사의 수모를 겪었다. 그런 이유로 복신과 다른 왕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흑치상지도 배반하여 당의 벼슬을 받고 부흥군과 맞서게 되는 역사적 비극을 만들어간다. 결국 신라나 당나라가 부흥군의 내부를 분열시키고 혼란하게 하여 거의 스스로 와해되다시피하도록 조장한 것이다. 부흥군의 지도자의 다툼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의자왕의 왕자 부여융도 당에서 죽어 그의 부왕과 함께 당의 북망산에 묻히게 되었다. 그의 묘지석이 최근에 발견되었다고는 하나 확인할 길없다. 국가에만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역사가 있다. 자신의 미래를 잠시만이라도 생각했다면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쉽게 결정할 수 있었을 텐데 개인적으로 봐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날 이러한 치졸한 역사를 재현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보면 복철지계라는 고사를 생각나게 하는 일이다.


의자왕의 굴욕적 항복과 부여융의 수모를 생각하면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것은 결국 이룬 것이 아니라 민족을 당에 바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의자왕이나 왕자, 백제의 고관들을 신라로 잡아 가지 않고 어떻게 당에 넘겨 줄 수가 있을까? 신라가 포로들을 잡아 멸망한 나라의 왕에 대한 약간의 예우를 해 주면 좋았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처형해 버리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면 차라리 민족의 손에 의해 처형되는 것이다. 부흥군의 토벌도 신라가 해결하지 않고 그것까지 당과 연합하여 완성했다면 실제로 스스로 통일을 이룬 것은 아니다. 아무튼 백제의 멸망 과정과 부흥군의 한맺힌 최후를 보면 1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수치스럽고 마음 아프다.


고왕암에 오르면서 바라본 계룡산의 준령들


고왕암 가는길 현수막이 흐릿하다

찻길 마지막 주차장


오솔길의 시작

고왕암에 오르는 마지막 계단

고왕암 경내

마애약사여래불

자연석굴 법당

고왕암

융피굴

마당에서 바라본 논산 방향 사바세계


지금은 쓰지 않는지 절구에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

내려오며 바라본 고왕암

되돌아보니 ----


스님을 뵙지 못해 아쉽기는 했으나 한 가지 과제를 끝내고 돌아가는 기분이다. 이제 다시 온다 해도 벼르지 않고 훌쩍 떠나서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왕자 부여융이 죄도 없는 죄인의 몸으로 신라군에 의해 포박당하여 내려온 돌길을 나도 걸어 내려왔다. 같은 핏줄에게 잡혀 이민족인 당에 넘겨질 때 아마도 그때부터 당하게 될 수모를 각오했을 것이다. 이 때 그런 수모를 미리 다 예상하고 죽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후세인들을 이렇게 마음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망스럽다. 역사가 원망스럽고, 그를 잡아 당에 넘긴 민족이 원망스럽고 죽음을 각오하고 당에 저항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비겁한지 우둔한 왕자가 원망스럽고 그가 다시 부흥군을 섬멸하는 당의 장수가 되어 당군을 이끌고 자신의 조국에 활을 겨눈 것이 원망스럽다. 어차피 이국에서 떠도는 혼이 되어버린 운명인 것을 말이다. 원망스럽다. 지난 일이지만 나라면 단연코 당장 죽었을 것이다.


(2016년 2월 1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