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 봉수산대련사 탐방
▣ 2016년 1월 16일 오전 11시
▣ 봉수산 대련사
▣ 충남 예산군 광시면 동산리 11
▣ 개요 :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 설명
대련사大蓮寺
656년(백제 의자왕 16) 의각義覺과 도침道琛이 창건하였다. 인근 임존산성任存山城에 연당蓮塘과 연정蓮井이 있어서 절 이름을 대련사大蓮寺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과 《범우고》 《가람고》 등에는 대련사大連寺라고 적혀 있다. 845년(문성왕 7) 무주無住 무염無染이 중창하였고, 1648년(조선 인조 26)과 1691년(숙종 17), 1745년(영조 21)에 각각 중수하였다. 1836년(헌종 2) 보월普月이 수선당修禪堂을 중수하였으며, 1843년(헌종 9)에는 노전爐殿을 새로 지었다. 보월은 1849년(헌종 15)에도 법당을 중수하여 절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이후 1975년 원통보전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근대 불화의 대가 문성文性: 1876∼1954)이 머물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노전·산신각,요사채등이 있다. 유물로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높이 260cm이며,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이 올려져 있고 그 위에 상륜부가 있다. 탑신 부 3층에 이질적인 형태의 옥개석이 삽입되어 있어 마치 4층탑처럼 보인다. 이 옥개석은 거의 마멸되지 않아 후대에 끼워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련사 극락전
극락전은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 130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인 극락전은 1975년까지 원동보전이라는 현판을 걸었다가 해체 복원하면서 극락전 현판이 발견되어 극락전으로 이름했다고 한다. 원통보전의 경우 1984년 5월 17일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177호로 지정되어 있다.
1836년(헌종 2)에 보월이 수선당을 중수하였으며, 1849년에는 사찰의 모습을 새롭게 하였다. 1975년에 법당인 원통보전을 해체, 복원했을 때 이 건물 뒤편의 대들보 속에서 발견된 1849년(도광 29)에 쓴 '대련사법당중수상량문'이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이 건물을 ‘극락보전’이라고 쓴 현판이 발견되어 사찰의 내력과 함께 법당의 이름이 밝혀져 원통보전에서 극락보전으로 법당의 명칭이 바뀌었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을 하고 있으며, 자연석재로 쌓은 높은 기반 위에 원형의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올린 건물이다. 양 옆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했다.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각 3칸씩의 규모로서, 예전에는 원통보전이었던 건물이다. 1975년 해체 복원된 당시까지는 '원통보전' 편액을 걸었는데, 당시 발견된 묵서 상량문을 통하여 이 건물이 본래 극락전으로 지어졌던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극락전으로 전각 이름을 바꾸었다.
안에는 아미타불을 관음보살ㆍ대세지보살이 좌우에서 협시하는 삼존불상이 봉안 되었고, 불화로는 후불탱을 비롯해서 지장탱ㆍ신중탱ㆍ칠성탱ㆍ산신탱이 있다. 그리고 그 밖에 1977년 작성한 '개금불사동참방명기', '대련사중수기' 및 '시주질' 등 전부 4점의 현판이 걸려 있다.
대련사 삼층석탑
사찰 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삼층석탑은 총고가 260cm로 여러 곳에서 모은 석재를 사용하여 만든 것이며, 비교적 탑의 형태를 유지하고는 있으나 마모가 심하고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만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극락전 앞마당에 세워진 고려시대 말기의 석탑으로서,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 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 높이 260㎝로서 전체적으로 볼 때 탑의 형태는 갖추고 있으나 석재의 마멸이 심한 데다가, 여러 곳에서 모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현재 상륜부는 복발覆鉢과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대련사 극락전
봉수산 대련사는 내게는 의미가 큰 절이다. 백제의 마지막 항전지 주류성으로 추정되는 세 개의 성 가운데 하나인 임존성 바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백제 부흥사에서 말하는 주류성은 연기 부근의 운주산성이나 금이성이나 한산 부근의 성이냐 아니면 바로 이곳 예산의 임존성이냐 하는 것이다. 임존성이 주류성이 아니고 운주산성이 주류성이었다 하더라도 이곳은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이 되는 아주 중요한 성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전설과 답사한 성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아마도 비암사 주변의 금이산성이 중심지이고 도침대사는 금이산성에 흑치상지는 임존성에 머물면서 싸우다가 운주산성에서 최후를 맞은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다가 최후의 삼천명이 쫓기다가 비암사 부근의 토굴에서 몰살당한 것이 아닐까 혼자 상상해 본다. 그래서 비암사에 불비석이 만들어 탑신에 숨겨 두면서 백제 부흥을 부처님께 발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임존성을 가기 위해서는 여러길이 있지만 이 대련사를 거쳐가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 절이 백제 부흥을 위하여 마지막까지 항전한 도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존성 답사 길목으로 대련사를 잡았다.
내비에 대련사를 입력하니까 몇 군데 보이는데 예산의 대련사는 한 곳이다. 청주에서 오송으로 접근할 수도 있는데 익숙한 부강을 거치는 길을 택했다. 세종시를 지나 서세종 나들목으로 들어가 예산으로 향했다. 대흥 저수지 갓길을 지나 차가 산길로 접어 들었다. 길가에 눈이 녹어 포장도로가 흥건하다. 주차장에 차를 대니 바로 사찰 밑이다. 절은 남향인데도 아주 습하다. 이것이 어제 눈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이 습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주차장에 눈이 아직 쌓여 있다. 눈 위에 주차하고 가방을 챙겨 사찰로 올랐다. 극락전을 작고 아담한데 절마당에 서 있는 느티나무 세 그루는 어머어마하다. 비록 퇴락했지만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성벽처럼 높이 쌓아 올린 축대를 보니 뭉 때도 천오백년 세월을 지나면 이렇게 아름다워지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에 어떤 속인 한 분과 스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속인은 저 아랫마을에서 갑자기 내 차를 추월하여 올라간 SUV 차량의 주인인듯 했다. 스님에게 합장했다. 스님은 내가 도침을 찾아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합장이 아주 짧았다. 아니 두 손을 붙이기나 했는지 모른다. 보살 한 분이 수선당에서 나왔다. 극락전 앞에 삼층석탑이 고고하다. 정작 절마당을 지키는 부처님은 석탑과 느티나무와 느티나무 아래서 나그네를 보고 지그시 눈을 감는 개가 아닌가 하는 불경스런 느낌이 들었다. 절에 가면 스님에게 "차 한잔 주십시오."라고 말해 보라던 가산사 원각스님의 말이 생각 났지만 차를 얻어 마실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렇게 뜻깊고 오래된 절에 대중이 모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
마당은 빗물에 쓸려 자갈이 드러났다. 한 켠에 배추를 심었다. 탑 주변 쓸데없는 물건들이 어느 농가의 마당처럼 어지럽다. 가을이 돌아오면 산에서 황토를 파다가 마당을 돋우었던 옛날이 생각났다. 하기야 절이라 해서 깔끔하기만 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니까.
극락전을 알고 극락전에 가자. 극락전은 얼른 보아도 보물이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인 비교적 작은 규모이지만 작게 보이지 않았다. 큼직큼직한 자연석을 아주 높게 쌓아 올리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그런데 그 기둥이 예사롭지 않다. 건물 규모에 비해 엄청나게 굵고 크다. 맞배지붕도 마찬가지이다. 겹처마로 더 웅장해 보이는데 처마의 고색창연한 단청도 본존부처님인 아미타불의 자비를 대신 말해 주는 듯했다. 거기 걸어놓은 극락전 현판 글씨가 또한 명필이다.
조용히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모자도 벗고 삼배를 올렸다. 마음으로는 도침장군에게 올리듯 그렇게 경건하게 올렸다. 좁은 법당 안에도 삼존불을 모셨고 탱화도 거룩하다. 사진은 찍지 않았다. 최근에 누가 재를 올렸는지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았다. 아마타부처님 대세지보살님을 바라보며 도침의 안부를 물었다. 부처님은 다 알고 있으리라. 아마도 바로 이 위의 임존성에 머물러 있던 흑치상지가 당의 소정방에게 사로 잡힌 후 다시 도침을 공격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동지가 적이 되어 그 적에게 죽음을 당하는 도침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하는 기막힌 최후를 상상해 보았다. 동지들이 다 흩어져 일부는 사로잡히고 사로잡힌 대장이 다시 적이 되어 나타나고 배반한 동지에게 죽음을 당하는 슬픔을 지금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나라의 운명이 비바람에 휩쓸려도 그렇게까지 처참하게 되지는 말아야 한다. 아무리 승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적장을 포로로 잡아 그로 하여금 제 나라를 치게하는 치졸한 지도자가 되어서도 안된다. 공연히 숙연한 기분이 되어 극락전을 나왔다.
소박한 삼층석탑 아래서 가만히 합장하고 서 보았다. 석탑은 비바람에 많이 마모되어 있다. 그럴수록 보물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세월의 흔적이다. 석탑은 마모될수록 고고하고 인간은 마모될수록 추하다. 마당에 있는 스님과 보살과 불경스런 복장을 한 처사는 아직도 세속의 이야기로 열을 내고 있다. 참 이상한 손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주도 없이 삼배만으로 고고한 척하는 내가 나도 우습다. 커다란 느티나무를 한 번 만져보고 산신각은 가지 않았다.
마당을 돌아 바로 임존성으로 오른다. 산성으로 오르면서 자꾸 절이 되돌아보였다.
주차장에서 본 대련사
석축과 느티나무
돌 층계에서 본 대련사 극락전
설선당
극락전 현판과 겹처마의 화려한 단청
심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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