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읍 장령산(장용산) 용암사 탐방
▣ 2016년 1월 6일 오전 11시
▣ 장용산 용암사
▣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478
▣ 개요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장령산(長靈山)에 있는 절.
▣ 설명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천축국(天竺國)에 갔다가 귀국한 의신조사(義信祖師)가 552년(진흥왕 13)에 창건하였으며, 법주사의 창건보다 1년이 앞선다.
사찰명은 경내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로 이름 지었으나, 민족 항일기 때 일본인의 손에 용바위는 파괴되어 현재에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중창 역사는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신라 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잠시 머물러 용바위 위에 서서 신라의 서울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하였다는 설과, 수많은 당우로 산야를 메웠던 사찰이 임진왜란의 병화로 폐허화되었다는 설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 뒤 이 절은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대웅전을 비롯한 요사채 3동을 중건하였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5종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 중 화법이 정교한 후불탱화(後佛幀畵)와 1877년(고종 14)에 조성된 신중탱화(神衆幀畵)는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지정문화재로는 쌍석탑(雙石塔)과 마애불이 있다. 보물 1338호인 쌍삼층석탑은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것으로 고려시대의 작품이며, 높이는 약 4m이다.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7호인 마애불은 높이 3m에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사찰에서는 마의태자상이라고 한다. 마의태자를 추모하였던 신라의 공장(工匠) 후손이 염불하는 태자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미륵불을 조각하였다고 한다.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다고 전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몇 해 전에 옥천에 있는 산성 중에 가장 중심지에 위치한 관산성을 찾아 나선 적이 있다. 관산성이 옥천을 대표하는 산성이지만 이 산성은 어디를 두고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게 고증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옥천 금구리 현대 아파트에서 올라가는 삼성산에 있는 성들을 관산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 산에 삼성산성, 용봉산성, 동평산성, 마성산성이 있는 것은 이미 답사를 하고 답사기를 썼다. 그런데 마성산성까지 다 돌아보고 장령산으로 올랐다가 용암사로 내려올 계획을 세웠는데 길을 잃어 헤매다가 엉뚱한 곳으로 돌아 내려오는 바람에 용암사를 보지 못했다. 그 때는 입원했던 몸이 다 여물지 않은 채 산에 올랐기에 6시간 30분이난 걸린 산행에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많이 피로했다. 해가 뉘엇뉘엇 지는 삼청리 저수지에서 용암사 쪽만 바라보다가 경찰 순찰차를 만나서 얻어 타고 금구리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늘 용암사를 마음에 두고 살았다.
추위가 약간 누그러진 날 아침 갈 곳을 찾다가 드디어 용암사를 생각해 냈다. 탁월한 선택이다. 정령산은 오르지 않고 용암사만 다녀 오리라. 그렇게 옷을 입고 떠났다. 빵 한 덩어리를 사서 차에 싣고 내비에 용암사를 치고 출발한다. 서청주 나들목으로 들어가 회덕을 지나 대전 시내를 벗어나니 바로 옥천 나들목이다.
전에 지났던 삼청리 저수지를 지나 이름도 없이 어마어마하게 큰 절집 뒤안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달려 산으로 올라간다. 정말 지난번에는 이 절집이 용암사인지 알았다. 그렇게 유명한 사찰이 뭐 이런 마을 가운데 앉아 있을까 하고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건 잘못 생각이다. 용암사는 장령산으로 한참이나 올라가야 했다. 가뭄 속에서도 길가에 눈이 남아 있다. 움푹 패인 곳은 눈이 얼어 있다. 오르막길 경사가 심하다. 옛날에 타던 무쏘 생각이 또 났다. 정말 무쏘가 인연은 깊은 인연이었나 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지금 타는 그랜저도 갤갤거리지는 않는다.
오를수록 절경이다. 저 앞에 성벽 같은 축대가 떡 막아서는가 했더니 거기가 그토록 궁금했던 용암사이다. 대 숲이 불두덩에 거웃처럼 우거진 곳에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 차가 한 대 서 있다. 물이 흥건하다. 가뭄이 심하다는데도 여기는 건수가 터졌다. 물을 피해 차를 세웠다. 축대 밑에서 맑은 물이 자비처럼 솟아오른다. 왜 절집에서 나오는 물은 자꾸 부처님이 중생에게 내려보내는 자비처럼 보일까?
사찰은 아주 고요하다. 승방은 자물쇠가 걸려 있다. 성벽 같은 축대 사이로 돌계단을 올라서니 앞에 대웅전이 떡 버티고 있다. 단청이 화려하다. 오래된 건물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용암사는 원래 신라 때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번성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서 명맥만을 유지해 왔다고 한다. 아마도 여기 쌍삼층석탑과 마애불 덕분에 그나마 명맥이 유지 되었을 것이다. 대웅전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단청이 화려하고 웅장해 보였다.
법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 갔다. 스님도 신도도 없다. 하긴 오후에 도착해서 예불 시간도 지났다. 석가모니부처님도 아름답고 배면 탱화도 아름다워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다 해도 절제할 것을 잊어버리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본존불 배면 탱화는 괘불이 아니라 아마도 목각 부조 위에 금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가방을 내려놓고 모자를 벗고 카메라도 내려놓고 아주 조용히 삼배를 올렸다. 임진년 난리를 맞아 불에 타 사라지는 부처님을 상상하니 마음이 뻐근하였다. 이 사찰이 겪은 왜란은 한 번이 아니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절 안에 있는 용바위를 깨부수웠다고 한다. 속속들이 계획적이고 목적이 악랄하고 치졸한 일인들로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절을 불태우고 용암을 깨고도 남겨 둔 것은 쌍삼층석탑이다. 아마 후환이 두려워서 훼손하지 못했을 것이다. 용암을 깨고 절을 불태운 목적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훼손하는 것 그것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 이후의 우리 민족에게 정신적 좌절감을 심어주려고 했을 것이다. 용바위가 민족의 안위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지 못하고 좌절감을 갖게하는 악랄한 행위 말이다. 결국 언젠가는 신의 노여움이 그들에게 미칠 것이다.
대웅전에서 나오니 탁트인 옥천읍의 모습이 속이 후련하다. 동으로 저멀리 보이는 속리산 자락에서 붉은 태양이 솟아 오를 것이다. 그냥 서 있어도 태양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면 이 옥천 너른 들판이 붉게 물들일 것이다. 신라와 백제가 그 소유를 수없이 주고 받은 것이 바로 옥천 땅이다. 하긴 이름조차 옥천인 이 비옥한 땅을 상대에게 내주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식장산 줄기 이남인 옥천은 소유가 밤낮으로 바뀌어 여기 사는 백성이 자신의 주인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옥천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기를 꺼린다고 한다.
진흥왕 때 창건되었다니 성왕과 무한 경쟁을 하면서 이 땅을 지켜줄 것을 부처님께 발원하려고 용바위가 있는 여기에 절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인인 성왕은 진흥왕에게 딸을 주어 사위를 삼고도 옥천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이곳을 차지해야겠다는 야심을 굳혔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권력은 자신을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여 딸도 사위도 장인도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백성을 불안하게 하고 백성에게 불확실한 미래를 심어 준 것이다.
대웅전에서 내려와 절 마당을 거닐었다. 범종각에 가 보았다. 범종각도 다시 세운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다. 종의 표면에서 아직도 새쇳내가 날 것 같다. 연꽃 자리에 앉아 구름을 타고 허공으로 오르는 보살의 합장 기도가 간절하다. 이 조에서 나오는 소리는 얼마나 멀리 퍼질까? 아마도 불국토 건설의 꿈의 크기만큼 퍼져 날아갈 것이다. 아니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자비심 만큼 멀리 퍼질 것이다.
범종각 옆에는 용신을 모시는 전각이 있었다. 용암사라는 이름에 맞게 용왕각이다. 용왕께서 보내주는 감로수가 바로 옆 바위 틈에서 솟아 오르고 있었다. 용암사에는 용바위가 있어서 그리 이름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용암사가 있는 골짜기 전체가 용의 모습처럼 보이는 것 같았다. 대웅전이 있는 곳은 용의 가슴이고 용천이 솟아나는 곳은 심장부분이 아닐까 한다. 대웅전 바로 위에 마애불이 그려진 바위는 용의 머리를 치켜들고 하늘로 오르려는 형상에 비유할 만하다. 감로수는 많이 나는 물은 아니다. 그러나 깨끗한 물이 바위에서 흘러 내리고 있었다.
오른쪽 요사채를 돌아 올라가서 자연 암반 위에 세워진 쌍삼층석탑을 만났다. 큰 바위 아래 보물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다. 보물 138호라고 한다. 암반에 비해 규모가 크지는 않다. 바위에 올라 석탑 가까이 가 보았다. 크기는 비슷하다. 그러나 조금 차이가 난다고 한다. 동탑은 430cm, 서탑은 413cm라고 하니 큰 차이는 아니지만 어떤 의미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탑은 대웅전 앞에 나란히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네 여기는 대웅전 왼쪽에 세웠다. 이것은 자연적 풍수에서 부족한 것을 석탑으로 보충하는 산천비보법에 의한 것이라 한다. 스러고 보니 대웅전을 중심으로 우청룡에 비해 좌백호가 훨씬 미약하다. 그 미약한 산줄기를 쌍탑으로 보충한 것이다. 문의 현암사도 대웅전 왼쪽 나즈막한 산줄기를 탑으로 보충한 것을 볼 수 있다. 삼층 석탑은 아주 오래 되어 용암사의 희비를 다 내려다 보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 부흥군의 패망, 고구려의 멸망, 임진왜란 등 그 이후의 민족의 어려운 일을 다 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해돋이의 명찰로 알려져 새해 첫날에는 수많은 인파가 북적인다니 세태는 그렇게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인가 보다.
쌍삼층석탑에서 왼쪽 산줄기를 타면 장령산으로 가는 등산로이다. 등산로를 조금 올라가 보았다. 가파르다. 사람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산으로 가고 싶기는 했지만 나는 복장이 등산 복장이 아니고 오늘은 용암사로 만족한다. 그리고 우선 마애불을 보아야 한다. 원래는 대웅전으로 다시 내려와서 천불전을 지나 마애불로 가야 한다. 그런데 등산로에서 샛길이 나 있다. 이 길은 정식 통로는 아닌 것 같았다. 샛길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철망을 넘었다.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선을 넘었다. 이런 변칙으로는 아무런 깨달음도 얻지 못할 것이다. 마애불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7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작품이 아니라 신라말이나 고려초의 작품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이곳에서 신라가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하면서 슬프게 울었다고 한다. 그런 슬픈 모습을 작품화했다고 하는데 후세 사람들이 만든 전설일 것이다. 마의태자는 덕주공주와 함께 하늘재를 넘어 월악산 아래 덕주사에서 머물렀다는 전설도 있으니 둘중 하나는 진실이 아닐 수 있다. 마애불은 연좌를 작은 발로 디디고 서 있다. 얼굴은 작고 귀가 아주 크다. 작은 눈, 다문 입술, 미소는 없다. 대부분의 마애불이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것과 달리 미소가 없는 것으로 보아 마의태자의 슬픔 이야기를 할 만도 하다. 늘어진 옷자락의 선이 섬세하다. 그런데 몸 전체로 보아 아랫부분은 바위빛이 붉다. 붉은 빛깔이 불상을 자연적으로 화려하게 보이도록 꾸미고 있다.
산신각을 그냥 지나 천불전으로 내려왔다. 천불전은 들어가지 않고 벽화만 보았다. 마침 부처님의 열반 모습의 그림이 있어 한 참을 쳐다 보았다. 오열하는 제자들의 모습에 비해 부처님의 모습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죽음은 그렇게 편안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열반에 드시는 부처님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천불전 앞에서서 다시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미세먼지로 하늘이 뿌옇지만 맑은 날은 얼마나 속이 후련할까? 새해 첫날 이곳에서 해맞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과연 절경일 것이다. 새해 첫날의 태양이나 다른 날의 태양이나 마찬가지라면 여기 스님들은 날마다 아름다운 일출을 볼 수 있을 터이니 과연 그것만으로도 불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천불전 앞에 서서 동쪽하늘 저 끝에 거뭇한 산줄기를 바라보면서 새해 첫날의 태양을 그려 보았다. 마음 속의 태양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구름이 몇 점 둥둥 떠 있는 하늘이 점점 붉어지더니 붉은 태양이 조금씩 장엄한 빛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태양을 향하여 수 없이 합장 배례한다. 발원의 깊이만큼 합장의 간절함도 깊어질 것이다. 소망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룸의 씨앗이다. 아직도 씻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천불전 앞의 황토 발자국을 보면서 대중의 소망을 가늠해 본다.
용암사는 장령산의 끝자락에 있다. 장령산 끝자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대웅전은 무슨 의미일까? 장령산은 옥천읍 한 가운데 삼성산으로부터 용봉, 마대산을 거쳐 옥천을 싸잡아 안고 있는 산이다. 용암사가 있는 산이라 장용산이었던 것을 언제부턴가 장령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 옥천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장령산으로 부른다. 옥천을 남으로는 장령산이 북으로는 식장산이 동으로는 고리산이 둘러싸고 있다. 사실 식장산 남쪽은 대부분 신라 땅이었다고 하는데 성왕의 아들 부여창이 관산성을 공격하여 잠시 점령해 버리는 바람에 신라에서는 진흥왕이 김무력 장군으로 하여금 되찾게 했다고 한다. 그 때 성왕의 아들인 부여창과 신라의 김무력 장군 사이에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었을까? 관산성은 아마도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관산성의 위치에 대해 설이 많은데 군북면에 있는 고리산성을 관산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군서면에 있는 삼성산을 관산성이라고 하기도 한다. 구진벼루의 위치를 보면 고리산성이 관산성 같고 부여창이 점령했다면 여기 삼성산성이 관산성 같기도 하다. 아무튼 삼성산성에서 바라보이는 구진벼루에서 성왕은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성왕의 아들 부여창이 흥분하여 작전도 없이 덤비다가 김무력장군에게 백골산성에서 대패했다. 그 바람에 백제와 산라의 경쟁은 막을 내렸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안타까움을 담아서 옥천 사람들이 장령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내면을 잘 보이지 않는 옥천 사람들이 과연 백제에 더 많은 정을 가졌는지 신라에 마음을 두고 있는지는 '글쎄유-'이다.
산을 내려오노라니 장령산 긴 산 그늘이 벌써 길을 가렸다. 삼청리 저수지 옆에 커다란 절집에 들렀는데 절 이름은 없고 대웅전이 대궐처럼 버티고 있다. 삼청리 사람들은 마의태자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지 마는지 마을은 고요하고 저수지에 비친 노을은 곱기만 하다.
범종각 쪽에서 쌍삼층석탐을 바라보는 전경
대웅전의 화려한 모습 천불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가파르다
범종각
승천하는 보살 범종각에 새긴 부조
용왕각의 모습
쌍삼층석탑
마애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7호
대웅전에서 보이는 옥천
천불전 부처님 열반에 드시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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