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수필가의 《3시의 정원》
정情과 그리움을 담은 따뜻한 안양安養의 세계
이방주
1. 들어가기
영국의 수필가이자 비평가인 월터 페이터(W. H. Pater 1839~1894)는 '수필은 문학과 철학의 사이에 있다.'고 말했다. 수필은 문학성과 철학성을 동시에 띠고 있다는 말이다. 문학이 인식과 형상으로 이루어진다면 수필은 대상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야 된다는 말이다. 수필이 체험과 사색의 문학이라는 점 외에 인식과 형상의 과정에서도 다른 문학 양식과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수필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인식을 개성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로 표현해야 하기에 짧은 산문이라 해도 그렇게 단순한 작업은 아니라는 점이다.
수필문학의 이러한 특수성은 김영미 수필가의 수필집 ≪3시의 정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3시의 정원≫을 읽는 동안 독자는 김영미 수필가가 자연에서 인간의 섭리를, 인간관계에서 정과 그리움을,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철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인식하여 따뜻한 인간의 언어로 속삭이듯 들려주는 평화의 언어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2. 시간과 공간에 대한 철학적 인식
안양安養이라 하면 불교적 이상세계를 의미한다. 안양보국安養寶國, 안양세계安養世界, 안양정토安養淨土라는 말을 대신한다. 수필집 표제인 ≪3시의 정원≫에서 우리는 안양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3시의 정원’은 한국인의 시간과 공간의 인식에서 가장 안온한 시간과 공간을 함께 지시하고 있다. 즉 ‘오후 3시’는 미시 말未時末 신시 초申時初를 이르는 안온에서 신성한 시간을 의미하고, ‘정원’은 안온과 여유가 있는 공간을 이르는 말이다. 이 수필집의 표제를 보는 순간 독자는 이미 여유와 안온에 빠져 들게 될 것이다.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은 언제일까. 가만히 더듬어 보니 오후 3시쯤이 아닐까 싶다. 누구에게는 편한 시간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치고 권태로운 나른한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계획을 세우거나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늦은 시간이다. 점심을 먹었을 시간이고 저녁식사를 하기엔 이른 어중간한, 그러나 지갑이 얇아도 차 한 잔만으로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활동이 그리 많지 않은 다소 한가함이 더 어울리는 때이리라.
24시간은 1,440분에 해당하는데 이것을 80년으로 나누면 18분이다. 1년에 18분씩, 10년에 3시간씩 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 4시를 향해 부지런히 가고 있다.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이지만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만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시간이다.
-<3시의 정원>에서-
표제 작품인 <3시의 정원>에서 시간의 의미를 밝힌 부분이다. 작가는 하루 중 3시의 의미를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 한가함이 어울리는 시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또 하루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인 오후 3시를 평생을 기준으로 보면 작가의 현재의 삶을 3시에서 4시로 가는 가장 편안한 시기로 인식하는 내용이다. 작가는 대상에 대한 논리적이고 철학적 사고를 표제작품인 이 글에 담고 있다.
사람이 한 생애를 살아가는 일도 정원을 가꾸는 일과 같지 않을까. 물도 주고 관심과 사랑을 주며 가꾸면 아름다운 정원이 되지만 가꾸지 않고 내버려두면 잡풀이 우거지고 황폐해지듯이…. (중략) 사람의 마음도 정원과 같다. 그릇된 생각, 쓸데없는 싹들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솎아내야 한다.
작은 정원에서 함께 어울리고 노래하며 회오리바람이 불고 궂은비 내려도 스스로 견디어가는 방법을 깨우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작은 등대 역할을 할 것이다.
지금 나의 정원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3시의 정원>에서-
<3시의 정원>에서 공간의 의미를 밝힌 부분이다. 여기서는 가장 편안한 공간인 ‘정원’의 공간적 의미와 함께 내면의 정원을 가꾸는 인생 설계를 토로하였다. 수필의 문학적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낸 부분이다. 수필이 교훈성이 있는 문학 양식이라 해도 그 교훈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면 예술성은 반감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객관적 상관물을 통하여 은근하게 간접적으로 형상화할 때 독자를 감동하게 한다. 여기서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인식과 개성적이고 감성적인 형상화의 예술적 효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3. 제재에 대한 수필적 사고와 인식
수필은 흔히 일상에 대한 인식의 표출이라 말한다. 일상의 체험에서 얻어지는 삶의 의미를 형상화하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제재에 대한 사고가 수필적이어야 한다. ≪3시의 정원≫에 수록된 작품의 제재를 자연, 인간관계, 일상으로 분류하여 고찰해 보면, 수필적 사고라 함은 자연에서 인생의 섭리를, 인간관계에서 정情과 그리움 그리고 한恨을, 일상에서 깨달음과 성찰을 가져오는 사고의 과정을 의미한다. 작가의 작품에서 이러한 수필적 사고 과정이 발견된다.
<3시의 정원>에 수록된 총 40편의 작품을 제재별로 대별해 보면, 대략 자연과 시간을 제재로 한 작품이 5편, 인간관계 제재가 작품이 16편, 일상을 제재로 한 작품이 15편, 문화를 이야기한 작품이 4편이다. 자연과 시간을 제재로 한 작품에서는 인생의 섭리를 발견하거나 자신의 극복과 작가 자신의 역사와 사고의 전환을 토로하였다. 또 인간관계 제재 작품에서는 한국인이 가지는 일반적 정서인 정과 그리움 그리고 사랑을 따뜻한 언어로 이야기하였다. 일상을 제재로 한 작품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 작품들에서 작가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심도 있는 사색과 이를 통한 자아성찰을 보여 주고 있다.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 성찰과 깨달음, 다짐,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정, 삶과 죽음에 관한 견해를 잔잔한 속삭임으로 어렵지 않게 풀어내었다. 또한 문화에 대한 관심도 보여 기행 수필이 몇 편 보인다. 몇 편 안되는 기행 수필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보이고 단순한 기행문과 기행수필을 구분하는 본보기가 되었다.
아름답게 활짝 피었다가 질 때가 되면 꽃잎을 잔뜩 오므리고 기품 있게 떨어지는 무궁화 꽃은 또 어떤가. 그것을 보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죽음에 미리 대비하는 사람이 그려진다. 꽃이든 사람이든 한때는 화려한 시절이 있었겠지만 이렇게 떨어지는 꽃에서 나는 죽음을 본다. 누구나 한번은 맞이해야 하는 죽음이다. 어떤 꽃처럼 최후를 맞이해야 하는지 절실히 생각해 본다.
-<매화 잎 눈송이처럼 날리던 날>에서-
뿌옇게 먼지 앉은 항아리를 닦으며 거칠고 투박스런 손으로 항아리를 어루만지던 어머님의 손길이 간절히 생각난다. 시어진 김치와 두부를 숭덩숭덩 썰어 청국장을 끓이던 시어머니가 불현 듯 그립다.
어머님의 가르침을 따라 기울인 정성만큼 고추장도 내 마음도 지금 햇살로 발효되고 있으리라.
-<항아리를 닦으며>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은 살아가면서 참으로 종요로운 일이다. 또 한편으론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강물과 물안개처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관계, 그런 관계로 이어지려면 끊임없는 나만의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고 싶다.
호호백발이 되어도 타이타닉의 여주인공처럼 눈을 꼬옥 감고 반려자를 향해 기꺼이 팔을 벌리리라.
-<사랑의 언어>에서-
일복 많은 나는 늘 해야 할 일이 앞선다고 불평이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부심일 수 있다. 또 멋진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친구를 부러워하며 그런 차 한 대 사 주지 못하는 남편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걸어 다닐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낯선 것 속에서의 익숙함>에서-
민족적 문화적 정서를 과연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 정서를 잃는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잃는 무서움이 아닐는지요. 이것저것 살펴보고 만져 보고 싶고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많아 일행들보다 뒤처지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캄보디아를 보고>에서-
<매화 잎 눈송이처럼 날리던 날>은 자연에서 인생의 섭리를 일러 준다. 꽃이 지는 모습에서 죽음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사실 죽음의 모습은 곧 삶의 역사로 연결된다. 삶의 모습은 죽음을 통해서 보여지기 때문이다. 자연을 바라보면서 삶과 죽음의 섭리를 발견하여 형상화하는 것은 문학의 특권이자 의무라 할 수 있다. <항아리를 닦으며> <사랑의 언어>에서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드러낸다. <항아리를 닦으며>에서 시어머니에 대한 정과 그리움을, <사랑의 언어>에서 남편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제시하였다. 이밖에도 많은 작품에서 부모, 시부모, 남편, 아들딸, 친구와의 인간관계에서 한국인의 정과 사랑 그리고 그리움이 잘 그려져 있다. <낯선 것 속에서의 익숙함>은 일상에서 발견하는 나와 깨달음, 성찰, 다짐 등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일상을 제재로 한 여러 편의 작품에서 이와 같은 남다른 인식을 보여 주었다. 서간문 형식의 <캄보디아를 보고>는 여행 중에 느낀 문화의 소중함에 대하여 토로하였다. 기행문이 여정과 견문에 치중한다면 기행수필은 여정을 제재로 하여 대상에 대한 필자의 개성적 인식과 가치관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수록된 몇 편 안되는 기행수필은 문화에 대한 작가의 견해와 함께 기행수필의 틀을 뚜렷하게 보여 주었다.
김영미 수필가는 작품을 읽는 동안 독자들이 안양安養 든 것 같은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4. 따뜻한 인간의 언어의 속삭임으로 형상화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수필은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인식을 개성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어떤 측면에서 고려하면 매우 반어적인 이러한 수필쓰기의 작업은 수필가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만다. 김영미 수필가는 이러한 어려움을 잘 극복한 수필가이다.
시의 언어가 인간이 신에게 드리는 일방적인 소망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소설의 언어는 현실의 문제를 현장감 있게 연출하는 행동의 언어이다. 이에 비해 수필의 언어는 인간이 자신의 철학적 인식을 다른 사람에게 개성적이고 정서적인 언어로 전달하는 속삭임이어야 한다.
《3시의 정원》에 나타난 김영미 수필가의 언어는 이러한 수필적 언어의 특성을 잘 수용한 인간의 언어이다. 곧 인간이 인간에게 속삭이듯 들려주는 평화의 언어이다. 진실, 가치, 정, 그리움, 섭리, 보편적 소망, 해학과 위트, 사회 비판과 문화비평 같은 철학적 세계를 따뜻한 속삭임으로 들려주는 격조 높은 지성적 언어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또 다른 모습으로 그렇게 남아 있었나 보다. 아직도 밥그릇에 밥은 남아 있는데 나는 더 이상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사함이 따뜻한 물을 마셨을 때처럼 온몸으로 번져가는 것 같았다.
볼펜을 들어 ‘아・버・지’라는 글자를 써 본다. 아직도 잉크가 남아 있다. 또 코끝이 아프다.
-<아버지>에서-
수필의 언어는 일방적인 언어가 아니다. 인간과 인간의 속삭임이기에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언어이어야 한다. 서정과 서사를 아우르는 현실적 상상을 표현하는 언어이어야 한다. 김영미 수필가의 작품에는 이러한 수필적 언어의 특성을 수용하여 쉽고 잔잔하게 가만가만 들려주기에 화장하지 않은 여성의 담백한 아름다움과 같은 미감을 느낄 수 있다.
5. 휘갑치기
프랑스의 비평가 아나톨 프랑스(Jacques Anatole François Thibault 1844~1924)는 '수필이 어느 날인가 온 문예를 흡수해 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21세기를 맞아 수필은 고고하게 존재하는 문학의 한 양식이 아니라 대중의 생활 속에 함께 존재하는 문학 양식이 되었다. 문학은 시로부터 시작되었다면 수필로 완성될 것이라는 생각에 더 깊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모든 문학양식이 수필에 수렴되기 시작하는 이 시대를 맞이하여 김영미 수필가의 《3시의 정원》에 거는 독자의 소망이 있을 것이다. 수필이 사실과 체험의 문학이라면 대상에 대하여 치밀하게 관찰하고 본질을 이해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과정을 거쳐 자기만이 가지는 독창적 세계를 인상적으로 형상화해야 한다고 기대한다. 일상과 주변 이야기를 초월하여 문화, 시대상황, 역사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소망을 밝히는 작업도 격조 높은 예술적 작품으로 만드는 작업이라고 본다. 또한 독자를 끌어들이는 재미있는 화법도 필요할 것이다. 지나치게 담백하거나 건조하면 독자를 끌어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김영미 수필가의 《3시의 정원》은 이러한 독자의 소망을 수용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독자의 소망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기에 끊임없는 천착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덧붙이고 싶다.
(2016. 10. 29.)
'비평과 서재 > 문학과 수필평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시적 순수에 대한 그리움, 정주환 수필가의 「결 타령」 (0) | 2017.03.03 |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죽음’ (0) | 2017.01.02 |
시평 - 이종화의 詩集 <나도 그래>에서 (0) | 2015.11.01 |
한국수필 3월호 월평 (0) | 2015.03.12 |
한국수필 2월호 월평 (0) | 2015.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