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원시적 순수에 대한 그리움, 정주환 수필가의 「결 타령」

느림보 이방주 2017. 3. 3. 23:30

타령

 

鄭周煥


하얀 이빨을 드러내 놓고 밀려들고 밀려나는 東海 바다의 그 푸른 물결이 그립다. 고추 내놓고 물장구치던 내 고향 포강 물결도 그립고, 가뭄 때마다 졸졸거리며 무논을 적셔 주던 여시골의 그 물결도 그립다.

파란 불빛이 흘러내리는 法聖浦 해수욕장의 그 푸른 물결도 그립고, 서툴지 않게 대지에 쏟아 내리는 쌍계사 계곡의 물결소리도 그립고, 설악산 어느 둔덕에 피어 있던 氷花물결도 만져 보고 싶다.

인간은 모두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유유히 흘러가는 바람결같은 나그네.

창가에 흩날리는 낙엽을 바라보면 지난날 살아왔던 살진 추억들이 바람결따라 가슴으로 밀리어 온다. 기쁘고 보람 있었던 일, 서럽고 가슴 뜯기웠던 일들이 사랑의 戀歌처럼 조용히 와 닿는다. 어렸을 때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이던 새벽녘, ‘바람결따라 들리던 닭 울음소리는 꿈으로 남고, 달빛을 업은 낙엽이 소소한 바람결따라 구르는 소리는 찐득한 詩情으로 남는다.

발자욱 소리에 귀를 좇고 있으면, 물바가지를 동당거리며 걸어가는 지난날 분이의 고운 탯결이 그립다. 갓 길어온 그 시원한 生水를 벌컥벌컥 한 바가지 마셔도 보고 싶고, 후적후적 얼굴을 씻어도 보고 싶다.

달빛이 치렁한 뜨락에 걸어가는 열 아홉 소녀의 탯결도 그립고, 우윳빛 창가에 차곡차곡 쌓이는 낙엽을 바라보는 중년 부인의 탯결도 그립다. 그러나 정작 그립고 고운 것은 노랑 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입은 촌색시의 탯결이 한없이 그립다. 그때만 해도 부츠가 없고 화장품과 의복이 형편없었지만, 연초록 하얀 동정이 선명한 빨간 치마폭에 얼핏 드러난 옥색 고무신의 그 우아한 탯결은 오늘의 여인들이 감당해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큰집에 가면 서당 아이들의 낭랑한 목소리로 四書三經을 읽는 소릿결도 사랑스럽다. 활처럼 휜 나뭇가지가 탐스런 눈송이를 무겁게 이고 있는 寂黙 속에 싸여 있는 한낮 새 잡는 산마을 아이들의 소릿결도 그립고, 언덕바지에 나뭇짐을 세워 놓고 유행가 가락에 지게 장단을 치던 초동의 노랫결도 그립다. 농부가가 온 들녘에 구성지게 퍼지는 농부들의 소릿결도 그립고, 술만 들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經綸을 외치던 털보 아저씨의 소릿결도 그립지 않은가.

지금 내 막내아이가 옆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숨결이 들린다. 숨결은 나의 희망이요 꿈이다. 숨결이 내 곁에 있는 한 나는 언제나 행복할 수 있다. 뼈를 깎는 역경 속에서도 나를 잘 보살펴 주는 내 아내의 숨결도 다정스럽고, 몇 밤을 새워도 다 털어 놓을 수 없는 내 어머니의 숨결도 다정스럽지 않은가.

詩仙 李白은 말했다. 光陰은 백대의 과객이요, 인생은 浮世꿈결이라고……. 인생이란 찢겨진 낙엽처럼 그렇게 피어나던 성하의 무성함도, 싱싱한 푸르름도 흩어진 꿈결속에 머물고 만다.

내 고향 高敞에는 맘결고운 사람도 많았다.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처럼 그렇게 꾸밈이 없고 가식이 없는 넉넉한 맘결이 그립다.

짜증이 날 때면 가난한 그때를 생각한다. 비록 생울타리 치고 토담집에서 살았지만 맘결만큼은 늘 한가하고 행복했었다. 이웃을 믿었고 친구들을 사랑했으며 서로를 고마워할 줄 아는 맘결로 하늘이 봐도 무섭지 않을 정도로 정직했다.

춘향이의 쪽쪽하고 절개 높은 뜻결이 그립다. 志慨 있고 고아한 정몽주의 뜻결도 그립고, 청상과부로 인생을 보냈던 내 당숙모님의 뜻결도 그립다. ‘뜻결은 바로 지조요, 사랑의 표현이다. ‘그래도 나만은 값지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았구나.’ 라고 외칠 수 있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표상이다. 어찌 이들의 삶이 부럽지 않겠는가. 年輪을 이마에 새겨 가면서 우리는 한번 뿐인 인생의 길을 욕되지 않게 높은 '뜻결'을 간직해야겠다.

한 예술가가 작품을 위해 온갖 정열을 쏟듯, 내 어머니는 기왓가루로 놋그릇을 '윤결'나게 닦았다. 이러한 일은 특히 명절이나 경사가 있으면 꼭 해내는 어머님의 일과였다. 규모 있고 짬짬한 어머니의 살림 솜씨는 세간을 '윤결'나게 했고, 正念으로 살아가는 그 여여함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윤결'나게 했다.

함박눈이 수없이 쌓이는 밤, 하얀 마음으로 '눈결'을 마주치며 그렇게 온밤을 지새우던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그녀는 인생을 곱게 살고 싶다고 했다. 인생을 예술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롱한 '눈결'을 나에게 보내 주며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다.

'살결' 곱고, '탯결' 곱고, '맘결' 곱고, '뜻결' 고운 색시라면 한번쯤은 치근덕거리며 '눈결'이라도 마주쳐 보고도 싶다. '살결'이 하얗고, '숨결'이 뜨거운 젊은이들과 이야기하고 싶다.

세월은 바람처럼 '얼결'에 흘러가 버리는 '꿈결' 같은 존재, 앞으로 남은 세월 '물결'처럼 유유하게, '나뭇결'처럼 고고하게 살아야지.



원시적 순수에 대한 그리움, 정주환 수필가의 결 타령

 

이방주  


 정주환 수필가는 본질을 알고 그리움을 그려내는 문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그리움다운 그리움이 담겨 있다. 그리움도 없이 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마는 정주환 수필가의 그리움은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하게 가꾸어 놓은 고향집 꽃밭처럼 순수하다. 그는 원시적 순수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수필문학이라는 꽃밭을 가꾸어 꽃다운 꽃을 피워온 수필가이다.

수필을 자신의 삶보다 더 사랑한 정주환 수필가가 어느 해인지 새해 소망을 밝힌 수필 한 편을 발표했다.

 

올해만은 내 마음의 정원에 꽃씨를 뿌릴 것을 다짐해 봅니다. 내 가치를 소중히 여겨 시원찮은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는 데 힘쓰려 합니다. 아울러 언제나 창문을 열어놓고 청향(淸香)을 마시며 이웃과 함께 정을 나누는 한 해이고 싶습니다.

-정주환의 <내 마음에 뿌린 새 소망>에서-

 

소망은 곧 삶의 지향점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는 마음의 정원에 이렇게 원시적 순수라는 그리움을 지니고 청향을 그리며 날마다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를 소망하였다. 그는 수필문학에 대한 꿈도 본연의 순수를 지향해 왔다.

 

수필의 밭은 실로 넓고 광활해서 사람들은 늘 한켠에 두고 잡초만을 길러왔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그 존재마저 의심했다. 오늘날 수필문학이 발전하지 못한 것은 그 밭이 너무 크고 광활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이제 누구나 한 삽 한 삽 떠올려 그 밭을 일궈내야 한다. 돌을 고르고 잡초를 제거하고 그 위에 거름을 주어야 한다."

-정주환의 저서인 <수필문학과의 대화> 서문-

 

수필밭을 일구어 잡초를 뽑고 거름을 주어 수필의 꽃을 피우려던 수필문학의 농부 정주환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수필 밭을 지키며 영원히 잡초를 뽑아줄 것 같던 열정도 수필 문단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원시적 순수에 대한 소망은 그가 가꾸어온 수필의 꽃밭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정주환 수필가의 원시적 순수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수필 <결 타령>에 화사하게 꽃을 피우고 옹골지게 열매로 맺혀 있다. 그가 그리워한 원시적 순수는 물결’, ‘바람결’, ‘탯결’, ‘소릿결’, ‘숨결’, ‘꿈결’, ‘맘결’, ‘뜻결’, ‘윤결’, ‘눈결에 담겨 맑고 순수한 그리움이 되어 시적이고 환상적인 꽃으로 아름답게 맺혀 있다. 원시적 순수를 지향하는 그리움의 은 수필적 상상의 나래를 팔랑이며 작가가 간직한 기억의 마당으로 날아간다. 원시적 순수를 지향하는 그리움은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쌓이고 짜여 고향이라는 공간으로, 어린 시절이라는 시간으로 날개짓을 하는 것이다.

그의 수필적 상상의 나래가 찾아간 결의 세계는 그립고 서툴지 않게 쏟아내는 쌍계사 물결도 되고, ‘설악산 둔덕의 빙화(氷花)’도 된다. 그의 원시적 순수의 그리움의 날개는 눈 내리는 새벽의 닭울음소리 들려주던 바람결도 되고, 어린 시절 분이나 옥색 고무신 신은 여인의 탯결도 된다. 그의 그리움은 농부의 소리, 아기나 어머니의 숨결, 인생의 꿈결, 고향 사람들의 맘결, 지개(志槪) 있는 춘향이의 뜻결도 된다. 한 인생 가치 있게 살아온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표상이 된다. 그래서 인생은 윤이 나는 윤결이 되고 여인의 눈짓처럼 순수한 눈결이 되는 것이다.

수필은 사실의 문학이고 체험의 문학이다. 그렇다고 사실의 체험을 기록한 글을 조건 없이 수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수필을 비전문적인 문학이라고 하는 말이 맞는 말이 되고 아무나 수필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나 수필가가 된다면, 체험한 사실은 문학이 되지 못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에 머물러 버리거나 삶의 넋두리로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수필가는 사실의 체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할 줄 알아야 한다. 정주환 수필가의 작품 <결 타령>이 명 수필이 되어 많은 사람의 마음결을 울리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 같은 과거의 일상적 체험을 독창적으로 인식하고 인상적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그의 독창적 체험은 순수에 있다. 그는 물, 바람, , 소리에서 삶의 순수한 가치를 찾고, 숨결, 꿈결, 맘결, 뜻결, 눈결에서 깔끔한 삶의 윤기를 꿰뚫는 관조의 눈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의 눈결로 통찰을 할 수 없으면 수필을 쓸 수 없다. 수필은 육안으로만 바라보아서 되는 문학이 아니다. <결 타령>이라는 짧은 수필 한편은 삶을 통찰하는 작가의 영적인 시선을 보여 준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또 통찰만으로 수필이 되는 것도 아니다. <결 타령>은 작가의 영적 시선의 통찰을 시상(詩想)을 전개하듯 균제미와 통일성 있는 구조로 형상화했기 때문에 작가의 원시적 순수에 대한 그리움이 알게 모르게 읽는 이에게 영상을 그리듯 전해지고 있다. <결 타령>은 수필가가 인식의 시선과 형상의 붓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었기에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새로운 소릿결로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다.

정주환 교수는 평생 수필의 밭을 일구고 잡초를 뽑아내는 일을 기쁨으로 알며 살아온 선비로 알려져 있다. 그가 수필밭의 풍요로운 미래를 위하여 바친 땀과 열정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는 수필문학의 양적 질적 확산을 위해 살아온 문인다운 문인이다. 지금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도 아직도 못 다한 말, 내 안에 너를 가두리같은 작품집을 통하여 수필밭에 어떤 꽃을 피워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으며, 너무 쉬운 수필작법같은 수필 창작 이론서는 아직도 수필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다.

정주환 수필가의 <결 타령>을 읽으며 짧은 생각으로 이 글을 쓰노라니 수필밭의 잡초가 되는 건 아닌지 두렵기만 하다.

 


결이 그립다

 

이방주

 

절에 올라갔던 아내가 홍시 한 상자를 가져 왔다. 천년 고찰 보살사에 심어 가꾼 감나무에 대봉감이 부처님의 뜰을 소담하게 꾸미더니 내게도 자비를 내린 것이다. 신도들이 흠집이 나거나 다치지 않게 수확한 감을 잘 갈무리하여 홍시를 만든 것이다. 스님께서 부처님께 올리고 남는 감을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셨다고 한다.

대봉 홍시는 껍질이 얇고 과육이 많다. 크기도 하지만 껍질은 얇아도 과육은 다른 홍시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지다. 물수건으로 겉을 잘 닦아 껍질에 작게 흠집을 낸 다음 후루룩한입 들이켜면 물어 뗀 자국에 분홍색 결이 드러난다. 대봉 홍시의 결은 차지지만 말랑말랑하여 금방 흘러내릴 것 같은 과육을 감싸 안고 있다. 그래서 먹을 때 터지거나 흘러내리지 않는다. 다 먹고 나도 손에 묻는 것도 없고 입술 언저리에 묻어나는 것도 없이 깔끔하다. 대중에게 가리지 않고 자비의 미소를 보내는 부처님의 마음결같다.

나는 부처님 마당에서 가꾸어낸 홍시를 앉아서 받아먹으면서 부처님 대신 어머니가 먼저 그립다. 고향집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가을이면 작은 골짜기가 온통 분홍색으로 뒤덮였다. 감이 붉게 익어갈수록 감잎도 따라 물들이기를 했다. 대봉은 아니고 월화(月華)’라는 품종이다. 씨가 작고 껍질이 얇으며 과육이 대봉 홍시처럼 차지지는 않아도 더 달았다.

어머니가 워라라고 발음하는 월화라는 감 이름 때문에 붉게 익어가는 감에 달빛이 비치는 달밤을 생각하게 했다. 달이 밝은 날 잠이 오지 않으면 큰마당에 나가 서성이다가 마당 끝에 서 있는 감나무를 본다. 낮에 보면 화려하게 익어가던 월화감이 달밤이면 붉은 색을 잃어버리고 대신 월화를 받아 더 고고한 빛결을 보인다. 그 때마다 월화 감을 어머니의 워라감이라고 생각했다. 보름달에 비치는 월화감은 어머니의 마음결이고 빛결이다. 인제는 회상에 잠겨야만 마음속에나 그려지는 어린 날에 풍경이다.

가을에 그렇게 감이 많이 달려도 마음 놓고 똘똘한 감을 먹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감을 팔아 돈을 사야 살림살이를 도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뭇가지에 찔려 상처 난 것, 따다가 떨어뜨려 깨진 것, 침시를 만들다가 너무 뜨거운 물에 덴 것 같은 흠집 있는 것만 우리에게 나누어주셨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보면서도 흠집 있는 감만 먹이는 어머니를 원망했었다.

지금 다시 대봉 홍시를 먹다가 마음은 똘똘한 감 하나를 자식들에게 마음 놓고 먹이지 못한 어머니에게 간다. 어머니 가신 지 벌써 사반세기가 다 되어 간다. 고향집에 가보면 감나무들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따라 늙고 병들어 가지가 저절로 떨어지고 감잎도 달리는 감도 시들해졌다. 산소에 간다. 잔디가 곱게 살아났다. 갈퀴로 제절에 쌓인 낙엽을 긁어내면 잔디가 갈퀴질의 따라 결을 이룬다. 어머니 머리칼 같은 잔디의 결, 어머니 주름살 같은 마음결이고 근심의 결이다. 고운 잔디 결이 삼단 같던 젊은 어머니의 머릿결 같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더 그립다.

가족이 다 떠나 빈집처럼 무너진 옛집에 들른다. 마루에 앉아본다. 참죽나무 붉은 결이 곱다. 마루에 아직도 붉게 남아 있는 나이테의 결을 본다. 100년도 넘은 마루를 걷어내고 텃밭 둑에 아름드리로 큰 참죽나무를 켜서 새로 놓은 마루이다. 참죽나무는 오래 묵을수록 그 붉은색이 더 짙어지고 켜켜이 쌓인 결이 더 고고해진다. 마루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칼국수를 먹거나 삶은 고구마를 먹던 옛날이 그립다. 걸레질로 닳고 닳아 나이테가 만들어준 결이 더 선명해진 마루에서 그리운 어머니의 손결을 찾는다. 붉은 참죽나무 마루에서 그리운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의 손결은 거칠수록 부드럽다. 결이 있는 것은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결이 있는 것은 마음속에 그리움의 결을 끊임없이 지어낸다.

이렇게 마루에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옛날이 다 보인다. 언제나 맑은 물이 솟아나던 샘물의 물결, 텃논 익어가는 벼이삭의 황금 결, 벼를 베어낸 텃논 제일 큰 배미에 만들어 놓은 얼음판의 얼음 결, 눈 내리는 날에 안산(案山)에 쌓인 눈결…….

지금은 다시 뵈올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결을 그리면 시름만 짙어갈 뿐이다. 차라리 함께 있는 사람들을 보자. 아내의 마음 결, 예쁜 딸의 마음결, 착한 며느리의 마음결도 여자의 본능적인 사랑을 가진 결국은 어머니의 마음결이나 마찬가지이다. 함께 있어도 늘 그리운 어머니의 사랑 같은 마음결이다. 외출했다 들어오면 다리를 두 팔로 안으며 매달리는 손자의 마음결, 조상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마음의 줄기이다. 대봉 홍시의 과육처럼 차지고 흘러내리지 않는 마음결이다. 사람은 그런 마음결에 대한 그리움으로 오늘을 산다. 결을 그리는 마음으로 오늘을 산다.

    

  (2017. 3. 3.)


월간 한국수필 4월호 청탁원고 

 

 

약력

한국수필수필 등단

충북수필문학상, 내륙문학상 수상

수필집 풀등에 뜬 그림자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