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죽음’

느림보 이방주 2017. 1. 2. 14:22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죽음

 

이방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동주에게는 하늘, 바람, , 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죽음'도 있었다. 아니 그에게는 하늘도 별도 시도 죽음이 전제되었다. 동주의 문학에 수용된 삶은 죽음이 전제된 삶이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아도 늘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괴로움이 동주를 엄습했다. 그렇게 동주의 삶은 죽음에 직결되어 있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음이 무엇이기에 어린 동주에게 공포처럼 순명처럼 머리에서 가슴에서 떠나지 않았을까?

 

10년 전쯤 용정 대성중학교 윤동주 기념관에 들른 적이 있었다. 윤동주 시비에 손을 얹고 그의 괴로움과 슬픔을 피부로 받아들였다. 동주는 역사의 질곡에서 지식인이 지녀야 할 사명이라는 철저한 규범의 틀 안에 자신을 쓸어 담지 못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꾸짖었다. 녹슨 청동경을 닦고 또 닦으며 거기에 비친 자신의 부끄러운 얼굴을 수없이 참회했다. 그러나 결국은 일제에 의하여 불순분자로 체포되고 생명의 에너지를 조금씩 빼앗기며 죽어간 지고지순한 시인이다. 대성중학교, 동주를 거기에 두고 나오면서 간도라는 넓고 비옥한 땅을 다 잃어버린 역사 앞에서 나는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그저 역사를 놓친 조상들이나 원망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에 가슴을 두드렸다.

동주가 쓰고 후배 정병욱 교수가 보관하여 오늘날 우리 앞에 전해진 최초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몇 편의 시에 녹아 있는 죽음에 대한 의식을 생각해 보았다.

인생은 탄생과 죽음 두 가지 사건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어떻게 죽든 태어난 생명은 죽어가게 마련이다. 죽음은 자연적인 법칙의 일반 질서이며 과정이며 인간 존재의 기본적 인식의 절대적 요소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 밝음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 이승과 저승 등의 이원적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한다. 아울러 슬픔과 허무 무상감을 깨닫게도 한다. 허무와 무상감에 대한 깨달음은 무한한 공포와 불안함을 불러온다. 죽음은 우리에게 슬픔과 두려움에 빠지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경건함에 들게도 한다. 누구도 이러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죽음만큼 사색과 상상의 영역을 깊고 넓고 한 차원 높게 하는 사건도 없다. 죽음은 삶의 바탕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 전제되게 마련이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담고 있는 죽음에 대한 의식을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다. 동주가 살았던 시대, 동주가 아픔의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한국 문학이 죽음에 대하여 반응하는 일반적 양상으로 귀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동주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한국문학에 드러난 일반적인 죽음 의식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한국문학의 죽음에 대한 인식의 바탕이 된 근원적인 의식 구조는 무엇일까? 현대 한국인의 표면적 의식은 누구나 과학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합리주의라는 표면적 인식의 밑바탕에 감추어진 심층적 의식은 많이 다르고, 그러한 의식이 문학 작품에 수용되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이렇게 감추어진 저층에는 불교, 도교, 유교와 같은 동양적인 교양이나 도덕적 윤리 의식이 숨어 있고 더 심층에는 샤머니즘적 사유가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문학에서 간과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의식 가운데 하나는 가치 있는 삶을 전제한 죽음이다. 배경 설화와 함께 전하는 헌화가에서 자줏빛 바위 가에/잡고 있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꽃을 꺾어 바치오리다.’라고 했다. 결국 나의 사랑을 받아 준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절벽에 올라 꽃을 꺾어 오겠다는 것이다. 곧 가치 있는 삶을 전제한다면 희생적 죽음을 달게 받아들이겠다는 의식 세계이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죽음 의식은 동주의 작품에 수용되었다. 동주의 시 <십자가>를 보자.

 

(앞부분 생략)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十字架)가 허락(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 5. 31.)

 

십자가는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매달려 희생당한 형틀이다. 사랑과 헌신이 중심이 되는 기독교 사상의 상징이다. 동주의 <십자가>는 일제 강점기라는 민족의 수난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속죄의식이다. 시인이 스스로 비극의 속죄양이 되고 자신의 죽음으로 민족을 역사의 질곡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면 예수처럼 행복할 것이라는 순교자적 염원을 드러낸 것이다. 곧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죽음의 선택으로 삶의 궁극적 아름다움을 이루겠다는 죽음에 관한 전통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삶과 죽음은 밝음과 어둠이라는 구조로 이해될 수 있다. 동주는 삶은 밝음이고 죽음은 어둠이라는 긍정과 부정의 대립구조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삶과 죽음을 동일하게 여기는 의식이 숨어 있다. <새벽이 올 때까지>를 보자.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 소리 들려올 게외다 (전문 1941.9.)

 

여기에는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가는 사람이 함께 등장한다. 아무리 검은 옷과 흰옷으로 다르게 치장했어도 죽음과 삶은 한 침대에 가지런히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이나 살아가는 사람이나 다 같이 울게 될 가능성으로 보아 죽음의 공포나 살아가는 괴로움이 마찬가지인 것이다. 공포와 괴로움 속에서도 젖을 먹이면 희망찬 나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 예언한다. 희망의 나팔소리가 전제되지만 현실은 죽음이나 삶이나 결국 고통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동주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절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의 시 <무서운 시간>을 보자.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이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전문 1941. 2.7.)

 

이 시에서 동주는 그냥 가랑잎 같은 자신의 운명적 절망을 표현하였다.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사명감도 다 버리고 싶은 절망감의 표현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나를 불러내어 무서운 죽음의 길로 불러내지 말라는 절규이다. 시대 상황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인한 종교적 소명을 향한 결단일 수도 있고 절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

동주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서시>에 하나로 모아져 그 정수를 이룬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전문 1941. 11. 20.)

 

우리가 이 세상을 마감하는 날, 사람들은 망자의 죽음을 말하기 전에 먼저 그의 삶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망자의 삶은 바로 그의 삶에 대한 평가이다. 그것은 바로 한 세상을 구성하고 살았던 망자의 역사이다. 망자의 역사는 세계의 역사를 쌓는 하나의 벽돌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죽음을 위하여 산다고 할 수 있다. 동주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소망한 것은 바로 삶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고 죽음에 대한 평가는 삶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이다. 가치 있는 삶은 가치 있는 죽음으로 평가 받는다. 삶의 평가는 결국 대중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 삶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주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을 것이다.

동주는 1943216일 새벽 326,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사망한다. 감옥에 있을 때, 끌려 나갔다 돌아오면 '이상한 주사를 맞는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제는 혈액 대체물 실험을 윤동주에게 했다. 그렇게 생체실험으로 죽어간 것이다. 273개월의 짧은 생애를 자신의 슬픈 소망대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은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탄생하여 일제 치하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은 결국 감옥이고 죽음이었다. 그는 순간순간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조국에 대한 순명의식으로 죽음을 대했다. 어떤 사람은 역사의 질곡을 이용하여 호의호식하며 살았는데 동주는 감옥 같은 삶과 죽음 같은 삶의 길을 택했다. 결국 동주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의식을 문학에 수용하고 시에 토로한 죽음에 대한 인식의 명령에 순종하며 생을 마감했다. 그가 외친 외마디 소리는 무엇일까. 시끄러운 오늘의 정국 속에 가슴이 서늘하다

 

(2017.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