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달기똥 묻은 달걀

느림보 이방주 2015. 7. 4. 21:52

달기똥 묻은 달걀

 

 

김삿갓 문학관이 있는 와석리 김성규씨의 노루목상회 식당

 

오랜만에, 참 오랜만인 한 3년 만에 교직의 고향인 초임지 의풍에 다녀왔다. 연풍, 송계, 월악산 억수 계곡, 덕산 계란재를 넘어 구담봉 옥순봉의 장회나루를 다 지나고 단양읍에서 마늘정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고습재 넘어 가곡에서 우회전하여 보발리를 지나 보발재 굽이굽이 돌며 내려가 구인사를 지나고, 봄이 길었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한 영춘永春에서 밤재를 넘어 동대리를 스쳐 이름조차 험하고 험한 베틀재에 올라서 삼도봉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저 아래 장건지 골짜기에서 멧돼지 떼를 만났던 밤을 생각하니 새삼 소름이 끼쳤다. 눈이 쌓여 달이 더 슬프게 밝던 날 넘던 일 생각하니 마음은 도리어 푸근해진다. 성황당이 있던 자리에 세워놓은 정자에 오르니 생각이 참 많다. 품은 정이 깊었나 보다.

 

김삿갓 문학관이 있는 노루목상회식당에 들렀다. 선글라스를 끼었는데 제자도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를 쉽게 알아본다. 마음에 있으면 무엇으로 가린들 보이지 않으랴제자를 만나고, 제자보다 더 반가운 그 아버지 김성규씨와 손을 잡았다. 아직도 거친 노인의 손을 잡았다. 군대 간 아우가 왔다 한들 이보다 더 반가워할까아내는 옛 학부형에게 뚜레쥬르 롤케익을 드렸다. 아니 할머니 된 그 부인에게 드렸다. 쉰이 넘은 제자는 어쩔 줄 모른다. 점심을 먹었다니까 점심 손님을 받느라 정신이 없으면서도 감자 부침개라도 부친다고 한다. 나는 그냥 가겠다고 했다. 옛 학부형은 달걀을 한 판 준다. 달걀 한판 삶아 놓고 소주 마시던 옛일이 기억났을까? 줄 게 정말 없어 이걸 준다면서 '이건 집에서 병아리를 길러 얻은 달걀'이란다. 정말 집에서 기른 토종닭이 낳은 달걀이다. 달걀에는 오랜 정이 옹골지게 묻어 있었다.

 

이제 팔순이 가까운 노루목상회식당 김성규씨는 내게 전설이다. 마대산 아래 옥수수 농사짓던 그분과 그 부인은 내게 전설 같은 학부형이다. 나도 또한 그분에게 전설이다. 의풍에서 세 자식을 종아리 때려가며 구구단을 끝까지 가르치고야학을 열어 청년을 깨우치고, 아이들과 꺽지를 잡고, 뱀장어를 움키던 나는 그에게 전설 같은 선생이다. 소주든 옥수수엿술이든 청탁을 가리지 않았고고추장 찍은 풋고추든 꺽지 튀김이든 안주도 가리지 않았던 이방주는 그분에게 전설 같은 사람이다.

 

돌아오는 길에 부석면 남대리로 백두대간 마구령을 넘었다. 이 대단한 고개를 걸어 부석사 구경 가던 젊은 날이 내게 있었다. 그 때는 조카인 영월 청령포의 단종이 삼촌인 순흥의 금성대군에게 보내는 밀사가 넘던 고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몇 해 전에 노산군 산신당이 있는 고치재에서 비를 흠씬 맞으며 선달산으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던 옛날이 생각났다이제 세 번째이다. 이것이 마구령과 나의 인연이다. 마구령은 많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인연이 있고 내게도 아득하고 낭만적인 인연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앞 석등, 석등에 부조된 얌전한 보살님, 부석사 연유된 뜬돌, 화엄세계 의상대조사, 사바세계로 물이 되어 쏟아져 내리는 부처님의 은혜, 부처님의 자비가 다 내게 왔다가 세상으로 돌아나간다. 나는 세상에 인이 되고 세상은 나에게 연이 된다. 부석사 앞 폭포 쏟아지는 연못에 물안개가 불법과 인연처럼 아련하다.

 

풍기에서 중앙고속도로에 올라섰다. 차가 산속으로 자꾸 들어가더니 어둡고 깊은 굴에 스며든다. 아 이것이 어둠이구나. 어둠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구나. 아내에게 부탁해서 안경을 밝은 것으로 바꾸어 끼었다. 조금 밝아졌다. 그러나 곧 어둠이다어둠은 안경으로 어찌할 수 없다. 길고 어두운 죽령굴길을 지나 단양 대강면 용부원으로 빠져 나오니 하늘이 참 밝고 곱다. 번뇌의 세계에서 도망 나온 기분이다.

 

장회나루 휴게소에 다시 차를 대었다. 해우소에서 근심을 풀고 강선대降仙臺를 찾으니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키를 넘게 자란 느티나무에 가려 강선대도 옥순봉도 보이지 않는다. 강선대 옆에 있는 두향이도 보이지 않는다. 나무는 강선대나 두향이 그리운 이들의 시계視界를 가린다. 아름다운 사랑이 그리운 이들의 눈을 가린다. 나는 마음으로만 강선대를 본다. 말목산, 구담봉, 옥순봉, 금수산이 다 보인다. 퇴계 선생과 인연을 원망하며 강선대에서 생을 마감한 기생 두향을 본다내게 인연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것도 다 보인다. 세상이 다 보인다. 

 

월악 영봉 바라보며 송계 솔바람에 번뇌를 씻고 집에 돌아왔다문득 노루목을 뒤돌아 생각하다가 김성규씨가 준 달걀 한판을 풀어 보았다. 나와 함께 마구령을 넘고 죽령을 넘어온 달걀을 풀어 보았다. 토종닭이 낳은 달걀답게 달기똥이 묻어 있었다. 여기저기 피똥도 묻어 있었다. 피똥은 토종닭의 힘겨운 삶의 자국이다. 주인의 밥을 받아먹은 닭의 인연의 자국이다. 똥이 묻지 않은 곳이 너무 깨끗해서 똥도 피도 더러워 보이지 않았다. 오래된 정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진한 인연이 묻은 것으로 생각되었다노루목 김성규씨는 내게 달기똥 묻은 달걀 같은 인연을 준 것으로 생각되었다. 오늘따라 서창에 비치는 노을이 더욱 찬란하다.

 

(2015. 7. 4.)

 

보발재에서 구인사 쪽으로

 

 

장회나루에서 간신히 보이는 구담봉

 

마구령에서

부석사 입구

 

일주문

무량수전

무량수전 모형

무량수전앞 석등

석등에 보살님

 

아름다운 전각

뜬돌

내려오는 길에 바라본 전각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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