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
새벽에 비가 내린다. 아침운동을 나가지 못한다. 창을 활짝 열었다. 새벽 공기에 씻긴 빗방울이 건조한 공기에 스미어 집안이 잠시 투명해지는 기분이다. 마음까지 투명해졌으면 좋겠다. 대체 마음은 무엇일까? 마음의 실체는 어떤 모양으로 우리를 지배하기에 때로 열려 있기도 하고 때로 닫혀버리기도 할까?
아침 식사를 했다. 감자채볶음을 밥에 얹어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씩 푹푹 떠먹을 수 있는 아침이 있어 좋다. 가끔 묵은 배추김치 한 조각이 입안을 개운하게 씻어준다. 김치 한 조각을 먹었을 때나 양파 초절임을 오래 씹었을 때처럼 세상이 맑고 개운한 기분이었으면 좋겠다.
아침을 먹고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나는 청소를 한다. 나의 청소법은 청소기를 돌려 구석구석 잔 먼지까지 다 빨아 먹게 한 다음 걸레 두 장으로 깨끗이 닦아내는 것이다. 한 30분이면 뽀송뽀송한 느낌을 받아 발바닥이 좋아한다. 집안이 개운한 세상으로 변한다.
걸레질을 하다가 베란다에 추레한 더덕 덩굴을 발견했다. 이른 봄 아우내장에서 사다 심었는데 옹기 화분이 바짝 말랐다. 우선 물을 주었다. 버팀 막대 끝에 새로 난 덩굴은 싱싱하다. 하늘을 향해서 새로운 꿈을 찾으려고 더듬이질을 한다. 모든 힘이 덩굴손 끄트머리에 몰려 있다. 덩굴의 끄트머리에 비해서 밑동 부분은 이미 잎이 누렇게 떠 있다. 꿈이 없어 이미 생기를 잃은 것이다. 시든 놈들은 지저분하다. 얘들이 죽는 것인가 걱정이 되어 살펴보니까 덩굴 밑동은 처음 심을 때보다 더 굵어지고 제법 튼튼하게 제 몸을 지탱하고 있다. 머지않아 초롱같은 꽃을 피울 날을 생각하면서 시든 이파리들을 모두 떼어 냈다. 노란 반점이 방울방울 생긴 이파리까지 다 떼어 냈다. 새로 뻗어가는 덩굴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짐이 되지 않아 자신이 설계한 꿈을 향하여 힘차게 더듬이질을 할 수 있도록 다 떼어 냈다. 개운하다. 더덕의 세상을 개운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난 오월 문화센터 글벗들에게 받은 덴드롱이 추레하다. 처음 받을 때는 하얀 꽃잎에 별처럼 자주색 화관을 쓰고 앉은 꽃다발이 진초록 잎사귀와 어울려 정말 행운을 가져다 줄 것 같았었다. 꽃은 계속해서 피어나는데 이미 피었다 지는 꽃이 화분 전체를 추레하게 만들어 버렸다. 꽃에게는 미안하지만 지는 꽃을 가위질했다. 젊고 싱싱해졌다. 덴드롱이 가져다줄 행운의 미래가 맑고 깨끗해졌다.
걸레질을 마치고 보송보송한 거실을 지나서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 맑고 상쾌하다. 식기 건조기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탄다. 커피 물을 데우고, 도예를 하는 제자가 만들어준 커피 잔에 흔한 믹스커피를 쏟아 넣는다. 찻잔을 저으며 생각하니 젓지 않아도 되는 에스프레소가 잠시 그립다. 며느리가 만들어주는 엷은 에스프레소는 아무것도 넣지 않아 깨끗하고 향긋했다. 며느리와 함께 살던 한 달 동안은 아침마다 향긋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며느리의 맑은 마음까지 받는 기분이라 행복했다.
에스프레소 향이 몸에 익숙해질 즈음 새집에 입주하면서 손쉬운 믹스커피로 돌아갔다. 믹스커피의 첨가물은 혀에는 달지만 몸에는 좋지 않다고 한다. 나도 그건 안다. 그러나 혀에 감기는 그것을 단호하게 잘라버리지 못한다. 태어나서 믹스커피를 한잔도 마셔보지 않은 친구도 있다. 참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다. 좋지 않은 것을 단칼에 잘라버리지 못하는 것도 인지상정이라 변명해도 될까. 사실은 그럴 용기를 가져야 내 몸도 마음도 깨끗해질 뿐 아니라 사회도 깔끔해질 것이다.
텔레비전에서는 그동안 숨어 다니던 유아무개의 운전기사가 자수를 했다고 떠든다. 종합편성채널에 단골로 나오는 패널들이 더욱 목청을 높인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들의 목소리는 누군가에 의해 연출된 느낌이 든다. 뿐만 아니라 줄지어 일어나는 사건들도 연출된 것이 아닐까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불경스러운 말이지만 세월호 참사가 아무개 종교집단 유아무개의 사건으로 슬그머니 옮겨가더니 탐정 만화처럼 잡을 듯 놓칠듯하다가 허망하게 주인공이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 버리면 연작 만화는 싱거워진다. 주인공 주변 인물들 중에 잡혀야 하는 인물은 잡혔고, 자수해야 재미있는 인물들은 자수했다. 정말 무대 뒤에서 누군가 대본에 따라 지시하면 튀어나오는 배우들 같다.
어떤 석학이 그의 특유한 이북 말투로 이런 말을 했다. “유아무개에 대해 정치인들은 여야를 불문하고 말이 없어요. 나는 말 많은 그 양반들이 왜 조용한지 모르겠어요.” 정말 왜 말이 없을까. 그들도 무대 감독의 연출 지시대로 대본에 있는 말만 하고 마는 것일까?
진정 불경스러운 말이지만, 정치 사회도 대청소를 했으면 좋겠다. 얽혀서 찾을 수 없는 실마리를 찾느라 고생하지 말고 엉킨 실타래는 그냥 버리고 새로운 길쌈을 하는 것이 좋겠다. 미안하지만 떡잎같이 부패한 정치인은 떼어내고, 생기를 잃어 시든 꽃도 다 잘라버리고, 절반으로 줄였으면 좋겠다. 대신 교원 수를 늘이든지 공공기관 옆에 탁아소를 열었으면 좋겠다. 교육의 질도 나아지고, 이 사회의 덩굴손 같은 젊은 여성들이 마음 놓고 새순을 뻗어갈 수 있도록 말이다. 시들거나 부패한 정도를 심사해서 청소해버렸으면 좋겠다.
얼마나 개운할까? 깔끔하게 청소된 세상이……. 초롱으로 연록의 꽃이 피어나는 더덕처럼, 자주색별꽃으로 피어난 덴드롱처럼, 뽀송뽀송한 거실처럼, 그렇게 맑고 조용한 세상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배추김치처럼 그윽하고, 양파초절임처럼 개운하고, 며느리의 에스프레소처럼 착한 향기가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는 오늘도 청소를 한다.
(2014.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