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집
올 겨울에도 연풍 사과 한 상자를 들였다. 옛사람들은 충주 사과나 대구 사과를 치지만 내 입에는 연풍 사과가 제일이다. 어느 지방 사과도 연풍 사과의 단맛과 야릇한 향기를 따르지 못한다. 이렇게 좋아하는 연풍 사과도 흠집이 있어 상품이 되지 못하고 비품이 되고 마는 것이 있다. 나는 연풍 사과를 잘 알기 때문에 정품이 아니라 비품을 주문했다. 비품은 나뭇가지에 긁히거나 까치 부리 자국이 있는 것을 말한다. 흠집이라야 보일 듯 말 듯 한데 단맛은 더 진하고 향기도 더 좋다. 농민들은 상품화할 수 없는 것을 팔아서 좋고, 나는 맛과 향기가 정품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싼값에 먹어서 좋다.
연풍 사과의 향기는 백두대간 골짜기의 바람과 물과 흙이 만들어 낸다. 서울에서 영남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가 조령이고 이화령이다. 영남에서 서울을 가려고 힘겹게 조령을 넘어 한숨 ‘휴-’하고 돌리면 거기가 바로 연풍이다. 백두대간 백화산과 조령산 사이 골짜기 골짜기마다 마을이 있고 기슭에는 사과밭이 있다. 두통에 찌든 머리도 개운해지도록 공기가 맑은 곳이다. 낮에는 햇볕이 짠들짠들하고 밤에는 여름에도 선뜩선뜩하다. 연풍 사과 향기는 연풍의 산세와 바람 냄새 물 냄새를 닮았다.
연풍 사과의 단맛과 야릇한 향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과 농사짓는 연풍 사람들의 부지런함이다. 연풍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내내 백두대간 기슭의 비탈진 사과밭에서 산다. 계절마다 힘들지 않은 때가 없겠지만, 사과 알에 살이 붙기 시작하는 초가을부터 늦가을 서리 내리기 직전까지 가장 어려워 보였다. 바닥에 비닐을 깔아 반사하는 햇볕까지 받아 당도를 올린다. 하루라도 더 볕을 쬐려고 사과나무와 함께 밤을 견디다가 서리 내리기 직전에서야 수확한다. 게다가 달려드는 원수 같은 까치 떼도 쫓아야 한다. 제아무리 연풍 사과라도 흠집이 있으면 제 값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말을 들으면 한 상자에 15만 원짜리가 3만원 받기도 어렵다고 한다. 늦가을 주렁주렁 열린 사과나무를 보면 연풍 사람들의 가슴에 매달린 조바심처럼 보인다.
아침저녁으로 골짜기 공기가 서늘해지면 사과에 단맛이 들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사과 향에 취한 까치들이 달려든다. 아무리 소담하게 살지고 단맛과 향기가 절정에 이른 사과라 할지라도 까치가 뾰족한 부리로 한번만 ‘콕’ 찍으면 못쓰게 된다. 바람이 불어 가지가 흔들리다가 뾰족한 가지에 조금만 긁혀도 안 되고, 이유 없이 꼭지 부분이 갈라져도 못쓴다. 그러나 작은 흠집이 있는 사과라 하더라도 기울인 정성은 마찬가지이다. 백두대간 산수가 내려주는 은혜와 함께 착한 사람들의 정성과 노고가 달고 향긋한 사과 덩이로 맺힌 것이기 때문이다. 흠집 난 것이라도 우리는 단순하게 사과를 먹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피와 땀이 스민 영혼의 결정체를 향유하는 것이다. 흠집 사과를 즐겁게 먹는 것은 농민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일이다.
나는 이 고장에 근무하는 동안 흠집 사과를 무수히 많이 먹었다. 사서 먹기도 했지만 얻어먹은 것도 많다. 직원이라야 고작 열 명 남짓한데 아이들을 등교시키는 아빠들이 날마다 작업 상자에 하나 가득 싣고 온다. 물론 정품을 가져오는 때도 있지만 우리는 흠집 사과가 더 마음 편했다. 두 손으로 받쳐 들어야 할 정도로 커다란 사과 덩이를 한참을 이리저리 돌려 보아야 흠집을 찾을 수 있다. 정품이나 다를 바 없다. 까치부리 자국을 도려내면 도려낸 자국에서 단물이 흘러나온다. 특유의 야릇한 향기 때문에 흠집이 있었다는 것을 금방 잊어버린다. 그까짓 것 까치부리 자국이 대수이랴 싶다. 사과 상자를 내려놓으며 까치 떼의 훼방을 헛웃음으로 하소연하고 돌아서는 안타까운 뒷모습을 떠올리며 말이다.
그때 인연으로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지금도 연풍 사과를 먹을 수 있다. 그때마다 흠집이 있어 잘 팔리지는 않지만 더 달고 향기도 더 깊은 비품을 주문한다. 까치가 더 맛있는 사과를 골라 찍은 건지 까치가 찍었기에 더 맛이 있는 건지는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 인간이나 자연이나 비록 상처가 남았다 하더라도 시련을 견디어 이겨낸 것이 더 깊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사과도 흠집이 있는 것이 더 깊은 맛을 내고, 젊은 시절 시련을 겪어 이겨낸 사람이 더 깊은 인간미가 풍기는 법이다.
성공한 사람들도 따져보면 흠집 없는 사람이 없다. 아니 흠집이 오히려 성공의 열쇠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청년교사 시절 벽지학교에서 내가 열었던 야학에서 강의록으로 공부하고 산업체 부설학교를 나와 독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심장 수술의 명의가 된 제자가 있다. 메스를 잡은 손끝에 의해 절망에서 다시 생명을 이어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생각만 해도 경이로울 뿐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가난으로 음대를 중퇴하고 야식 배달로 생계를 유지하던 젊은이의 노래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노래는 고통이라는 흠집이 예술로 승화되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교통사고로 하반신마비가 된 후에도 계속 노래 부르는 가수도 있다. 삶의 고통은 영혼에 흠집을 낸 것이 아니라 다만 삶의 길에 솟은 돌부리일 뿐이다. 흠집 있는 사과가 더 향기롭듯이 시련을 이겨낸 삶이 더 아름답고 진실해 보인다.
사과나 인생이나 흠집은 대개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그러니 탓할 일도 아니다. 아니 흠집이 오히려 더 아름답다. 젊은 날에 고통 받은 삶이나 굴곡이 있는 생애가 더 아름답고 짙은 향기가 있다. 이른 봄에 나오는 냉이도 상처가 있어야 짙은 향기가 난다. 어렵고 힘든 길을 걸어 마루에 올랐을 때 감격이 더 크다.
나는 백두대간의 야릇한 사과의 향기에 취한다. 백두대간 산기슭에서 꽃 피워 눈서리를 견디어내고 열매 맺어, 주야로 다른 기온에 얼고 녹기를 거듭하고, 까치부리에 찍혀 버림받을 고비도 넘기어 백오십 리나 달려온 사과 맛에 취한다. 너른 거실에 연풍 사과 향이 가득하다. 흠집 사과에서 배어나는 삶의 향기에 취한다.
(2016.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