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동기들의 모임은 언제나 시끌벅적하다. 그런데 그날은 더 심했다. 오랜 가뭄으로 물은 심하게 말랐지만 그래도 이름이 계곡이라 식당을 정하고 술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한 쪽에서 웃음소리가 폭발했다. 친구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여자 친구들은 다 빠지고 두어 명만 참석했는데 그 중에 화자라는 여자 친구가 그녀의 걸쭉한 입으로 일갈을 내지른 것이다.
사연을 알아보니 한 친구가 식사를 하면서 매운 청양고추를 손으로 분질러서 먹은 모양이다. 문제는 깜빡 잊고 그 손으로 소변을 보다가 잘못하여 중요한 부분을 만진 것이다. 오죽이나 쓰라렸을까? 이 친구 쓰라리면 쓰라린 대로 참고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나 쓰라렸는지 친구들 앞에 웃음이라도 주려고 그랬는지 죽상이 되어 가지고 화장실에서 나왔다고 한다. 아마도 표정을 지나치게 과장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보고 그녀의 걸쭉한 입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겠지.
"야 이 등신아, 청양고추 만진 손으로 고추를 만지면 되냐?"
"깜빡 잊었지. 쓰라려 죽겠는데 불 지르지 마라."
"등신, 이리 꺼내놔. 내가 빨아 줄게."
자초지종은 듣지 못했는데 화자는 사타구니를 움켜진 친구를 향하여 '이리 내 놔. 내 빨아 줄게.'를 연발하고 있었다. 여기 저기 폭소가 터지고 일부 친구들은 '쟤 입은 역시 구제 불능이야.' 하고 수군거렸다.
나도 잠시 어찌 저런 외설스런 말을 거침없이 내뱉을 수가 있을까 하고 찡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스치는 영상이 있었다. 허준을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환자의 종기에서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장면이었다.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연신 피고름을 빨아서 뱉어내는 의원의 모습, 그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일갈은 친구로서가 아니라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친구의 쓰라림을 걱정한 그의 진심어린 말씀이었다.
자식의 부스럼을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했던 어머니, 만인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몰아쉬면서도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도다.'라던 그리스도의 마지막 말씀 같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세상 풍파에 부딪치면서도 한 번도 세상을 원망하거나 남을 해코지하는 것을 모르며 살아온 한 친구의 외설스런 일갈에서 나는 명의나 어머니나 성자보다 더 진한 인간 사랑을 깨달았다. 외설을 넘어선 큰 사랑의 일갈을 보고 그녀의 일생을 한 마디로 뭉뚱그려 들려주는 말씀으로 들렸다. 세파에 시든 사람들의 어떤 아픔도 다 빨아내서 치유해줄 것 같은 말씀으로 들렸다.
"이리 내 놔. 내가 빨아 줄게."
(2015.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