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마지막 탄생

느림보 이방주 2013. 7. 29. 17:04

 

마지막 탄생


시험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데 영주가 인자와 함께 왔다. 인자는 치아 교정기를 감추느라 어색한 웃음이 흘러내린다. 용건은 인자에게 있는데 영주는 그냥 함께 와 준 것 같다. 웃고는 있지만 인자 얼굴이 창백하다.

 

“무슨 일?”

나는 빨리 용건만 간단히 말하라는 표정으로 인자 얼굴을 바라보았다. 쭈뼛쭈뼛 말을 하지 못한다.

“영주야 네가 대신 말해 줄래?”

그랬더니 인자가 앞으로 튀어 나온다.

“선생님 저 오늘 야자(야간 자율학습) 빼주세요.”

“왜? 무슨 일 있어?”

“어, 그게…… 저기, 너무 아파요. 죽을 지경이에요. 생리통이에요.”

“인자답지 않게 생리통 가지고 엄살이야. 그냥 공부하다가 마지막 시간에도 아프면 말해. 보내줄게.”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은 한 번도 내게 생리통을 호소한 적이 없다. 교무수첩에도 기록은 없다. 내가 무관심했나? 부끄럼이 많은 아이들은 그냥 참지만, 어떤 아이들은 한 달에 두 번도 활용한다. 여고 2학년도 다 끝나 가는데 오히려 없는 것이 얼마나 거북한 일인가? 

답답한 영주가 대신 설명했다.

“선생님, 얘는 처음이라서 보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처음이라고? 나는 놀랐다. 이런, 이런, 이런 경사가 있나? 이 녀석 그간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담임교사로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런 사정을 몰랐다니 미안하다 인자야.

“오, 그래 경사로구나. 인자야 축하해. 축하한다. 정말 축하한다. 이 녀석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니? 집에 일찍 가서 파티를 해 달라고 해라. 엄마에게 내가 말해 줄께.”

 

나는 내 딸이라도 되는 듯이 덥석 안아 주고 싶었다. 인자가 교실로 돌아간 뒤 인자 엄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축하합니다. 인자가 초경을 맞았네요. 일찍 보낼게요. 축하 잔치라도 열어 주세요.”

모두들 다 때가 되면 다 있어야 할 것은 있어야 하고, 들어가야 할 곳은 들어가고, 솟아오를 곳은 솟아올라야 한다. 이것은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고 새로운 탄생이니 다 함께 축하해 주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쓸데없는 부끄러움이 사라진다. 돌이켜 보니 내 딸아이에게 미안하고 아프게 후회된다.

 

검토하던 시험 문제에 눈길이 가지 않았다. 학교 앞 제과점에 갔다. 예쁘고 소담한 케이크를 하나 샀다. 혼례식 같은데서 쓰는 커다란 초는 없을까? 마침 붉고 큼직한 초가 눈에 띄었다. 반갑다. 돌아오는 길이 가볍다.

 

여섯 시가 되기 전에 반장을 불러 시나리오를 짰다. 반장의 아이디어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인자는 뜻밖의 잔치에 쑥스러워했지만 친구들의 축하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쁜가 보다. 케이크는 분위기에 어울리게 예쁘다. 붉고 굵직한 초를 가운데 쿡 박아 세웠다. 반장이 초에 불을 켜고 형광등을 껐다. 어둠이 깔린 교정, 불 꺼진 방, 빨간 촛불 하나가 인자만큼 예쁘다. 아가들이 다함께 노래를 불렀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인자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교실은 한바탕 꽃송이들의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노래가 끝났다. 나는 그간 쓸데없는 열등감으로 마음고생을 했을 인자를 생각해서 성가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 이 의미 있을 것 같아 아가들에게 주문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착한 아가들은 인자만 예뻐한다고 토라지는 일 없이 모두 진심으로 축하해 주어서 고마웠다. 노래가 끝나갈 무렵 인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가들은 저마다 제가 마치 어른인 양 한 마디씩 한다.

“인자야,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니?” “어른이 쉬운 줄 아니?” “용돈 타야 거기에 들어가는 것도 장난 아니다.” “스트레스 받으면 더 아파.”

그래 맞아. 어른이 된다는 것, 뭔가 남다른 것을 한다는 것, 남만큼 살아간다는 것,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어딘가 아파야 된다. 여성은 성스러운 것이야. 성스러운 사람이 되려면 그렇게 아파야 하는 거야. 맞아. 우리는 고통 속에서 한 뼘씩 성장하는 거지.

 

나는 케이크를 조금씩 떼어서 서른아홉 꽃송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스도가 대중에게 떡을 나누어 주듯……. 나는 어마어마하게 그런 과만한 흉내를 냈다. 농담처럼 아직 초경을 겪지 않은 사람은 받지 말라고 했다. 초콜릿 조각을 집어가는 아가들이 초등학생처럼 귀엽다. 모두 즐거워한다. 꽃송이다. 이런 때 이 교실은 그냥 하나의 꽃밭이다.

 

불을 밝혔던 붉고 굵직한 초는 인자에게 주었다. 어른이 되어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촛불이 세상을 밝히고 부정을 불태워 정화시키듯 인자가 살아가는 동안 흐트러지는 마음을 태워 주었으면 좋겠다. 오늘을 생각하며 마음의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남성을 만나 결혼하더라도 사랑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오늘 서른아홉 꽃송이들과 함께 밝힌 촛불이 그런 영험을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가들아 이제 인자도 또래로 대해 줘라. 인자야 너도 이제 친구들을 언니처럼 어려워하지 마라. 무거운 과제를 해결하고 여자로 다시 탄생했다. 오늘은 너의 탄생의 날이다. 얼마나 개운하니? 서른아홉 아가들 중에 마지막으로 맞이한 새로운 탄생, 나는 인자의 마지막 탄생을 깊은 마음으로 축하했다. 큰아기들이 꽃으로 피어나는 꽃밭에는 웃음꽃도 그칠 줄을 모른다.

여고생 아가들은 사소한 일에 감동한다. 생각 없이 벌인 일인데 의미가 지나치게 커졌다. 아 그렇구나. 때로 나도 내가 저지른 일에 감동한다.

 

에세이뜨락 - 마지막 탄생

기사 댓글(6)   인터넷뉴스부 webmaster@inews365.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등록일: 2013-08-11 오후 3:28:45

   
이방주 약력
청주출생, 1998년 '한국수필' 신인상충북수필문학상(2007),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내륙문학 회장 역임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수필집 '축 읽는 아이', '손맛', '여시들의 반란' 편저 '윤지경전' (주식회사 대교)

공저 '고등학교 한국어'

현재 충북고등학교 교사
시험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데 영주가 인자와 함께 왔다. 인자는 치아 교정기를 감추느라 어색한 웃음이 흘러내린다. 용건은 인자에게 있는데 영주는 그냥 함께 와 준 것 같다. 웃고는 있지만 인자 얼굴이 창백하다.
"무슨 일?"
나는 빨리 용건만 간단히 말하라는 표정으로 인자 얼굴을 바라보았다. 쭈뼛쭈뼛 말을 하지 못한다.
"영주야 네가 대신 말해 줄래?"
그랬더니 인자가 앞으로 튀어 나온다.
"선생님 저 오늘 야자(야간 자율학습) 빼주세요."
"왜? 무슨 일 있어?"
"어, 그게…… 저기, 너무 아파요. 죽을 지경이에요. 생리통이에요."
"인자답지 않게 생리통 가지고 엄살이야. 그냥 공부하다가 마지막 시간에도 아프면 말해. 보내줄게."

생각해 보니 이 녀석은 한 번도 내게 생리통을 호소한 적이 없다. 교무수첩에도 기록은 없다. 내가 무관심했나? 부끄럼이 많은 아이들은 그냥 참지만, 어떤 아이들은 한 달에 두 번도 활용한다. 여고 2학년도 다 끝나 가는데 오히려 없는 것이 얼마나 거북한 일인가?

답답한 영주가 대신 설명했다.
"선생님, 얘는 처음이라서 보내 주셔야 할 것 같아요."
처음이라고? 나는 놀랐다. 이런, 이런, 이런 경사가 있나? 이 녀석 그간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담임교사로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런 사정을 몰랐다니 미안하다 인자야.
"오, 그래 경사로구나. 인자야 축하해. 축하한다. 정말 축하한다. 이 녀석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니? 집에 일찍 가서 파티를 해 달라고 해라. 엄마에게 내가 말해 줄께."
나는 내 딸이라도 되는 듯이 덥석 안아 주고 싶었다. 인자가 교실로 돌아간 뒤 인자 엄마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축하합니다. 인자가 초경을 맞았네요. 일찍 보낼게요. 축하 잔치라도 열어 주세요."

모두들 다 때가 되면 다 있어야 할 것은 있어야 하고, 들어가야 할 곳은 들어가고, 솟아오를 곳은 솟아올라야 한다. 이것은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고 새로운 탄생이니 다 함께 축하해 주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 쓸데없는 부끄러움이 사라진다. 돌이켜 보니 내 딸아이에게 미안하고 아프게 후회된다.
 
검토하던 시험 문제에 눈길이 가지 않았다. 학교 앞 제과점에 갔다. 예쁘고 소담한 케이크를 하나 샀다. 혼례식 같은데서 쓰는 커다란 초는 없을까? 마침 붉고 큼직한 초가 눈에 띄었다. 반갑다. 돌아오는 길이 가볍다.

여섯 시가 되기 전에 반장을 불러 시나리오를 짰다. 반장의 아이디어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인자는 뜻밖의 잔치에 쑥스러워했지만 친구들의 축하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쁜가 보다. 케이크는 분위기에 어울리게 예쁘다. 붉고 굵직한 초를 가운데 쿡 박아 세웠다. 반장이 초에 불을 켜고 형광등을 껐다. 어둠이 깔린 교정, 불 꺼진 방, 빨간 촛불 하나가 인자만큼 예쁘다. 아가들이 다함께 노래를 불렀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인자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교실은 한바탕 꽃송이들의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노래가 끝났다. 나는 그간 쓸데없는 열등감으로 마음고생을 했을 인자를 생각해서 성가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난 사람'이 의미 있을 것 같아 아가들에게 주문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착한 아가들은 인자만 예뻐한다고 토라지는 일 없이 모두 진심으로 축하해 주어서 고마웠다. 노래가 끝나갈 무렵 인자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가들은 저마다 제가 마치 어른인 양 한 마디씩 한다.
"인자야,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니?" "어른이 쉬운 줄 아니?" "용돈 타야 거기에 들어가는 것도 장난 아니다." "스트레스 받으면 더 아파."
그래 맞아. 어른이 된다는 것, 뭔가 남다른 것을 한다는 것, 남만큼 살아간다는 것,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어딘가 아파야 된다. 여성은 성스러운 것이야. 성스러운 사람이 되려면 그렇게 아파야 하는 거야. 맞아. 우리는 고통 속에서 한 뼘씩 성장하는 거지.

나는 케이크를 조금씩 떼어서 서른아홉 꽃송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스도가 대중에게 떡을 나누어 주듯……. 나는 어마어마하게 그런 과만한 흉내를 냈다. 농담처럼 아직 초경을 겪지 않은 사람은 받지 말라고 했다. 초콜릿 조각을 집어가는 아가들이 초등학생처럼 귀엽다. 모두 즐거워한다. 꽃송이다. 이런 때 이 교실은 그냥 하나의 꽃밭이다.

불을 밝혔던 붉고 굵직한 초는 인자에게 주었다. 어른이 되어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촛불이 세상을 밝히고 부정을 불태워 정화시키듯 인자가 살아가는 동안 흐트러지는 마음을 태워 주었으면 좋겠다. 오늘을 생각하며 마음의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떤 남성을 만나 결혼하더라도 사랑 받으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오늘 서른아홉 꽃송이들과 함께 밝힌 촛불이 그런 영험을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가들아 이제 인자도 또래로 대해 줘라. 인자야 너도 이제 친구들을 언니처럼 어려워하지 마라. 무거운 과제를 해결하고 여자로 다시 탄생했다. 오늘은 너의 탄생의 날이다. 얼마나 개운하니? 서른아홉 아가들 중에 마지막으로 맞이한 새로운 탄생, 나는 인자의 마지막 탄생을 깊은 마음으로 축하했다. 큰아기들이 꽃으로 피어나는 꽃밭에는 웃음꽃도 그칠 줄을 모른다.
여고생 아가들은 사소한 일에 감동한다. 생각 없이 벌인 일인데 의미가 지나치게 커졌다. 아 그렇구나. 때로 나도 내가 저지른 일에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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