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서리와 햇살(교단)

오백 원짜리 화해

느림보 이방주 2013. 5. 1. 06:58

 

오백 원짜리 화해



1학기 보충수업이 끝났다. 며칠간은 0교시 수업이 없다. 아가들이나 우자愚子나 다 홀가분하다. 8시 50분 쯤 조회를 하러 들어갔다. 이야기할 것이 참 많다.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 설문 조사도 해야 하고, 2학년인 아가들에게 3학년 교육과정도 일러 주어야 한다. 설문조사는 어제 설문지를 내 주었기 때문에 걷어 오기만 하면 된다. 3학년 교육과정을 미리 알려 주는 이유는 2학기를 위한 학습 계획에 필요할 것 같아서이다.

먼저 설문지를 걷었다. 아가들이 뒤에서부터 죽 걷어 왔다. 세어 보았다. 서른일곱 장이다. 이런! 열두 명이나 안냈다. 기말고사가 끝난 후 아가들의 생활이 왜 이렇게 태만해졌을까? 순간, 아가들이 아가들로 생각되지 않았다. 속이 뒤틀렸다. 다시 세어 보았다. 마찬가지이다.

“안 낸 사람 일어서 봐.  왜 이렇게 안 낸 사람이 많지?”

“…….”

두 사람이 일어섰다.

우자愚子의 일그러진 얼굴을 봐서인지 착한 아가들 얼굴이 완전히 똥색이다. 그런데 나머지 열 명이 안 일어선다.

“얘들아, 열 명은 왜 안 일어서는 거야?”

“…….”

“얘들아, 뭐 대단한 거라고 거짓말을 하니? 없으면 다시 써 내면 되잖아? 일어서.”

나는 아가들의 이미지를 위하여 애걸하다시피 했다. 그래도 안 일어선다. 큰일이다. 이 아가들이 지금 큰일을 저지르고 있다. 이건 나에게도 나도 짐이다.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어떻게 끝내야 하나? 이 정도를 가지고 벌을 준다면 정말 좀생이 중에 좀생이가 된다. 안 일어선다. 하긴 일어설 사람이 없다. 우자愚子는 점점 진짜 화가 났다. 우리 2학년 2반 아가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정말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얘들아, 운동장으로 나갈까? 정말 순수하고 맑고 깨끗한 우리 학급이 왜 이렇지?”

나는 울고 싶었다. 아가들에게 이렇게 화가 나 본 적도 없다. 아가들이 몇몇이 저희들끼리도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친구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중에 제일 올곧고 결 바른 정자貞子가 호소한다.

“야 얘들아, 정말 너무하다, 뭐 이러니? 빨리 일어나자.”

그 때 정말 다시 한 번 세어 보자. 나는 세면서 내가 잘못 센 것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맞는다. 서른일곱 장, 열두 장이 모자란다. 열 명이 안 일어난 것이다.

“이거 봐. 맞잖아. 열두 장 없잖아.”

반장인 현자賢子가 묻는다.

“선생님 몇 장이예요?”

“서른일곱 장”

“그럼 맞잖아요. 둘 더하면 서른아홉 장.”

아뿔싸, 맞아! 우리 반 아가들이 서른아홉 명이지. 이런 이걸 어쩐다? 나는 꼭 마흔 아홉 명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맞아! 맞아. 내가 마지막으로 담임을 맡았던 15년 전엔 마흔아홉 명이었지. 이런, 이걸 어떻게 수습한다?

“그러네. 맞네.”

이런 낭패. 나는 얼버무리고 서둘러 교육과정을 설명하고 쫓기듯 연구실로 돌아왔다. 뒤가 따갑다. 15년 전에 학급담임을 맡은 이래 이런저런 보직 때문에 학급 업무와는 멀어졌다. 오랜만에 예쁜 여고 2학년 아가들의 담임교사가 되고 보니 실수 연발이다.

“아, 뭐예요. 선생님 뭐예요 정말”

아, 치매인가? 이런 착각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착한 아가들이 나를 속이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가들을 나쁘게 보는 것은 항상 어른들이다.

2교시에 국어다. 부반장 명자明子를 조용히 불러 아이스크림을 사오라 했다.

“선생님 왜요?”

짓궂은 명자明子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내가 어처구니없이 화를 냈잖아. 이걸로 그냥 너희가 잊어줄 수 있지?”

“애들한테 얘기할까요? 깜짝 놀이로 할까요?”

“말하지 말고…….”

“그럼 깜짝 놀이로 할게요.”

기특한 명자明子는 우자愚子의 주머니 사정을 아는지 아주 싸고 큰 놈으로 사왔다. 그리고 거금 일만 원을 되돌려 준다. 1인당 일금 오백 원으로 무난히 해결은 된 것 같다. 이른바 오백 원짜리 화해이다.

그러나 곰도 동굴 안에서 불견일광不見日光하면서 마늘과 쑥만 먹어야 사람이 되는데, 이렇게 단 것을 먹여 순수한 아가들을 의심한 나의 죄나 덮으려 하니 언제 수성獸性을 벗기고 인성人性을 기르겠는가? 그러나 걱정 없다. 이 아가들에게 인성교육은 필요 없다. 원래부터 인성을 지니고 났으니까.

(2010.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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