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국어생활이란 과목이 있었다. 단위어, 호칭어, 지칭어, 우리말 로마자 표기법, 외국어 한글 표기법 같은 생활 속에서 국어 사용법을 가르치는 교과목이다.
막 단위어를 배우고 난 다음이다. 자율학습 지도를 위해서 저녁 식사를 하고 조금 늦게 학교에 들어갔다. 딱 한잔이지만 소주도 마셨기에 부정한 냄새를 기막히게 알아맞히는 여고 2학년 큰아기들의 지순한 후각이 두려워 밖에서 훔쳐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칠판에 자율학습 참여 상황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재적 : 서른아홉 마리
학원 수강 : 일곱 마리
질병 조퇴 : 한 마리
기타 : 두 마리
현재 : 스물아홉 마리
어느 장난기 심한 큰아기의 진한 사랑을 담은 재치이다.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 고쳐 썼다.
재적 : 서른아홉 송이
학원 수강 : 일곱 송이
질병 조퇴 : 한 송이
기타 : 두 송이
현재 : 스물아홉 송이
나에게 너희는 벌레가 아니라 모두가 꽃송이다. 벌레를 세는 단위와 꽃을 세는 단위는 다르다. 아가들의 가슴에 작은 돌을 던지니 여린 물결이 해일이 되어 꽃밭에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