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아포리즘 수필

내가 쓰는 수필은

느림보 이방주 2013. 4. 17. 14:27

시로 출발하여 문학이 이루어졌다면 그 완성은 수필로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태초에 마음을 의지할 데 없었던 민중이 신에게 드리는 소망의 언어가 시문학이다. 시는 두려움과 욕망의 해소를 원하는 일방적인 소망의 말씀이란 말이다. 

 

 수필은 인간이 철학을 배운 이후에 잔바람에 물결처럼 일어난 문학이다. 수필은 작가에게만 보이는 의미 있는 세계의 모습을 지성의 언어로 전달한다. 전달의 대상도 신이 아닌 인간이다. 

 

수필의 언어는 시의 언어와 다르다. 시는 정서와 의미를 전달하려 하지만 수필은 의미와 가치를 전달하고자 한다. 시의 언어는 주관적인 정의이기에 고도의 함축성을 지니지만, 수필은 인간과 인간의 속삭임이기에 따뜻하다.  또 현장감이 중요한 소설의 언어와 달리 수필의 언어는 아름답고 지성적이어야 한다. 수필의 언어는 천박하거나 비방이 담겨서는 안 된다. 소설가가 쓴 줄글은 산문이지 수필문학은 아니다. 지성의 언어만이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을 품위 있게 전달할 수 있다. 수필가의 독특한 세계 인식도 중요하지만 개성 있는 언어표현도 소중하다.

 

 나는 수필을 통하여 내가 체험한 아름다운 세계를 아름다운 언어로 다른 이들에게 선물하고 싶다. 내가 사는 가치와 의미가 어떤 세계에 살아 있는지 말하고 싶다. 감동이 있으면 좋고 비판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 그건 나의 생각일 뿐이다.

 

 세계의 가치와 의미를 제대로 선물하려고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길가의 풀꽃과도 대화를 나누고 흐르는 계곡의 맑은 물과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다. 냇가의 잔돌에서 그의 생명을 발견하려 애쓴다. 지금은 없어진 아니 잘 쓰이지 않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 쓰는 지혜도 있어야 한다. 숨어 있는 말을 찾으려 두메 노인들과 대화를 나눈다. 

 

 사람들은 좀 더 가치 있는 삶을 인간의 언어로 배우기를 원한다. 현대시는 정서와 의미를 신이 아닌 인간에게 호소하고 있다. 시에서도 가치를 찾으려 애쓰는 눈치이다. 수필의 본질은 인간과 인간의 대화이기에 언젠가 모든 문학은 수필로 수렴될 것이다. 나는 수필가로서 자부심을 갖는다. 자부심을 갖는 만큼 수필문학을 위해 살 것이다.

(2013.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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