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잊을 수 없는 맛 5 - 정방사에서 떡국 공양-

느림보 이방주 2012. 11. 13. 12:56

 잊을 수 없는 맛 5  - 정방사에서 떡국 공양- 

설을 맞은 산사의 햇살이 따스하다. 법당 부처님께 세배를 드리고 청풍호 경관을 조망하는데 공양주보살님이 따라온다. 떡국 공양을 하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얇은 나는 기름기 없는 떡국에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가 대뜸 감사히 먹겠다고 했다. 곧 대학을 졸업할 아들과 함께 세 식구는 볕이 고운 마루의 작은 소반에 둘러앉았다. 공양주보살님을 따라간 아내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을 내왔다.

 

 떡국에는 만두도 쇠고기 꾸미도 계란 지단도 없었다. 가늘고 길게 썬 김과 목이인지 석이인지 고명으로 까맣게 얹히었다. 간장은 노란 골파 양념도 없이 맑은 그대로였다. 찬이라고는 배추김치 한 보시기가 전부였다. 큰댁에서 설날 차례를 올리고 기름진 안주로 음복주까지 했으니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 국물 맛을 보았다. 깨끗하고 담백하다. 기름이 고소한 냄새로 유혹하지 않으니 흰떡 맛이 살아있다. 입에 넣고 씹어 보았다. 국물은 깔끔하고 떡첨은 쫄깃하다. 처음에는 구수하다가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 고기를 넣지 않고 어떻게 이런 맛을 낼 수 있을까?

 

 공양주보살님은 옆에 앉아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아내가 육수 내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중요한 재료는 표고라고 했다. 고기는 물론이고 멸치 맛도 황태 맛도 나지 않았다. 특히 절에서 쑤어 띄운 메주로 담근 간장을 썼다고 했다. 아내는 공양주보살님의 육수 내는 법 강의에 관심이 있었지만, 우리 부자는 떡국 맛에 더 빠져 있었다.

 

 원주에서 청주 집으로 오려면 영동고속도로를 경유하여 호법에서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서야 하는데, 중앙고속도로로 잘못 진입한 것이다. 내친김에 금수산 정방사에 들렀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정방사는 뒤로는 비단 같은 금수산을 진산으로 삼고, 남으로는 유리처럼 빛나는 청풍호반을 내려다보고 있다. 깎아지른 바위벽에 제비집처럼 간신히 붙여 절집을 지었다. 뒤안에는 엄청난 암벽이 금방이라도 절집을 덮어쓸 듯 달려든다. 무시무시한 바위벽 아래에서는 부처님 은혜처럼 감로수가 솟아난다. 법당 본존불인 관세음보살은 청풍호반의 맑은 물빛과 멀리 월악산 영봉까지 품안에 품고, 중생의 고통을 들으려는 듯 단아한 모습으로 앉았다.

 

기름진 음식은 마음을 타락시키고 교만하게 한다. 먹을수록 샘솟듯 탐욕이 일어난다. 새해를 맞아 한 끼라도 깨끗한 음식으로 마음에 공양하니 몸까지 때를 벗는 기분이었다. 법당에 하산 삼배를 드리고 나오니 봄 햇살이 관음보살 손길로 오셔서 온몸을 감싸주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맑은 기운으로 감돌던 그날의 감동은 잔잔하게 남아 있다.

(2012.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