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잊을 수 없는 맛 4 - 죽은 닭의 비밀

느림보 이방주 2012. 11. 7. 15:48

잊을 수 없는 맛 4

- 죽은 닭의 비밀 -

 

누나가 부른다.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지은 죄가 있어 못들은 척하고 숨바꼭질에 열중했다. 아주 꼭꼭 숨어버리고 싶었다. 예쁘던 누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담 너머로 보이는 누나는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으리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쪽문을 겨우 지나 마당으로 들어섰다. 부릅뜬 눈이 두려웠는데 짐짓 그러는 것 같아 보였다. 부엌으로 따라 들어갔다. 누나는 노란 냄비를 소반에 받쳐 들고 뒤꼍으로 갔다.

 장독대 뒤로 돌아갔다. 누나가 내 앞에 내려놓은 것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볶음탕이었다.

 

 “네가 죽였으니까 네가 책임져야지. 뼈 한 조각도 남기지 말고 다 치워야 한다. 안 그러면 엄마하고 할머니한테 이 누나까지 혼나니까.”

혼나는 것은 나중에 닥칠 일이고 우선 냄새가 황홀하다. 고추장물은 뒤집어쓴 감자가 발그레하다. 닭다리에 붉고 투명한 기름방울이 맺혀 있다. 내가 좋아하는 똥집은 아껴가면서 조금씩 떼어 먹었다. 그 쫄깃한 맛, 오돌오돌한 식감, 이 맛을 눈치 볼 것도 없이 혼자서 편안하게 먹을 수 있다. 꿈만 같다. 무슨 복에 한자리에서 닭다리를 두 개나 먹으랴. 연하고 부드럽다. 누나가 찬밥 한 공기를 갖다 주었다. 나는 감자 한 조각까지, 뼈다귀에 붙은 살 한 점까지 다 먹고 국물에 밥을 비벼 깨끗하게 먹어 치웠다. 흡족하다. 눈이 툭 튀어 나오는 기분이다.

 

  정말 내가 저지른 일이었다. 가을을 맞은 약병아리가 털갈이를 할 때는 온몸이 드러나도록 털이 빠진다. 보기에도 징그럽다. 게다가 날이 갑자기 추워지면 온몸이 빨갛게 얼어서 보기에도 안쓰럽다. 그렇게 털이 홀랑 다 빠진 닭 한 마리가 뜰에 넣어 놓은 참깨를 찍어 먹었다. 쪼기만 하는 게 아니라 헤집기까지 했다. '훠이' 하고 쫓아 보았으나 막무가내이다. 들은 척 만 척 고개만 갸우뚱거리는 그 놈이 얄미워 털 빠진 몸뚱이를 덥석 잡았다. 도망가지도 않는다. 나는 그대로 한길도 넘는 마당으로 ‘휙’ 날렸다. 날리는 순간에 '아차' 했다. 깃털이 다 빠졌으니 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날개를 잃은 닭은 내던진 것처럼 마당에 '툭' 떨어져 두 다리를 한두 번 버르적거리더니 모가지를 쭉 늘이고 죽어버렸다. '이걸 어쩐다지?' 꾸중하시는 할머니 모습이 검은 구름처럼 엄습했다. 나는 안 그런 척 시치미를 떼고 아이들의 숨바꼭질에 어울렸다. 몇 번이나 집 쪽을 돌아보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열 살이나 위인 누나가 공범이 되어 재빨리 닭볶음탕을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냥 흔적도 없이 먹어버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닭볶음탕 한 냄비를 뚝딱 비우고 입에 비누칠해서 싹싹 닦은 다음 줄행랑을 쳤다. 어머니께도 할머니께도 닭은 족제비가 물어간 것이 되었고, 닭볶음탕은 누나와 나만의 영원한 비밀이 되었다. 아득하게 세월은 흘렀지만 열네 살 개구쟁이 시절, 숨어서 먹던 그 비밀의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2012. 1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