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포 홍어 정식
자유인으로 돌아간 친구들이 영산포에 가자고 했다. 가고 싶었다. 일탈의 소망은 염치도 없이 이 나이에도 절실하다. 아직 젊음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곁길로 발을 내딛기로 하고 영산포 홍어 맛을 꿈꾸며 콧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조용한 영산강 강둑을 거닐었다. 강물은 흐르는지 괴어있는지 하늘처럼 고요하다. '포구' 라면 왁자하고 시끄러운 거래가 있을 법한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마른 갈대꽃에 묻어나는 바람만 스산하다. 포구에 전국에서 유일하다는 등대는 불이 꺼진 채 유적이 되어 흥청거리던 옛날 얘기 한 마디도 없이 조용하다. 우리는 강둑에서 황포 돛대가 있는 나루로 내려갔다. 배는 이미 배가 아니라 요릿집이 되어 있었다. 따사로운 볕도 강바람에 차갑다.
둑을 따라 자전거 도로가 시원하다. 내려다보이는 골목마다 홍어 간판을 달고 외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바람을 피하여 최 선생의 단골이라는 '영산포 홍어'라는 홍어집으로 들어갔다. 홍어정식을 주문했다. 전라도 소주와 홍어회가 나왔다. 몇 점 되지도 않은 홍어회 한 접시만 가져와서 처음에는 실망스러웠다. 뒤따라 나온 것은 홍어애라는데 그것도 단 세 점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처음 보는 음식이라 망설였다. 그러다가 남이 하듯 한 점 집어 초장에 간을 맞추어 입어 넣어 보았다. 차갑다. 뭉클하며 씹힌다. 그런데 이에 묻어나지도 않으면서 시원하고 고소한 맛이 특이하다. 마치 동태찌개에 들어간 내장 맛 같았다. 아니 그 보다 더 고소하고 더 진하고 더 담백하다.
우리는 소주를 한 잔씩 마시고 따끈한 국물을 기다렸다. 그 때 매생이홍어탕이 나왔다. 말이 필요 없다. 향긋하고 상큼하다. 몸이 확 풀린다. 홍어껍질족편은 모양은 소머리편육 같고 맛은 그보다 비릿하면서도 고소하다. 촉감은 없어도 맛으로 오돌오돌함을 느낄 수 있다. 삼합이 나왔다. 홍어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반갑다. 한 점 집어 김 위에 다시마를 놓고 마늘과 풋고추를 곁들여 곱게 싸서 입에 넣었다. 깨무는 순간 구리한 냄새인지 맛인지 목구멍 쪽에서 콧구멍을 '훅'하고 찔렀다. 홍어찜은 홍어 날개를 콩나물에 버무려 양념고추장을 넣어 찜을 했다. 서너 개의 송곳이 한꺼번에 코를 찌르는 것 같다. 갈수록 더 강하다. 다음에는 홍어무침이 놀란 콧구멍을 달래 준다. 홍어무침에 섞여 있는 미나리나 양파 마늘종을 골라 먹으며 아픔을 달랬다.
홍어를 먹으며 갑자기 '후훅' 웃음이 터졌다. 불온 선생이 "왜 그랴? 형" 하고 물었다. 최근 어떤 정치인이 국민을 홍어에 비유한 말을 되새기며 잘못 발효된 품격에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길고 가시가 있어 작업에 방해되므로 잡자마자 잘라버려야 한다고 주인이 말해줘서 대접 받지 못하게 된 유래를 알게 되었다. 최 선생이 홍어 중에 제일로 치는 것은 '홍어 코'라고 말머리를 돌렸다. 홍어 코 맛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나려 하는데 홍어볶음이 나왔다. 양파랑 피망을 넣어 단순하게 볶았다. 찌르는 강도가 더 거세다. 소주로 입가심을 했다. 소주 맛이 달게 살아난다. 가슴이 후끈한다. 우리의 대화도 따라서 후끈 후끈 달아오른다.
시장기가 가시어 이제 끝이려니 했는데 홍어전이 나왔다. 저민 홍탁을 한입에 쏙 들어가도록 동글동글하게 만들어 팬에 부침으로 구워냈다. 이건 무슨 맛일까? 내게 돌아올 것은 단 한 점이다. 따끈한 홍어전을 입에 넣고 질끈 씹는 순간, 이건 송곳이 아니다. 드릴을 가지고 목구멍 저 아래부터 코를 향하여 우두두 뚫어 올리는 느낌이다. 느낌이 아니라 충격이다. 정신이 몽롱해진다. 한 번 더 깨물어 보았다. 송곳 여러 개를 한꺼번에 묶어 빠르게 찌르는 것 같다. 주인 남자가 마지막이라며 홍어튀김을 내왔다. 코를 막고 먹으라고 했다. 뭐 어떠랴 하고 입에 넣고 깨무니 바삭하는 충격과 동시에 '허억'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충격을 견딜 수 없어 꿀꺽 삼키니 영산강 매운바람이 콧구멍으로 몰려든다. 겨울바람이 찢어진 창호지 구멍으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몰아치는 느낌이다. 그러나 끝맛은 부드럽다.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자애로운 어머니 손길 같다. 홍어맛의 진수이고 홍어정식의 절정이다. 염치도 없이 한 접시 더 청해 콧구멍에 매운바람을 불어넣었다. 홍어는 잘 삭혀야 맛이 나고, 불에 익혀 뜨거울수록 매운 자극은 거세지는 원리를 발견한다.
열 서너 가지나 되는 홍어 요리를 차례로 맛보고 나서 이제 그만이려니 생각하면서 맛을 정리하려고 할 때, 맛을 아는 최 선생이 "홍어 코는 맛볼 수 없나요?"하고 기어이 입을 열었다. 주인이 지금은 없다고 한다. 주방에 있던 안주인이 밖으로 휭하니 나가더니 홍어코를 구해 왔다. 접시에 담겨 나온 홍어 코는 그야말로 홍어 코딱지 크기만한 것 세 첨이었다. 왜 차가울까? 아이스크림 끝맛처럼 달큰하고, 어린 날 몰래 먹던 쫀드기 사탕처럼 쫄깃하고, 박하 넣은 껌을 씹는 것만큼 입안이 화해지는 느낌이다. 씹을수록 새물처럼 차가운 맛이 솟아나서 목구멍으로 넘기기가 아깝다. 세 사람은 홍어코를 씹으며 '크윽'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정계에서 말하는 홍어좆보다는 우리가 좋아하는 홍어 코가 제대로 삭았는지 맛이더 진실하다. 숙성한 음식은 철학자의 명언처럼 단순하고 명료하다. 시인의 비유처럼 은은하고 감미롭다.
우리가 홍어코를 잘근잘근 씹고 있을 때 밥 한 사발과 홍어애국이 들어 왔다. 홍어애국으로 최후의 맛을 정리하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최 선생은 묵묵히 운전에 전념하고, 불온 선생은 홍어 맛에 취해 둥둥 떠 있다. 우리 밥상에는 민족의 정서와 삶의 철학이 은은하게 배어 있다. 우리는 잘 삭아서 열에 익을수록 구리하고 매운 맛이 강해지고, 구리할수록 더 진실해지는 삶의 참맛에 잔뜩 취해 버렸다. 나주평야를 수놓는 저녁놀을 바라보며 잘 삭아서 홍어전만큼 맵고 깊으며, 홍어 코만큼 단순하고 질긴 우정을 깨닫는 기쁨을 누렸다. 그때마다 법열처럼 다가오는 쾌감은 그 깊이도 넓이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201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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