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농다리와 초평저수지
2012년 7월 28일
진천 농교
1976년 12월 20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되었다.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을 흐르는 세금천에 놓인 다리로 '농다리'라고도 한다. 100m가 넘는 길이였다고 하나 지금은 길이 93.6m, 너비 3.6m, 두께 1.2m, 교각 사이의 폭 80㎝ 정도이다. 30㎝×40㎝ 크기의 사력암질 자석(紫石)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만들었으나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그 특징은 교각의 모양과 축조 방법에 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채우는 석회물의 보충 없이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원래는 28수를 응용하여 28칸의 교각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양쪽 2칸씩이 줄어 24칸만 남아 있다. 그 위에 길이 170㎝, 내외 넓이 80㎝, 두께 20㎝ 정도의 장대석 1개나 길이 130㎝, 넓이 60㎝, 두께 16㎝ 정도의 장대석 2개를 나란히 얹어 만들었다.
교각에서 수면까지 76㎝, 수면에서 하상까지 76㎝로 옛날에는 하상이 낮아 어른이 서서 다리 밑을 지날 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복개로 하상이 높아졌다. 작은 낙석으로 다리를 쌓은 방법이나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축조한 기술이 전국적으로 유례가 없으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에 속한다.
교각의 폭은 대체로 4m 내지 6m 범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폭과 두께가 상단으로 올수록 좁아지고 있어 물의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배려가 살펴진다. 비슷한 예가 없는 특수한 구조물로 장마에도 유실되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상판석의 돌은 특별히 선별하여 아름다운 무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내와 함께 농다리를 가기로 했다. 농다리는 여러번 가보았지만 주변에 농암정과 인공폭포를 만들고 초평저수지 호숫가에 둘레길을 조성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보기로 했다. 날씨는 34,5도를 오르내리는 더위로 푹 고아내는 듯하다. 아내가 연변에서 사온 황태로 찜을 해 놓고 혼자 먹기를 섭섭해했다. 아내가 아들 내외에게 맛보이고 싶어 했다. 8시 50분쯤 집에서 출발했다. 어쩐지 운전이 하기 싫어서 아내 차로 출발했다. 아이들 아파트에 들러 며느리 얼굴을 보고 황태찜을 전했다. 며느리는 직접 커피콩을 갈아 만든 커피를 준비했다가 주었다.
길을 잘 알고 있지만 네비에 농다리라고 입력하니까 듣지 않는다. 대개 그냥 농다리로 불리는데 지도상의 이름은 진천 농교였다. 그래서 진천 농교(진천국문백면 구곡리)로 입력하니까 검색이 가능했다. 하상도로는 너무 더운 날씨 때문인지 한산하다. 진천으로 가는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리다가 오창에서 다리를 건너 바로 문백 농공단지로 들어가는 구도로로 내려갔다. 농공단지를 지나 모롱이를 돌면 자동차 전용도로 고가도로 아래 바로 야영장으로 들어가는 길로 우회전하게 되어 있다. 지금은 외국어교육원, 청명 교육원으로 바뀐 야영장 앞을 지나 고개를 넘어 서니까 어느새 골프장이 들어 섰다. 고요한 마을 앞에 고급 승용차가 드나들 것이다. 또 하나 고개를 넘어 서면 바로 구곡리이다. 구곡리는 상산임씨들의 세거지이다. 옛 양반의 고장답게 공적비, 사적비, 효열비가 즐비하다. 마을 앞 새로 생긴 주차장 주변에 있는 정자나무 아래에 노인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우리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진입로를 걸었다. 고속도로 아래 굴을 지나면서 돌아보니 구곡리 마을의 모습이 아름답다. 동남쪽을 향한 마을은 나즈막한 산기슭에 보기좋게 조성되었다. 마을을 두 팔로 안고 있는 산줄기 양 날개를 도로가 자르고 지나간 것이 아쉽다. 임씨들이 왜 그것을 막지 않았을까? 도로는 얼마든지 돌아서 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도 진천에서는 내로라하는 집안이다.
• [정의]
• 임팔급을 도시조로 하고, 임희를 중시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성씨.
• [연원]
• 범임씨(汎林氏)의 도시조는 당(唐)나라 문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임팔급(林八及)으로,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신라로 건너와 팽성(彭城)의 용주방(龍珠坊)[지금의 평택 용포리]에 정착하면서 본관을 평택으로 삼게 되었다. 평택임씨는 후대에 와서 선산(善山)·진천(鎭川)·예천(醴泉)·부안(扶安)·울진(蔚珍)·은진(恩津)·순창(淳昌)·경주(慶州)·옥야(沃野) 등 25개 관향으로 분관되었다. 상산임씨(常山林氏)의 중시조는 임희(林曦)이다. 임희는 고려 제2대 임금인 혜종의 비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아버지로서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진 것을 연유로 평택임씨에서 분적, 본관을 상산으로 삼았다고 한다. 상산은 진천의 옛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구명(舊名)을 그대로 이어내리는 후손들이 있어 본관을 진천과 상산으로 함께 일컫는다. 그러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고려 고종 때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된 임연(林衍)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1세조 임연과 아들 임유무(林惟茂) 부자는 상산임씨를 대표하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항몽사(抗蒙史)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이후의 자손으로 임유무의 아들 임간(林侃), 임희정(林希正), 상산군(常山君)에 봉해진 임지(林智) 등을 배출하여 명문거족으로 이름났다. 조선시대에는 삭녕군수와 홍주목사를 지내고, 충효를 겸전한 인물이라고 칭송된 임수경(林秀卿)이 있다.상산임씨 중에는 효자가 많다. 임유원(林有元)·임을엽(林乙葉)·임경석(林慶錫)·임광언(林光彦)·임광윤(林光潤)·임정석(林鼎錫)·임경언(林慶彦), 임광언의 아들 임호철(林昊喆)과 임우철(林禹喆), 임우철의 손자 임정수(林正洙)가 효자로 이름났다.
• [입향경위]
• 고려 초기 중시조 임희가 상산백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들이 진천군에 입향하였으며, 이후 1000여 년간 진천을 본관으로 하는 유력 성씨로 자리하였다.
• [현황]
• 20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진천군 관내에 거주하는 상산임씨는 209가구 527명으로 나타났다.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구산마을을 중심으로 300여 호가 세거하고 있으며, 문백면 평산리 통산마을과 안능마을에도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관련유적]
•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 동호지(東湖址)가 있는데, 그곳은 고려시대 임연 장군의 집터였다. 본래 조그마한 웅덩이였던 것을 약 70년 전에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크게 팠다. 또한 문백면 구곡리 앞 세금천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28호인 진천농교가 보존되어 있으며, 마을에는 임희·임연·임구 등 3위를 모시고 있는 장렬사와 임수전 부자 충신문(林秀荃父子忠臣門)이 자리하고 있다.
백곡천(세금천) 물이 불어 있다. 물은 그다지 맑지 못했다. 농다리는 지금도 보수공사를 하는지 커다란 굴삭기가 물에 들어가 있었다. 넓은 비포장 주차장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서너 대쯤 서 있다. 차량을 가지고 들어와 장사하는 이들도 이제 막 장사를 시작하려는 중이었다. 일찍 산에 갔었는지 중년을 넘은 부부들이 농다리를 건너 오고 있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다리를 건너가며 흐르는 물도 보았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어떻게 이렇게 돌다리를 놓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다리가 천년을 넘어 오늘날까지 유지된 것도 신비스러운 일이다. 이제 백곡에서 진천을 거쳐 내려오는 물은 맑지 못하다. 아니 온갖 더러운 것을 씻어 내려온다. 주변을 개발하고 냇물을 형태를 자연 그대로 두지 않기 때문에 물이 한번 나면 다리가 보수해야 할 상태가 되어 버린다. 당시에는 어떻게 무너지지 않았을까? 농다리(籠橋)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대나무로 얽듯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일까?
다리를 건너면서 바라보니 인공폭포에 아직 물이 내려오지 않는다. 물이 내려오지 않으니 흉물이 되어 있다. 그런데 다리를 막 건너 정자 위로 오르려니 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다리 건너편도 말끔히 정비되고 나무다리를 놓아 주변이 훼손되지 않게 했다. 나무를 심고 꽃을 심어 보기 좋다. 화장실도 고급으로 만들었다. 중간 중간에 쉴 자리와 전망대를 만들어 놓아 사진을 찍거나 앉아서 물을 마시기 좋다. 특히 깨끗해서 좋다.
상산임씨 세거지인 구곡리 전경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 쉼터 -구산동이라는 상산임씨 세거지비가 보인다
주차장에 있는 농다리 유래비
중부고속도로 아래 굴길을 향하여 가는 길
농다리- 굴삭기가 흉물스럽다
농다리에서 -노랑바지 여인
잘 정비된 농다리 건너편 산- 너머가 바로 초평저수지이다
공원으로 꾸며진 둘레길 입구
전망대와 쉼터
깨끗하고 귀여운 화장실-이정표가 보인다
주차장과 고속도로가 보인다
농암정으로 오르는 오솔길
농암정으로 오르는 길은 약간 가파르다. 그러나 나무 계단을 만들어 놓아서 힘은 들지 않았다. 힘들어 봐야 5분 내지 10분이다. 날이 더워서 땀이 흘러 온몸을 적셨다. 연신 물을 마셔도 목이 탔다. 정자 위에는 노인들이 앉아서 땀을 식히고 있었다. 여기서 농다리와 초평 저수지가 다 보였다. 진천고 카누 선수들이 강화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선수들이 일렬 횡대로 서서 출발하는 모습과 지도교사가 보트를 타고 지시하는 모습이 보인다. 메가폰으로 출발을 지시하고 호르라기 소리가 들린다. 카누협회 이사인 서경덕 선생의 목소리가 바로 발밑에서 들리는 듯했다. 쉬는 날도 쉬지 못하는 것이 지도자이다. 그 중에 선생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된다.
초평 저수지는 카누선수들의 합숙소가 있는 곳에서 구댐이 있던 이곳까지 거의 1Km 정도가 직선이고 양쪽이 산으로 싸여 있어서 바람의 방해를 받지 앉고 연습할 수 있는 천혜의 조정 연습장이다. 구댐이 있는 곳에서 한 번 구부러져 현재 댐이 있는 곳으로 배를 저어가는 모습이 그림이다. 아내는 신기한 듯이 바라본다. 농암정 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내려오기 싫었다. 왜 농암정일까? 그런 사연을 적어 놓은 곳이 없다. 농암(聾巖)일까? 농암(籠巖)일까? 농다리에서 연유되었다면 아마 후자일 것이다.
농암정에 오르면서 바라본 농다리- 마치 지네가 기어가는 모습이다
농암정에 오르면서 바라본 농다리-주차장 주변이 황량하다
농암정 계단길에서
농암정에 오르면서-계단으로 가세요
농다리 상류쪽 진천 덕문이들-둘레길이 보인다
초평저수지-카누 연습하는 모습
카누 - 출발 준비
농암정에서
농암정을 뒤로하고 오솔길을 걸었다. 산 능선을 따라 오솔길이 있다. 출렁다리를 가는 길이란 이정표를 따라 가면 된다. 오솔길에 들어서자 바로 그늘이다. 녹음이 우거지고 매미 울음 소리가 들린다. 야생화들이 피어 있다. 작은꽃으아리가 대세인 것 같다. 희고 작은 꽃이 예쁘고 소복하게 피어 있다. 걷는 길은 험하지도 않다 오르막이 잠시 있다가 바로 내리막이다. 노년에 접어들었는지 내리막이 더 힘들다. 이제 내리막이 힘들고 두려운 나이가 되었는가? 적당히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삶인가. 우리 내외는 아이들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워했다. 누구나 아이들이 짝을 지어 예쁘게 살면 부모들 내외간에도 갈등이 없이 행복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리막길에는 나무 계단을 만들어 놓아서 위험하지 않다. 오르막길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흔적이 많았으나 날씨가 너무 더워서 우리처럼 걷는 사람은 없다. 출발지에서 1시간 쯤 걸으니까 마지막 이정표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경사가 비교적 급한 내리막길이다. 출렁다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산 위에서 내려다 보니 초평지의 푸른 물이 바로 발 아래이다. 출렁다리는 초평 청소년수련원 건물로 건너가는 길이다. 비탈길을 조심하면서 내려갔다. 조금 미끄러웠지만 거리가 멀지 않으니 참을 만하다. 군데군데 밧줄이 있어 잡고 내려가면 된다.
출렁다리를 건너 수련원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다리 위의 볕은 불볕이란 말 그말이 딱 어울린다. 다시 건너와서 나무다리(데크)에 설치해 놓은 의자에 앉아 미영이가 만들어준 커피를 마셨다. 특별한 맛이다. 정성을 담은 손이 가면 맛이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떡으로 점심을 에웠다. 푸른 물이 보기는 좋다. 가만히 보니 녹조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곳은 평평하고 걷기 좋으니까 사람들이 많다. 다리가 좋지 않다든지 무릎관절에 이상이 있는 사람, 지나치게 비만인 사람들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도 산막이옛길처럼 북적대지는 않는다. 그래서 더 좋다.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이 예쁘다. 천천히 걸으니 바로 농다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농암정
출렁다리로 내려가는 이정표
능선에서 바라본 청소년수련원
출렁다리 위에서
출렁다리와 농다리로 가는 데크
만수된 초평지
떡과 커피 환상의 조화
농다리로 가는 호숫가 데크
물, 산, 하늘-물에 잠긴 구름
용고개 성황당에서 잠시 쉬었다. 초평지가 생기기 전에는 마을이 있고, 이 고개로 구산동 사람들이 넘나들었을 것이다. 성황당에는 거기에 어울리는 전설이 있다. 나는 성황당이라면 어린 시절 대보름날 고사떡 훔쳐 먹던 기억이 새롭다. 성황당 뒤에서 숨어 고사를 지내는 것을 구경한다. 그리고 치성을 다 마치고 사람들이 돌아가면 놓고 간 떡시루를 훔쳐서 아이들과 나누어 먹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고사떡 위에 놓인 몇 푼 지전은 우리들의 군것질 용으로 충분했다. 성황당 산신령 대신 산신령 노릇을 한 것이다. 어른들은 알고도 속고 모르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아내가 성황당 안내판을 읽는 동안 나는 옆에서 옛날 생각이 나서 혼자 웃었다. 그러나 성황당의 사연은 우리 민족의 사랑과 이별, 아픔과 소망, 그리고 기대, 그리움 등으로 가득차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어린시절 나같은 장난꾸러기에게도 그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성황당에서 내려오는 길은 온통 꽃 세상이다. 목수국, 금계국, 비비추, 벌개미취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을 한데 모아 가꾸어 놓았다. 그래서 더 정겹다. 농다리를 다시 건너며 폭포를 보았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많다. 어느새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깨끗하지 않은 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한이라는 듯 물을 바라만 보고 있다.
용고개 성황당
성황당 안내판
목수국
한국의 아름다운 산천 표지석
농다리와 인공 폭포
바위 담쟁이-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고 있다.
간 길을 되짚어 돌아 왔다. 주차장 가가이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담쟁이를 보았다. 바위에도 수분이 있는지, 영양이 있는지 덩굴을 뻗어 바위를 덮기 시작했다. 이렇게 뿌리른 내리다가 결국에는 담쟁이 뿌리로서는 어마어마한 바위를 부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것이 얼마의 세월이 될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담쟁이는 겁이 되었든 아승기가 되었든 세월을 계산하지 않고 이미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바위는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뜨거울 것이다. 수분도 없이 열기만 있는 바위 그러나 덩굴은 저만큼 뻗었다. 이렇게 살면 못 살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담쟁이의 가르침이 무섭다.
두 시간 정도 걷는 길이 하루 운동량은 충분하다. 가까이 있으면서 벼르기만 한 농다리와 초평지 주변 둘레길을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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