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왕 태실 답사
영조대왕 태실은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무성리에 있는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 갈산리 초가삼간에 닭볶음탕을 맛나게 하는 집에 있어 수시로 그 앞을 드나들면서도 차 안에서 태봉산만 쳐다보며 그냥 지나쳤다. 어제 친구들과 그 집을 또 다녀오면서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은 물 한 병을 들고 태실 참배만을 목적으로 찾아갔다.
무성리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마을로 들어가니 적막하기 짝이 없다. 쫓아와 짖는 개조차 없다. 농민보건관리소를 지나 바로 성모재(誠慕齋)라는 고가쪽으로 올라가니 누군가 태묘로 올라가는 길에 풀을 베어 올라가기 좋게 가꾸어 놓았다. 올라가는 길 앞에 안내판이 있고 비석이 서 있다.
안내판에는 태실을 여기 세우게 된 연유와 태실이 겪은 고난의 역사를 간단히 기록해 놓았다.
비는 아주 작고 아담한데 전면에는 태어난 시기 뒷면에는 왕자 아지씨태실이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돌아가 보니 이수가 등에 업고 있는 비석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주상전하태실이라고 쓰여 있다. 이 비는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세운 것으로 보였다.
이렇게 보니 태실이 뭔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기 때 세운 비와 왕위에 오른 뒤에 세운 비가 반대쪽에 있어서 어디가 앞인지 잘 모르겠다.
바로 앞에 있는 산이 태봉산이라면 태실은 산 정상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턱에 있는 것도 이상하다. 시대는 다르지만 김유신 장군 태실이 있는 진천 문백의 태봉산도 정상에 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일제 강점기에 훼손되었다가 최근에 와서 다시 수습하여 세웠다고 한다. 본래는 태봉산 정상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다시 세웠다 하니 그 수난의 역사가 가슴 아프다. 그런데 이왕 다시 수습하여 세우려면 제자리에 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다시 세워 준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 영조대왕 태실 유적***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기념물 제69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북도 청원군낭성면무성리 산 6-1에 위치한다.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이 태실(胎室)이 청주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청주목 산내일동면 무쌍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가 바로 현재의 낭성면 무성리이다. 이 태실은 1695년(숙종 21)에 조성되었던 영조(1694∼1776)의 태실을 1729년(영조 5)에 다시 왕의 태실 규모와 구조에 맞도록 고쳐 만든 것이다. 태실의 형태는 공주에 있는 숙종의 태실을 모방하여, 중앙에 2단으로 된 정사각형의 대석을 놓고 그 위에 계란모양의 태실석(胎室石)과 팔각의 갓처맛돌을 놓았다. 그리고 그 주위에 8개의 장대석을 8각으로 놓고, 8각의 모서리에는 우주석(隅柱石)을 세웠다. 8면의 중앙에는 사각의 동자석을 세운 뒤 육각의 장대석을 가로얹은 돌난간을 둘렀다. 태실 앞에는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 상단에 조각한 태실비(胎室碑)를 세웠다. 비신의 앞면에는 〈주상전하태실(主上殿下胎室)〉이라 쓰여 있고, 뒷면에는 〈옹정7년 10월 14일(雍正七年十月四日建)〉이라 쓰여 있다. 이 영조 태실은 한말까지는 나라에서 8명의 수호군을 두어 관리하였으나, 1928년에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전국에 있는 태실을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구실로 태항아리만 꺼내어 서울 창경궁으로 옮기면서 크게 파손되었다. 그 후 태실 자리에는 민간의 묘가 들어섰고, 태실비는 마을 사람들이 마을로 옮겨 세웠다. 1982년 청원군에서 갓처맛돌이 없는 상태로 태실을 복원하였다. 청원군에서 소장한 《태실가봉의궤(胎室加封儀軌)》(필사본)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로 별도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안내 표지판 쪽에서 촬영한 사진 ---안내 표지판 바로 뒤에 있는 비석이 아기 때 세운 태실비이다. 이 비석은 대구 골동품 상에 있는 것을 다시 매입해서 이곳으로 옮겨와 다시 세웠다고 한다. 비신이 사람 키보다 작아 아기의 모습이다. 이 비를 세울 때만 해도 영조는 숙종의 사랑을 받은 궁녀 소생으로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태실 전면에 있는 태실비 -- 여기에는 주상전하 태실이라고 쓰여 있고 영조가 왕위 올라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왕의 위상에 맞추어 세운 것이라고는 하나 생각보다 소박하다.
태실석의 모습--중앙의 계란 모양이 태실석 이 태실석은 강점기에 창경궁으로 옮겨갔었다고 한다. 역사의 수난을 겪을 대로 껶은 모습이 안쓰럽다. 그러나 조선의 왕으로 할 말씀은 없을 것이다.
왕자 아지씨 태실이라 쓰여 있는 작은 비석
주상전하 태실이라 쓰여 있는 비석
안내 표지판
대왕의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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