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시대 위나라 혜왕은 조나라와 강화를 맺고 태자를 볼모로 보내게 되었다. 태자를 혼자 보낼 수 없어 방총(龐?)이란 대신을 따라가게 했는데, 그는 출발에 앞서 임금에게 물었다. "전하, 지금 누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터무니없는 말을 누가 믿겠소." "그러면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믿지 않을 거요." "만약 세 번째 사람이 똑같은 말을 아뢰어도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땐 믿어지겠지." 방총은 한숨을 내쉬고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은 어린애도 알 만한 상식입니다.

그러나 거짓도 말하는 입이 여럿이면 솔깃해지게 마련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 셋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드는 셈이지요. 신은 이제 떠나거니와, 아마도 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여럿 나타날 것입니다. 아무쪼록 전하께서는 이 점을 참작해 주십시오." "과인이 어찌 경을 의심하겠소? 안심하고 떠나도록 하오."

방총이 떠나자 그를 헐뜯는 참소가 임금의 귀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혜왕도 처음에는 일축하였으나, 두세 번으로 거듭되자 자신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몇 년 후 태자는 귀국하였지만, 방총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이 셋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는 말(三人成虎)은 이 이야기에서 생겨났다.

요즘 같은 말의 홍수 속에서 경구로 삼기에 적절한 말이다. 정치인들이 만들어 내는 말에는 유권자를 향한 약속도 있고, 경쟁자를 향한 공격도 있다. 또 그들의 말은 진정어린 말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 사람이 말하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반복되는 헛말도 자꾸 들으면 정말 그럴 것이라 믿어지기도 한다. 아니 순진한 국민들은 그 무지갯빛 꿈을 믿고 싶기도 할 것이다.

오늘의 공통적인 화두는 사회 통합이다. 계층, 남녀, 세대 간에 갈등 없이 통합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군림하는 권력 대신 나누어주는 권력, 노동자를 배려하는 사용자, 회사에 헌신하는 노동자, 제자리 찾은 교육, 미래가 보장되는 청춘, 비정규직이 없는 사회를 꿈꾸지 않는 국민은 아마 없을 것이다. 5년 전에도 그들이 만들어낸 거짓 호랑이를 믿고 오늘을 꿈꾸었지만, 아직도 온갖 갈등의 요인은 엄연히 존재한다. 재벌과 정치인들이나 하던 세습은 이제 공기업의 직장 세습을 넘어서 종교인들의 사제 세습에 이르고 있다. 기득권층은 확보한 권력을 나누어줄 줄 모른다. 유능한 젊은이들은 능력과 상관없이 비정규직이라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 좌절하고 있다. 그러나 해결할 의지도 보이지 않는 현실이 답답하다.

실천의지가 의심스러운 말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다. 언급하고 싶지도 않지만 상대에 대한 비방의 말도 낯이 뜨거울 정도이다. 그들의 말대로 권력이 서민과 친하고 서민의 소망이 권력으로 바로 전달되는 통합의 호랑이를 기대했으나 고양이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권력의 공정한 집행, 물처럼 맑은 권력층이라는 꿈같은 호랑이 대신 부조리와 모순으로 꼬리를 흔드는 여우를 맞는 역겨움을 여전히 견디어야 한다. 그런데도 호랑이를 다시 말하고 있는 그들의 말에 또 솔깃해지고 있어 안타깝다.

칸트는 절대적이고 보편적 진리에 복종하는 것만이 도덕적 행위하고 말했다. 이익의 가능성을 기대하거나 상대를 수단으로 여기는 말이나 행동이라면 그것은 우리를 얕보는 것이다. 권력을 소유하고자하는 사람들이 어떤 동기에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과연 그들이 진짜 호랑이를 그리며 말하는 것인지, 거짓 호랑이를 만들어 말하고 있는지를 똑바로 판단해야 한다. 아무리 여러 사람이 나와서 어떤 달콤한 말로 호랑이가 나타났다 해도 무조건 믿어서는 안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