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3일
◆ 계명산 ( 해발 865m ) 온달산성 답사 : 충북 단양군 가곡면과 영춘면의 경계
◆ 산행코스 : 보발재(김종수 장군 공적비) - 북서릉 - 정상(향로봉) - 북동릉방터 - 광주김씨묘 - 온달산성 - 드라마 촬영장 - 주차장
온달산성과 영춘면 소재지, 태화산이 보인다
계명산 등산 지도
1. 가는길
오늘은 백만사 등산 날이다. 백만사 회원 10명 중에 중요한 일이 있는 이완호 회원을 제외하고 9명이 내 차와 이효정 대장의 차에 나누어 타고 8시에 출발하여 괴산 만남의 광장에서 만났다. 엷게 낀 안개 속에서 단풍에 물든 산이 물에 잠겨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었다. 휴게소에서 차를 한 잔씩 마시고 바로 출발했다. 칠성을 거쳐 연풍에서 수안보 쪽으로 달렸다. 송계 계곡으로 들어가면 더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있으련만 아쉽게도 다른 길로 들었다. 아마 월악산 등산객 들로 송계가 엄청나게 붐빌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양에 거의 다 가서 장회나루의 휴게소는 승용차, 버스, 사람이 모여 혼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바로 출발했다. 그리고 산행기점인 보발재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괴강 만남의 광장 인근의 단풍
장회나루 휴게소에서 제비봉과 장회 나루의 몰려든 차량들
말항산의 강선대 부근
제비봉의 단풍- 절개지는 어쩔 수 없지만 전봇대는 피할 수도 있는데---
장회나루에서 바라본 둥지봉 방향-휴게소에서 호수쪽으로 심은 나무들이 경관을 가린다.
2. 산행 시작
보발재에서 이효정 대장님과 나는 태왕사신기 촬영장 주차장까지 가서 내 차를 주차해 놓고 다시 올라 왔다. 고갯마루에는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사람들이 많다. 여기는 철마다 지나면서 경관을 보았지만 이곳에서 여러 방향으로 등산로가 시작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람들은 등산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망대에서 구인사 쪽으로 내려가는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고 내려간다. 여기서 구인사쪽으로 내려가는 구불구불한 도로와 주변의 소나무들과 길가에 심어놓은 단풍 나무가 물이 들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이 고개에 찻길이 놓인 것은 단순하지 않다. 단양에서 가곡을 거쳐 영춘으로 들어가는 원래의 길은 가곡면 향산리를 지나 군간나루에서 배로 버스를 지난 다음 영춘 하리 나루터에서 다시 버스가 배를 타고 영춘으로 들어가면 도착된다. 영춘에서 영월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영춘면 상리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길을 건너게 된다. 이곳은 이렇게 오지이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다리가 놓여 뱃사공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사람들은 더 편리해졌다. 그런데 겨울에는 이 강이 꽁꽁 얼어붙어 버스가 다니지 못한다. 그러면 군간 나루에서부터 시오리길을 걸어서 영춘으로 들어가야 한다. 의풍 학교에 근무하던 젊은 시절 군간나루에서부터 의풍까지 걸어본 날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 차가운 강바람이 지금도 느껴질 정도이다.
여기에 찻길이 생긴 것은 군사적 목적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군사도로이다. 그러니까 고구려 때는 여깅 성을 쌓았고, 20세기에는 여기에길을 닦았다. 옛날에나 지금이나 이 오지가 요새로 인정받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런데 구인사 때문에 이 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더구나 박정희 정권 때에는 고위 층 인사들이 구인사를 많이 찾았다고 한다. 그 때 김종수 장군이 지휘하는 군인들이 이 도로를 넓혀 차가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 김종수 장군의 유적비가 있다. 그 후 최근에 이 도로가 포장되고 조경이 이루어졌다. 내가 의풍학교에 근무할 때도 도로는 있었으나 겨울에 군간나루가 얼면 도로 사정을 보아가며 이 도로로 버스 노선이 변경되기도 했다.
고개에서 남쪽으로 가면 가곡면 보발리이고 북쪽으로 가면 영춘면 백자리이다. 우리는 남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김종수 장군 공적비가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등산로를 바로 찾았다. 등산로는 가팔랐지만 물에 촉촉히 젖은 낙엽을 밟는 기분이 아주 괜찮았다. 단풍은 노랗게 물들어 있고 이제 낙엽을 시작하고 있다. 올해 단풍은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공기가 맑고 여인들의 웃음 소리가 상쾌하다. 잠시 숨이 고르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니 금방 안부이다. 계명산 정상이 865m라지만 보발재가 500m가 넘으니 오르막길은 그리 길지 않다.
보발재 마루에서 바라본 구인사 방향-이 아름다운 계곡에 전깃줄
김종수 장군의 공적비를 찾아 산행 출발 우리 일행
가는 길의 단풍
숲을 헤치며
처음 오른 봉우리에는 서축의 흔적이 있다. 지도를 보니 이곳이 봉화대터라고 한다. 여기 봉화가 어디로 통했을까? 아마도 소백산의 봉화를 받아 서울 쪽으로 넘겼을 것이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사방을 조망할 수 없다. 주변을 살펴 보니 크고 작은 돌로 망루처럼 쌓아 올린 흔적이 보인다. 그러니 이 봉우리는 인공의 봉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자연석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잠시 땀을 식힌 다음 이제 완만한 능선길을 걷다가 무료하면 한 10여분 씩 오르막길을 숨가쁘게 오르고 또 다시 능선을 쉬다가 오르막길을 가파르게 올라가기를 서너번 반복하니 향로봉 정상 표지석을 만났다. 정상에는 사람들이 많이 왔었는지 비교적 넓은 지역에 잡목을 베어 시계가 트였다. 온달 산성은 군사들의 중심 주둔지였다면 이 산 줄기가 모두 자연적인 산성으로 적을 방어하는 요새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산성이 전해오는 이야기처럼 고구려의 산성이었다면 소백산을 넘어 북을 넘보는 신라의 세력을 여기서 방어하였을 것이다. 그 때도 죽령을 넘어 북으로 향하는 군사들이 별방 쌍룡 영월로 행하기도 했겠지만 보발을 지나 이고개를 넘어 영춘-용진리-오사리를 봉화에서 태백을 거쳐 넘어 오는 군사들과 맛밭에서 합류하여 영월을 쳤을 것이다. 그 때 양쪽을 다 방어하는 군사 주둔지가 바로 여기서 내려가는 온달산성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온달 산성은 고구려의 최전방이 된다. 그리고 이 계명산 산줄기는 자연적인 산성이 된다. 그러면 계명산에서 닭은 어디서 울었으며 계명산 정상이 향로가 된 설화는 어디서 찾는가?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가이드를 자부하는 정우종 선생이 출발을 명했다.
봉화대에서-아래에서 부터 석축의 흔적이 있다
봉화대에서- 이돌을 어디에서 들고 올라왔을까
아름다운 소나무 군락
5분간 휴식
계명산 정상 (향로봉)- 왜 향로봉이 되었을까?
정상에서 여성 회원들-이 분들의 항상 밝은 얼굴이 백만사의 분위기를 대변한다.
정상에서 남성 회원들-역시 마찬가지 펴고 살 수밖에 없는 얼굴
3. 온달산성을 향하여
정상에서부터 온달성으로 향하는 길은 아주 좋다. 군에서 그랬는지 등산로를 정비해 놓았다. 잡목을 베고 그루터기를 없애서 걷기에 좋다. 온달산성에서 이곳까지 등산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그렇게 하면 길도 좋고 거리도 짧아 괜찮을 것 같다. 우리는 점심을 간단히 먹었다. 점심이 너무나 화려해서 이제부터 김밥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대신 집집마다 간식을 조금씩 가져오기로 했다. 그렇게 차려놓으니 화려한 뷔페 식당이 된다. 오늘도 역시 이대장댁 김치가 인기를 끌었다. 소주를 두 잔이나 마셨다. 막 취한다. 숨이 가쁘다. 술을 마시고 내리막길을 잘못 시작하면 망신을 당한다. 인생의 내리막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리막길이라 더욱 조심스럽다. 스틱을 꺼내 없는 분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고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었다.
비석은 없고 상석만 있다. 그러나 묘지는 잘 가꾸어 놓았다. 지도에는 광산김씨 묘소라고 한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을 최가동이라고 하는데 광산김씨 묘소가 있다. 주변에 소나무를 잘 가꾸어 그 나무의 크기로 보아 아주 오래된 묘지 같다. 여기부터는 등산로가 거의 도로 수준이다. 잘 다듬어 놓은 길에 낙엽이 떨어저 알맞게 썩어서 발밑이 아주 부드럽다. 군데군데 벤치도 있고 정자도 만들어 놓았다. 아주 좋은 소나무 산책로이다. 그러나 인적은 없다. 모두들 드라마 촬영장의 헛개비 건물만을 둘러보고 온달산성까지만 올라왔다가 그냥 내려가는 모양이다.
광산김씨 묘소
묘소에서 출발
묘소 주변의 소나무 숲에서 백만사의 여인들
최가동으로 가는 도로를 건너기 전에 전망 좋은 곳이 있다. 산에서 길로 내려서는데 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서 구인사와 사찰 뒤 쪽의 소백산 줄기가 다 보인다. 국망봉까지는 아니라도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산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국망봉은 소백산 비로봉에서 바로 멀리 보이는 봉우리이다. 그리고 왼쪽으로 영춘 남천 계곡을 건너 쪽에 있는 봉우리가 형제봉일 것으로 짐작이 간다. 우리는 도로 위에서 소백산과 구인사 골짜기의 장엄한 준령을 바라보면서 온달산성으로 향했다. 길은 아주 평탄하고 좋다. 비탈의 소나무들을 간벌을 하였는지 나무토막이 도로 위에 쌓여 있다. 소나무의 특이한 향이 코를 시원하게 해 준다. 이런 나무로 기둥을 하고, 서까래를 만들어 집을 지으면 집에서 솔향이 날 것이다. 온달산성은 그리 멀지 않고 길도 아주 좋았다.
소백산 신선봉일까?
저 너머 높은 봉우리가 형제봉일까? 의풍에 있을 때 올라간 적이 있다
온달산성
요약 : 충북 단양군 영춘면(永春面) 하리(下里)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산성.
시대 : 신라
크기 면적 26,354㎡
본문
사적 제264호. 1979년 지정. 고구려 평원왕(平原王)의 사위 온달이 신라군의 침입 때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옛 석성(石城)이다. 성의 둘레 683m, 동쪽 높이 6m, 남북쪽의 높이 7∼8m, 서쪽의 높이 10m, 성의 두께 3∼4m. 영춘을 돌아 흐르는 남한강 남안의 산에, 길이 70cm, 너비 40cm, 두께 5cm 크기의 얄팍한 돌로 축성한 성으로, 약 100m 정도가 붕괴된 것 외에는 대체로 현존한다. 동 ·남 ·북 3문(門)과 수구(水口)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성내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매몰되어 물이 조금 나올 정도이며, 곳곳에서 삼국시대 및 고려 때의 토기조각을 볼 수 있다.
[출처] 단양 온달산성 [丹陽 溫達山城 ] | 네이버 백과사전
단양온달산성 [ 丹陽溫疸山城 ]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사적 제264호. 둘레 683m. 지정면적 26,354㎡. 현재 성벽과 동·남·북의 문지(門址), 우물터·배수구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영춘은 옛 이름이 을아단(乙阿旦)으로, ≪삼국사기≫의 온달열전(溫達列傳)에 온달이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전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온달산성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아단성은 현재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의 아차산성(阿且山城)이라는 견해도 있어 불분명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산고성(城山古城)이라 하여 둘레 1,523척(尺), 높이 11척의 석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산성은 산 정상을 둘러싼 테뫼꼴로 벽은 안팎을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돌로 정연하게 쌓아올린 내외협축(內外夾築)이다. 성의 서북쪽은 남한강에 접한 가파른 절벽이며, 약 100m 가량 무너져 있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벽돌처럼 잘라낸 돌로 쌓아올렸는데 높이 6∼8m, 너비 3.8∼4m 정도이다.
문은 동·남·북의 세 곳에 있었는데, 모두 특색이 있다. 동문터는 문구부(門口部)의 너비가 7.3m의 수직절단면을 보여주고 있고, 북문터는 너비 6m 정도인데 북동쪽 모서리를 곡성(曲城)처럼 처리하였다. 남문터는 바깥쪽에서 보아 입면(立面)이 凹모양을 이룬 것으로, 성안과 바깥의 높이 차를 두고 사다리나 현문(懸門 : 아래 위를 여닫게 된 문)이 시설되었던 듯한 모습이다.
성안에는 우물터가 남아 있고, 특히 성 북쪽 평평한 지역의 성벽 바깥에는 아랫부분에 아랫너비 35㎝, 윗너비 25㎝, 높이 65㎝의 사다리꼴 배수구가 있다. 성안에는 삼국시대 후기에 속하는 그릇조각이 흩어져 있다.
성의 북동쪽 산 아래 남한강의 강변 절벽 아래에는 온달굴이라는 석회암동굴이 있고, 성을 마주보는 북쪽 강 건너의 산에도 온달과 관계되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어서, 이곳이 신라와 고구려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던 곳임을 시사하고 있다. 성벽의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고대 성곽의 축성법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온달 산성에서
소나무 숲 사이로 일부가 무너져 개축하고 있는 산성의 서면이 보였다. 한 100 m 쯤 무너진 곳이 있다고 하는데 남아 있는 부분이 마치 망루처럼 우뚝 서있다. 마치 로마 포로로마로에서 만난 어떤 여신의 신전 같다. 산성이 보이자 나는 가슴이 뛰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삼년산성이나 계족산성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무너진 서쪽 사면이 어지럽다.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인지 접근 금지 새끼줄이 쳐 있다. 나는 가까이 접근해서 사진을 찍었다. 대개 접근 금지라고 써 놓은 부분이 사진 찍기에 아주 좋다. 무너진 부분이 석축의 돌쌓기 방법을 파악하기가 더 좋다. 한 5cm ~10cm 두께이면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성이다. 비교적 사람들이 들어 나르기 용이할 만큼의 크기의 성돌이다. 두께는 한 5~!0cm 정도 크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가로 30~40cm 세로 50~70cm 정도 되는 것 같다. 크기는 일정하지 않지만 사람이 다듬은 흔적이 있다. 영춘 지역에 많이 나는 자색 납석은 아니다. 당시에는 어디서 돌을 구했을까? 아마도 동대리나 남천 계곡의 돌을 날라온 것 같다. 그렇게 큰 성은 아니지만 이 성을 쌓기 위해서 영춘지역의 가난한 민중들이 얼마나 많이 동원되었을까? 신라가 이 성을 점령하든 고구려가 이 성을 쌓았든 동원되는 것은 이 고장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곳의 패권을 누가 잡든지 현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 리도 없다.
성이 잘 보존 된 것은 그만큼 당시에 정성을 들여 쌓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 쌓았다면 정치 지도자가 민중을 잘 설득했을 것이다. 외벽 아래 내려가 올려다 보니 상당히 높다. 산을 기어 올라와서 공격을 받으면서 이 성벽을 올라 성을 점령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아니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지라는 곳에 국립 충주대학교에서 지표 조사를 한 흔적이 보인다. 표지판만 있고 지표 조사 결과에 대한 설명은 없다, 청주의 부모산성이나 정북토성처럼 상세한 안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추락주의 표지석만 있는 것이 아쉽다.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는 성을 보면서 내려오는 길에 자꾸 뒤가 돌아다 보인다.
소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성터
성 위에 올라선 이효정 대장
무너진 사이로 원형을 짐작할 수 있다.
개축한 곳-계속 공사중이다.-원형을 살려 다시 쌓았다. 그러나 보수의 흔적이 너무 뚜렷해서 옛 모습을 잃었다.
무너진 부분 - 석축의 안쪽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안쪽으로 잡석을 넣고 바깥 쪽에는 잘 생긴 돌로 마감했다.
북쪽 성벽 공사가 진행 중이다.- 한 100m된다고 한다, 무너진 성벽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의 재질도 다르고 돌을 다듬은 솜씨도 다르다. 기존의 성벽은 다듬은 부분이 많이 않은데 이 돌은 완전히 돌을 다듬어서 옛 성벽의 모습을 흉내내었다
원형이 남아 있는 성벽 -상당히 견고하다-자연석이 아니라 돌을 다듬어서 쌓은 모습이다
무너진 부분이 어지럽지만 옛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마치 인력으로 무너뜨린 것처럼 무너지고 남은 부분- 축성의 방법을 연구하는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크기와 모양은 다르지만 두께가 비슷한 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렸다
다른 성벽이 크기는 다르지만 일정한 두께의 돌을 쌓아 올린데 비하여 이곳은 비교적 무질서하다.
남측 성벽 - 개축은 여기서 끝나고 어느 정도 완벽하게 보존된 부분이 시작된다
완벽하게 남아 있는 남측 성벽의 안쪽 모습-납작납작한 돌을 다듬어 빈틈없이 쌓았다. 당시 사람들의 정교한 솜씨를 엿볼 수 있다.-이곳은 내벽도 비교적 높다.
성에서 바라본 구인사가 있는 소백산 준령
남쪽 성벽 아래에 내려가서 찍었다.-무너진 부분을 보면 얼마나 견고하게 정성을 다해서 쌓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튼튼한 성벽- 절벽 바로 위에 쌓은 성벽이 이렇게 높다. 앞으로도 1500년은 더 갈 것 같다
성벽 위의 모습-외벽은 높지만 내벽은 낮다. -이곳에 전망이 좋기 때문에 추락 위험이라는 표지석이 계속 있다. -보이는 곳이 서문라고 한다.
서문지라는 표지판과 국립충주대학교에서 지표 조사를 한 곳이라고 되어 있다.-그러나 지표 조사 결과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안내판은 없다.
충주대학교에서 지표조사를 한 흔적 - 아무런 흔적이 없어 처음에는 밭인 줄 알았다.
서문 근처에서 바라본 성의 윤곽-오른쪽으로 동문 왼쪽으로 북문지가 보인다.
내벽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시대의 숨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벽과 외벽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
동문을 통하여 드라마 촬영지로 내려가고 있는 아내
5.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이 성을 쌓았다고 하는 온달 장군에 대하여는 재미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 내려온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기본적인 화소(話素)는 미천한 신분의 남성인 온달과 고귀한 신분의 여성인 평강공주와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선화공주와 서동의 사랑이라든지, 선녀와 나무꾼이라든지 얼마든지 많다. 이런 이야기는 대개 사람들의 소박한 꿈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온달이 그렇게 미천한 신분도 아니었을 것이고 서동도 그렇게 미천한 신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고귀한 신분이면서도 가난했기에 오늘날 사람들에게 미천해 보인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의 가치 평가와 당시 사람들의 가치 평가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가난이라는 것은 예전에는 지금처럼 신분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온달은 당시 귀족이었지만 가난하였기에 바보라고 생각되었고, 귀족들이 혼인을 하지 못할 만큼 그런 신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공주를 시집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온달은 공주와 혼인을 하고 나서 가난읇터 해방되고 가난으로부터 해방되니까 기르 펴고 공부도 하고 무예도익혀 자신의 기개를 드러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라는 것은 실재한다기보다 만들어 내는 이들의 소망이 담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적어 놓은 이야기는 모두 이야기를 만든 사람들의 소망이고 이 이야기가 전해지던 당시의 민중의 가슴에 공감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직전 캐논 카메라의 배터리가 나갔다. 여분으로 준비해온 배터리를 넣었더니 역시 방전이다. 매사에 준비성이 없는 나를 반성한다. 주차자에 일행을 기다리게 하고 나와 이대장은 보발재에 주차해 놓은 이대장의 차를 회수해 왔다. 돌아오는 길은 별방-쌍룡-영월-제천의 노선을 택했다. 흥겨운 식사와 함께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온달 [ 溫達 ] (?∼590(영양왕 1).
고구려시대의 장군. 어린 시절에는 집안이 몹시 가난해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거리를 다니며 걸식을 하였다. 그런데 용모가 파리하고 우스꽝스러워 사람들로부터 ‘바보 온달’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어린 시절 울기를 잘해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내야겠다던 평강왕(일명 평원왕)의 놀림을 진실로 믿고 온달과의 결합을 고집하다 쫓겨난 평강왕의 공주를 처로 맞아들이면서 가세가 펴지게 되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고구려에는 매년 3월 3일 군신(君臣) 및 5부의 병사 등이 낙랑(樂浪)의 언덕에서 사냥한 노획물로 천신(天神)과 산천신(山川神)에게 제사하는 국가적인 대제전이 있었다. 온달은 여기에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참여해 뛰어난 사냥 솜씨를 발휘해 왕의 감탄을 샀다.
그 뒤, 북주(北周) 무제(武帝)군대의 요동 침입 때 고구려군의 선봉으로 북주군을 격퇴하는 대공을 세워 비로소 국왕의 사위임을 공인받고 대형(大兄)이라는 관위를 받음으로써 점차 고구려 지배세력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590년 영양왕이 즉위하자,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을 위한 군사의 출정에 자원해서 참전했으나 아단성(阿旦城 : 지금의 峨嵯山城)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는 온달의 일대기는 설화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닌다.
그러나 벽화고분을 제외하고는 고구려 자체의 자료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 6세기단계의 고구려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의 검토가 요청된다. 그의 출신은 고구려 최고지배세력에 속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어 왕족과의 통혼권 밖에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가 평강왕의 공주와 혼인할 수 있었고, 나아가 국왕의 측근세력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신장시켜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양원왕의 즉위를 둘러싼 고구려 귀족세력간의 다툼으로 인해 고구려 지배질서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온달설화>는 한낱 평민에서 부마에 오르고 무장으로 이름을 떨친 온달장군의 인물설화이며, 역사상 실존인물을 다룬 역사 설화라고도 할 수 있다. 영웅전설의 일반적인 구조처럼 온달의 죽음으로써 이야기의 결말을 맺는다.
바보온달로 구전되는 인물전설은 강화도 일대와 중부지방에서 주로 전승된다. 그리고 갈등구조상 동일유형으로 파악되는 쫓겨난 딸과 숯구이 총각에 얽힌 민담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주제는 부녀간의 갈등을 통해서 부권중심의 전통적인 도덕률을 비판하고 스스로의 독자적인 삶을 개척해나가는 여성의 주체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은 여성 자체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성취와 아버지의 인정에 의한 것이므로, 일정한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삼국사기≫의 온달열전은 민간전승을 통해서 형성된 설화가 편찬자에 의해 다듬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전되는 <바보온달전설>은 문헌에서 전하는 것과 거의 같으나, 공주가 온달에게 글과 무예를 가르쳤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고소설 <온달전>의 줄거리도 이와 같으나 문학적 형상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열전에서보다 민중의식이 한층 두드러져 있다. 갈등구조상 동일 유형인 민담에서는 세 딸을 둔 아버지와 자기 복에 먹고 산다고 해서 쫓겨난 셋째 딸과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숯구이 총각이 등장한다. 인물과 배경은 다르나 유형구조와 유형적 차원의 주제는 전설과 다름없다.
화소(話素)들이 <무왕설화 武王說話>와 유사해 동일 유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설화가 남녀간의 신분적 갈등을 다룬 것이라면, <온달설화>는 부녀간의 갈등을 다룬 것이다. 사기와 설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King Lear>의 줄거리가 이와 비슷한 것을 보면, 서구에도 이와 같은 유형의 설화가 전승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설화는 유기적인 대립구조로 형상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보온달과 울보공주에 대한 표면적 인식의 한계가 온달장군과 주체적 삶을 실현한 공주에 의해 극복됨으로써 기존질서의 허위를 비판하고 근대적인 민중의식과 여성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당대의 설화문학이 가지는 민중적 미의식과 역사를 개척하려는 민중적 역사의식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평강공주 [ 平岡公主 ]
고구려 평원왕
생몰년 미상. 고구려 평원왕의 딸. 장군 온달(溫達)의 부인이다. 《삼국사기》 온달전에 의하면, 공주는 어릴 때에 잘 울어서, 왕이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놀리곤 하였다. 그 뒤 시집갈 나이가 되었을 때, 명문귀족 집안에 시집보내려 하였지만 공주가 이를 거부하였다. 왕이 노하여 궁궐에서 쫓아내니, 공주는 온달을 찾아가 혼인하였다. 그녀는 눈먼 시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바보스러운 남편 온달에게 무예와 학식을 가르쳤다. 공주의 도움과 가르침을 받아 온달은 뛰어난 무예를 지니게 되었다. 얼마 뒤 온달은 매년 3월 낙랑(樂浪)벌에서 열리던 사냥대회에서 남다른 활약을 보여 왕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온달은 고구려의 장수로 발탁되었다. 그 뒤 북주(北周)의 군대가 침공하여왔을 때, 온달이 고구려군의 선봉이 되어 적을 격파하고 대공을 세웠다. 평원왕을 이은 영양왕 때에, 온달이 한강유역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수도로 돌아오던 중 죽었는데, 그 시체를 넣은 관을 운반하려 하였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돌아가자고 말하니, 비로소 관이 움직여 이를 매장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 온달전의 내용에서 전하는 평강공주의 행적은 당시 사회에서는 퍽이나 파격적인 것이다. 그녀는 집안의 문벌이나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순수한 애정에 의하여 결혼을 한 훌륭한 여인으로 칭송되기도 하였다. 또, 불우한 처지의 남편을 도와 입신출세하게 한 현명한 아내의 본보기로 내세워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온달전의 내용을 보면 설화적인 면이 짙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허구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속에서 일정한 역사적 사실을 추출해보려는 시각이 필요하며, 다음과 같이 풀이하여볼 수 있겠다. 먼저 당시의 시대상으로 보아, 그리고 위의 내용으로 볼 때도, 온달은 미천한 출신의 바보였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는 당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고급 귀족집안 출신은 아니었고, 아마도 하급귀족 정도 신분의 인사로서 그 자신이 무사로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발탁되었던 인물로 여겨진다. 그러한 그를 왕이 사위로 맞이하려고 언약하였다. 그런데 이는 당시 신분제도와 관행에 비추어 어려움이 있고 또 반발도 있고 하여, 왕이 이를 취소하고자 하였는데 공주가 언약을 지킬 것을 고집하며 온달에게 시집갔다.
이 파격적인 공주와 온달간의 결혼을 두고 당시 귀족집안의 사람들이 야유와 시기를 하게 되어, 온달을 미천한 바보로 묘사하는 설화를 낳게 되었다. 자기들과는 다른 족속이나 신분에 속한 이를 이상하게 생긴 못난 인물로 묘사하는 예는 고대사회에서 널리 보이는 바이다. 이렇게 풀이하여 볼 때, 평강공주는 고구려의 귀족사회를 살아갔던 현명하고 정열적인 한 여인의 모습을 나타내주는 바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온달과 평강공주의 설화를 보면 옛 사람들의 사랑과 혼인, 그리고 의리에 대하여 오늘과 다른 많은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삶의 행복과 의미, 가치에 대하여 오늘날 사람들과 달리 대단히 원시안적(遠視眼)이었다는 점도 느낄 수 있다. 과연 어떤 것이 가치 있는 사랑이고 어떤 것이 행복한 삶인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정말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으며 30 여년이나 살아온 우리 내외는 역사가 발전하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가는 바람직한 혼인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식들은 그런 마음으로 상대를 만나고 평가하고 있을까? 지금까지 돌아본 산성에는 성석의 얼룩이 핏자국으로 보이더니 온달산성의 그것은 사랑자구으로 보였다.
돌아오는 길은 거의 40년 전 의풍에 근무할 때 다니던 별방-쌍룡-제천- 충주로 오는 길을 택했다. 쌍룡까지는 거의 옛모습 그대로이다. 제천부터는 4차선 도로이다. 뒷자리의 앉은 여인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첫째는 서로를 속박하지 않는 삶, 둘째는 경제적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셋째는 남성우월주의에서 탈피, 넷째 이웃한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계급적 열등의식에서의 해방이라는 우리 내외의 미래의 삶을 설계해 본다. 그게 될까? 의문이 앞선다. 오늘 온달 산성 답사는 내게 커다란 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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