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忠淸의 山城

옥천 자모리에서 대전 판암까지 - 백제로 가는 길

느림보 이방주 2011. 11. 14. 20:30

백제로 가는 길

 

▣ 2011년 11월 13일

▣ 옥천군 군북면 자모리 새마을 부터 대전시 동구 판암동까지 김유신 따라 백제 운명의 길 걷기

▣ 옥천읍 군북면 자모리(새마을(10:30)-자모리 입구-증약초등학교- 아랫자모실-가운데말-윗자모실 -자모소류지-사방댐 임도-시경계 능선(식장산 가는길)-국사봉 우회로-장고개(탄현)-세천공원계곡길-세천 저수지-1번국도 판암(동신고등학교 앞14:30)

▣ 남부터미널 옥천행 시외버스(09:20)-옥천 대전 607번 시내버스(12분 간격) 자모리 하차-판암에서 607번 시내버스-대전시외터미널 남부터미널 시외버스

 

  탄현은 어디일까? 대개 영동군 양산면 가선리와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사이의 고개,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삼거리와 서평리 사이의 고개, 그리고 옥천군 군북면 자모리와 대전시 동구 삼정동 삼정리 마을의 고개로 본다고 한다. 그런데 옥천의 군지라든지 기타 자료에서는 숯고개라는 이름 때문에 오동리 무중골과 이백리 갯골 사이를 탄현으로 본다고 한다. 이것은  숯고개라는 우리말 이름과 탄현(炭峴)이라는 한자 이름의 의미가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곳은 고개가 협소하고 가파른 경사면을 가지고 있어 대부대가 이동하기 불편하다고 한다. 옥천의 사학자들이 새로운 견해를 내었다. 군북면 자모리에서 대전시 동구 판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일명 장고개)를 성충이 의자왕에게 임종에 앞서 마지막으로 남긴 탄현이라는 설이 나왔다.  (옥천신문 2004년 7월18일자) 이곳이 여러가지 지역적 특성으로 탄현이라는 것이다. 백제의 역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나는 숯고개와 장고개를 직접 걸어 보고 내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먼저 장고개를 넘기로 하였다.

 

  성충의 임종 상서

 "신은 항상 시세의 변화를 관찰하는데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에는 그 지리(地理)를 살펴 상류(上流)에 처하여 적세를 늦춰 놓은 뒤에야 가히 보존할 수 있사오니 만약 다른 나라의 군대가 쳐들어 오면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도록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11월 13일, 이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릴 듯 말 듯하여 산행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8시30분경 하늘을 보니  비는 내리지 않을 것 같았다. 부랴부랴 가방을 싸서 메고 남부터미널로 향했다. 9시 20분발 옥천행 버스를 탔다. 옥천 터미널은 금방이다. 터미널에서 보니 607번 시내버스가 막 대전으로 출발하려고 한다. 가만히 보니까 607번 버스는 옥천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대전 시외버스 터미널을 다니는 버스였다. 그렇다면 대전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좋을 걸 그랬다. 아무튼 10시 30분 경 새마을이라는 곳에서 내렸다. 두리번 거리다가 자모리라는 이정표를 보고 들어가니 바로 증약초등학교가 있었다.

 

  길은 바로 찾았다. 학교는 아주 아담하고 예쁘다. 교문에서 바로 현관으로 이어지는 곳에 국화를 아름답게 길러 놓았다. 학교 앞에서 자모리로 보이는 마을의 계곡을 올려다 보았다. 멀리 식장산 줄기로 생각되는 마루금이 보인다. 지도상으로 꾀꼬리봉과 독수리봉 사이가 바로 장고개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길은 시멘트 포장 길이었다. 드문드문 아스콘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골짜기는 아주 좁다. 이 골짜구니로 대군이 이동한다 해도, 양쪽 기슭에서 마구 화살을 퍼 부우면  진퇴양난일 것 같았다.

 

증약초등학교 -새로 지은 건물이 깨끗하고 아담하다

장고개 지도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다. 시골 어디를 가도 그렇듯이 도로가 잘 되어 있고 하천이 잘 정비되어 있다.  이곳도 식장산 기슭에서 내려오는 물이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려갈 수 있도록 하천 정비에 신경을 썼다. 도로 주변에는 축사 같은 큰 건물들이 있다. 밭은 아직 가을 걷이가 끝나지 않은 곳도 있고,  배추가 한창 여물어 가는 곳도 있다. 때로 아무것도 심지 않아 억새가 우거진 곳도 있어 가슴 아팠다. 정부가 내세우는 공약은 도로를 정비하고 하천을 다듬어 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농민들이 짓는 농사에 작물의 종류와 판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것을 팔아 먹을 수 있도록 주선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경작지가 황폐화하고 농민들이 농사를 짓지 않으면 얼마 안 되어 밭 가는 법도 잊어버리고, 볍씨 뿌리는 방법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논은 늪이 되고 밭은 산이 도리 것이다. 논이 물을 가두지 못하면 정비해 놓은 하천으로 물이 쏟아져 내릴 것이다.

 

착하고 부지런한 자모리 농민들은 이 골짜기 밭에 갓을 심었다. 갓이 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해마다 심던 갓이니까 심었는지 그것을 알 수가 없다. 길 양쪽에 있는 살 기슭의 밭이 온통 갓과 부추이다. 어떤 밭은 부추를 심어 가꾸어 무성한데, 그 빈 공간에 갓을 심어 풍성하다. 갓은 검보라색도 있고 녹색갓도 있다. 깨끗하다. 갓 특유의 윤기가 있다. 그래도 만져보면 가칠가칠하다. 소담하고 잘 익은 갓밭에서 노인들이 갓을 다듬어 손질하고 있었다. 돈이 될 것이다. 맞아 돈이 되는 거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마을은 아주 깨끗하다. 새로 지은 양옥과 예전에 지었을 기와집이 마을에 어울려 있다. 사람들도 그렇게 어울려 있을 것이다.

 

갓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께서도 텃밭에 갓을 심었다. 그러나 갓으로 김치를 담가 먹지 않았다. 다른  음식을 해 먹었던 기억도 내게는 없다. 나는 배추나 무우보다 갓이 참으로 신기해 보였다. 보라색 잎사귀가 풍성한 갓이 정말 신기했다. 왜 다른 채소들은 다 초록인데 갓은 보라색일까? 이 계절이 오면 엄마는 날마다 갓을 손질에서 한 광주리 이고 그 멀고먼 청주 시장으로 가셨다. 엄마가 그렇게 무거워 보이는 광주리를 이고 모롱이를 돌아갈 때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른다. 갓을 보면 가슴에 보랏빛 멍이 드는 기분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갓은 김장 김치의 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갓김치가 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자모리 마을 진입로

길가에 잘 자란 갓밭이 있다

갓밭, 자모리 마을, 그리고 괴꼬리봉에서 독수리봉으로 가는 마루금

 

아랫자모실을 지나면서 보니 이곳에도 시내버스가 다니는 것 같다. 군데군데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다. 차들이 가끔 지나간다. 골짜기 한 가운데로 도로가 있고 도로가에는 냇물이 흐른다. 도로는 때로는 시멘트로 포장된 곳도 있고 때로는 아스콘 포장이 된 곳도 있다. 하천은 어디나 정비가 잘 되어 있고 농장으로 가는 곳에 군데군데 다리가 놓였다. 냇물은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치고 그렇게 깨끗하지는  않다. 길에서 한 50여m를 양쪽으로 가면 산기슭이다. 북쪽 산기슭에는 남향으로 마을이 들어섰다. 마을에는 정자나무도 있고 감나무도 있다. 감나무에는 아직 까치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감이 매달려 있다. 이 마을에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꽃을 참 좋아하는가 보다. 국화가 군데군데 피었다. 국화는 집 울타리에도 흐드러지게 피었고, 길가에서도 피었다. 밭둑이나 하천 둑 심지어는 냇물 한가운데도 갓이 흘러내려 풍성하게 자랐다. 마을 사람들이 이 마을에 얼마나 남았는지 남은 사람들은 아직도 부지런하게 살고 있는 모양이다. 옛날에는 불려나가 성을 쌓고 고갯길을 다듬었을 그 사람들이다.

 

중간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장고개도 아직은 까마득하다. 계곡의 끄트머리에는 독수리봉으로 생각되는 봉우리가 보인다. 마루금이 안개 속에 희미하다. 희미한 안개 속으로 산기슭의 낙엽송, 마을 앞의 느티나무, 버드나무, 소나무들이 보기 좋다. 길은 길고 길다. 골짜기는 멀고 멀다. 이 길을 걸으며 신라 군사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주 조용히 걸었을까? 패기와 용맹을 보였을까? 김유신은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아마 그렇게 백제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리라는 것을 예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을 지켜보았을까? 통일의 꿈을 가지고 희망에 부풀었을까? 아마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신라나 백제가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마도 군사들도 그랬을 것이다. 신라의 군사가 되면 어떻고 백제의 군사가 되면 어떤가? 주린 배나 좀 채워주고 찝찝한 몸이나 좀 씻게 해주고 잠이나 실컷 재운 다음에 그리운 아내와 자식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면 그게 기쁨이었을 것이다. 꿈은 김유신에게 있고 무너지는 것은 계백이고 의자왕이다.

 

이렇게 기슭에 따비를 일구어 갓 농사를 짓고 감사무, 대추나무를 심어 조상을 모시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부모를 모시면서 사는 것이 농민의 마음이다. 그런데 그들은 또 여기서 얼마나 시달렸을 것인가? 지나는 군사들에게 밥을 해대고, 세작질을 해야 하고, 옷을 대고 ,품을 대고, 거기서 그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사람이 옛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옥천은 삼국통일의 기점이 된 고을이다. 여기서 통일의 바탕이 되는 싸움이 일어나고, 여기서 기싸움을 하고, 여기를 최종으로 차지한 세력이 삼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면 지금도 옥천을 차지하려고 할까? 맞다. 정치인들이 군민들에게 각종 사탕을 입술에 발라 주면서 이 지역을 차지하려고 한다. 군민은 정말 이제 신물이 날 것이다. 아마도 거짓을 말할 때는 자신도 착각할 것이다. 옥천 사람들은 아주 조용하게 산다. 읍내에 가 보아도 조용하다. 사람들은 고분고분하고 저항하지 않는다.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반감도 갖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아주 조용하다. 그렇다고 왜 생각이 없겠는가? 이렇게 옥천 마을마다 헤집고 다니는 나를 보고 뭐라 할까?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할까? 그냥 청주 사람이 왔겠지. 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런 관심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윗자모실을 지나다 보니 한 갓 밭에서 비교적 젊은이가 갓을 다듬고 있다. 길이 궁금하기도 하고 자모리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말을 건네어 보았다.

"이곳으로 가면 장고개를 넘어 판암으로 갈 수 있습니까?"

그런데 마흔이 좀 넘었을까 하는  이 남자가 씩 웃는다.

"왜 웃으세요?"

"판암으로 가시는데 왜 장고개를 넘으세요. 길도 없는데---. 여기서 저랑 갓이나 좀 다듬으시다가 막걸리 한 잔 하시고 버스가 오면 타고 판암으로 가시지요."

그는 내가 한가하게 등산이나 하고 있다고 비웃는 것이다. '이보소. 나도 일주일간 죽어라 일한 사람입니다. 여기 놀러 온 것도 아니고, 김유신이 백제를 치러 가던 옛길을 걸어 보는 겁니다.'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다시 한 번 씩 웃고는 일러 주었다.

"이 길로 쭉 가세요. 가시면 마지막 방죽이 있어요. 그 길을 죽 따라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 장고개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어요. 그리 가시면 돼요."

친절하다. 김유신에게도 이렇게 친절했을까? 아니면 거짓으로 일러주었을까? 아니면 내게처럼 한동안 빈중거렸을까? 옥천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다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백제 신라 틈에서 자기 생각을 다 말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친구는 매우 철없는 사람이든지 나를 가볍게 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가 일러준 대로 계속 걸었다.

 

마을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오래된 나무, 무덤들, 평평해진 기슭의 농토들, 마을 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걷노라니 어느덧 윗자모실이다. 지나온 길이 까마득하다. 방죽이 하나 나타나더니 더 이상 마을은 없다. 기슭에 숨어 있는 외딴집 몇 채가 보일 뿐이다.  집이 없으니 생가도 없다. 방죽을 넘어 오쯘쪽 길로 올라가니 밭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길이 끊어지고 산 골짜기로 소로가 나 있길래 올라가 보니 산돼지들이 먹이를 찾느라 그랬는지 마구 파헤져 놓았다. 혼자이기 때문에 바로 스틱을 내어 들었다. 그리고 임도로 올라가기로 하고 다시 내려왔다.

 

멀리 보이는 마을 끝 골짜기

마을 언저리에 있는 오래된 무덤과 비석

길가에 국화

 

윗자모실 소류지와 감나무

 

 

방죽에는 물이 많고 멀리서 보아도 아주 깨끗하다. 잔잔한 수면에 명을 다한 단풍이 아름답다. 소류지를 돌아 농가인지 별장인지 앞을 지나서 소로를 들어섰다. 그런데 갑자기 큰 둑이 가로 막는다 사방댐이다. 사방댐이 다른 곳보다 훨씬 높고 크다. 그러나 댐에 괸 물은 하나도 없다. 출입금지 표지판이 있다. 그래도 과일나무 옆으로 고개를 숙이고 기어 들어 가서 댐으로 올라갓다.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둑을 건너니 길이 없다. 밭에 아무런 작물이 없어 밭을 가로질러 임도로 올라섰다. 고요하다. 금방 자동차가 한 대 지나간 흔적이 있고 인적이라곤 없다. 지금도 이렇게 두메인데 예전에는 어땠을까? 아니 장고개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아마도 빈번하게 다녔을 것이다.

 

임도는 가파르던 경사가 도로 완만해졌다. 길가에는 알밤이 떨어져 썩어간다. 시든 들국화가 이슬에 젖어 있다. 이 고개를 넘을 때 군사들은 어떤 마음으로 넘었을까? 통일의 꿈을 가졌을까? 아니면 지긋지긋한 싸움이 끝날 때를 기다렸을까?아마도 이 고개를 넘으면 고기와 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속였을 지도 모른다. 조용하고 편편한 임도를 걸었다. 멀리 차가 한 대 보였다. 여기까지 차가 올라오다니, 산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산은 차를 싫어한다. 산은 문명에 대하여 혐오감을 갖는다. 우리는 발자국 남기는 것만으로도 그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임도가 끝나는 곳에 세워 둔 하얀 자동차에는 사람이 없다. 아마도 이곳에 주차하고 식장산을 오른 모양이다. 그럼 왜 산에 오나? 여기서 장고개(탄현)으로 가는 길을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사방댐 있는 곳에서 골짜기로 올라가야 한다고 했는데 그 생각이 이제서 났다. 찾다 보니 산행 리본이 붙어 있는 소로가 눈에 띠었다. 일단 그곳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그곳은 통일의 길은 아닌 것같다. 그래도 길을 되돌리기는 어렵다. 낙엽이 덮은 오솔길은 너무 가팔라서 지그재그로 되어 있었다. 길은 멀어도 어렵지는 않았다. 한참 오르다가 한 등산객을 만났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다. 탄현을 이리 가느냐 물었더니 여긴 구절사 가는 길이라고 한다. 어쩌지 하고 망서리니 되돌아가면 되지 뭘 어쩝니까 하고 쉽게 말한다. 그 분을 따라 다시 임도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 분은 바로 산행 인터넷 블로그 돌까마귀 주인장이었다. 그래서 물었더니 그 분도 내 블로그인 느림보의 세상사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반가웠다. 장고개 가는 길을 가르쳐 주기에 그 길을 더듬어 고개로 향했다. 그러나 길이 낙엽에 덮여 바로 잃어버렸다.

 

사방댐과 초소

사방댐을 지나 다시 만난 임도

임도 끝 부분에 숨어 있는 자동차-뒤에 식장산으로 가는 등마루-저 자동차 앞쪽으로 가면 장고개이다.

잘못 들어간 등산로- 오른쪽 산으로 올라간다. 이곳은 구절사로 가는 길이다.

 

나무 등걸에 얼굴을 긁히고 망개나무 덩굴에 바지 올이 걸린다. 그렇다고 도로 내려가 길을 찾으려는 용기도 나지 않는다. 얼마 되니 않는 곳이 바로 등마루이다. 올려치기로 했다.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올려치다가 보니 숨이 차다. 잠시 쉬면서 내가 온 길을 돌아 보았다. 끝도 없을 것 같던 갓밭을 지나 이렇게 여기까지 온 것이다. 아직도 걷히지 않은 안개 속에 아득하게 자모리 끝이 보인다. 이렇게 멀리 보이는 길도 사실은 걸어 보면 두 시간이 안 걸린다. 장수들은 말을 달리고 병졸들은 뛰어서 여기 이르렀을 것이다. 신라 서라벌에서 상주를 거쳐 보은으로 보은에서 청산으로 청산에서 군북면으로 군북면 이백리에서 이곳으로 넘으면 바로 지름길이다. 이 너머가 판암이니까.

 

다시 등마루를 향해 올랐다. 바로 올라가면 거기에서 어떤 내외가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가 내게 거기도 길이 있느냐고 물었다. 없는데 그냥 올려 치는 것이라고 했다. 막걸리를 한 잔 하라고 하는데 산에서 막걸리를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랬더니 커피를 한 잔 하라고 한다. 이곳에서 라면을 끓여 먹어야겠다. 배낭을 내려 놓고 준비를 했다. 그런데 코펠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이런 낭패가 있나. 점심을 굶어야 한다. 물은 공연히 두 병이나 짊어지고 왔다. 커피를 얻어 마시는데 부부가 먹다 남은 김밥 두 줄에 눈이 갔다. 김밥을 먹으려느냐고 묻는다. 나는 얼른 먹겠다고 한다. 관음보살은 어디에서나 이렇게 현신하다. 이렇게 오셔서 주림을 해결해 주신다.  김밥 한 줄로 시장기가 해결되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합장 배례하고 바로 장고개로 향했다. 길은 아주 좋다. 사람들이 많이 올라온다. 누구도 이곳이 탄현이라는 것을 얘기하지 않는다. 대전 사람들은 여기를 식장산 줄기로, 구절사 능선으로, 대전 둘레길로만 생각한다. 옥천 사람들은 이곳을 탄현으로 안다. 삼국통일은 대전 사람에게 의미가 없는 모양이다. 백제의 멸망이 사실은 대전 사람에게 더 의미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건 옥천 사람의 일이었다 보다. 얼마지  않아 장고개에 이르렀다.

 

등마루로 올려친 봉우리 -그 위에 길이 있었다.

 

장고개에 이르렀다. 마루금이 아니라 지금도 수백명이 앉아 쉴 수도 있고, 수백 명의 군마가 쉬면서 요기를 하거나 작전 회의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독수리봉이나 꾀꼬리봉에서 양면 공격을 해 내려오면 이 고개에서 쉬던 신라군들은 박살이 날 것도 같았다. 의자왕은 왜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여기서 군데군데 둘러 보았다. 너른 공간이 여러 군데 보였다. 대전에서 올라오는 세천 계곡 길은 길이 아주 좋다. 그런데 옥천에서 올라오는 길은 낙엽에 덮여 희미하다. 잡목이 우거져 찾기도 어렵다. 그러나 '아마 이 길일 것이다'라고 짐작되는 부분이 보였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스틱으로 헤집어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기와편도 자기편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무에 걸쳐놓은 어느 통나무에 앉아 나무들을 바라 보았다. 소나무가 말없이 서 있다. 나는 왜 여기 와서 앉아 있을까? 글감을 찾으려고 온 것이다. 글은 쓰면 무얼 하는가? 아무도 읽어 주지 않는 글을 쓰면 무얼하나? 세상에 메아리 없는 소리는 없다고 한다. 그런데 내 소리는 의미도 메아리도 없다. 노트북을 꺼냈다. 최근에 발표한 인연을 읽었다. 소리를 내어 읽었다. 지나는 사람들이 날 힐끗힐끗 쳐다본다. 아, 목에 가시가 걸린다.

 

이곳에 샘이 있어 물이 어머니 사랑처럼 솟아난다 하여 옥천군 군북면 자모리라고 한다고 들었다. 샘을 찾았다. 샘은 세천 쪽에 있다. 마음 착한 이가 샘을 깨끗이 정리해 놓았다. 물이 솟아 오른다. 물이 흘러 세천 쪽으로 흐른다. 그만한 물에 주변에 늪이 생겼다. 이 물로 여기 몇 개의 주막에 묵는 사람들의 목을 축여 주었으리라. 샘물은 물은 아래로 흘러 세천 사람들에게 간다. 아니면 장을 보고 오는 자모리 사람들에게 어머니 젖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이 아무리 깨끗하고 차갑게 흐른들 집에 돌아가고픈 병졸들의 마음을 적셔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천 오백년을 지나 아무리 시원한들 글에 목마른 나의 갈증도 달래 주지는 못하고 있다.

 

고갯마루는 대전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에 마당이 되어 버렸다. 여기 서 있는 나무들은 1500년 전 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었다가 또 싹을 틔웠을 것인가? 나무들은 아무래도 증인이 되지 못한다. 샘물이 증인이 되어 지켜 볼 것인가? 아니다. 흘러간 물은 이곳에 다시 돌아 오지 못한다. 군사들의 숨결은 나무에 남아 있다. 나무에 남은 당시의 숨결은 오늘 다시 내뱉을 것이다. 여기는 다시 와야 한다. 그리고 성터를 찾아야 한다. 아무래도 꾀꼬리봉에서 독수리봉까지 성이 남아 있을 것이다. 다음에는 판암에서 식장산까지 걸어보기로 하고 발길을 돌린다.

 

이곳을 탄현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본다면 우선 샘이 있어 야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고 자모리에서부터 오는 여기까지 오는 골짜기 길이 비록 좁다고 하지만 5만여명의 대군이 이동하는데 큰 문제가 없어 보이고, 윗자모실에서 여기까지 오르는 길도 세천으로 내려가는 길에 비해 가파르기는 해도 비교적 완만한 길이라 군수 물자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오를 수 있어 보인다. 게다가 판암으로 내려가는 길이 고개에서 볼 때 아주 완만해서 대군이 숨어 내려가는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꾀꼬리봉에 알려지지 않은 성이 있다고 하니 지난번 마성산성에서 볼 수 있는 보루처럼 이 고개를 지키던 백제의 성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장고개- 아주 넓다. 사람들이 많다. 여기가 과연 탄현일까

장고개

장고개에 있는 이정표- 어디에도 백제로 가는길이라는 글은 없다

계곡으로 가는 비탈 - 일은 없다.

예전의 장길이었나-자모리로 가는길- 낙엽에 덮여 있다.

널직한 공터 -소나무가 우거졌다.

고개에 있는 샘물

 

세천으로 내려 가는 길은 아주 좋다. 배고픈 것만 빼고는 기분이 아주 좋다. 걸릴 것도 없다. 그래도 내리막길이라 스틱을 두 손으로 짚으며 내려왔다. 사람들은 아직도 올라온다. 구두를 신고 오는 사람도 있다. 나무가 우거지고 경사가 완만해서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로 제격이다. 나는 내려오면서 뒤돌아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무슨 역사 탐방가도 아니다. 그냥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더듬고 싶다. 한참을 내려오다가 나무데크가 설치되기 시작할 무렵 이정표가 있다. 여기부터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다. 골짜기를 흐르는 도랑에서 이어지는 산기슭에 계속해서 돌담을 쌓아 놓았다. 돌은 어디서 저렇게 많이 왔으며 이것을 쌓은 사람은 누구인가? 돌에 이끼가 까맣게 변한 것으로 봐서 가까운 날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이 혹 성이 아닐까? 내려오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사람들을 피해 부지런히 걸었다.

 

세천 저수지가 눈에 들어 돈다. 어지럽다. 주변에 단풍나무가 아직도 물들이기를 끝내지 못하고 있다. 댐은 상당히 높다. 사람들이 유원지에 가득하다. 길가에 먹을 거리들을 늘어 놓고 파는 사람들, 부침개를 부쳐 놓고, 도토리묵을  무쳐 놓고 호객을 하는 노인들에게서 삶의 무게가 보인다. 예전에 병사들이 지날 때도 이렇게 했을까? 골짜기가 판암 쪽으로 터졌다. 길을 건너고 다리 밑을 지나 대전 옥천 사이의 큰 길을 만났다. 거기가 바로 동신고등학교이다. 여기서 또 607번 시내버스를 타면 된다. 시내버스는 대전 시가지를 한 바퀴 돌아 시외버스 터미널에 나를 내려 주었다. 여기서 남부터미널행 버스를 탔다.

세천으로 내려 가는 길-샘물 바로 아래

세천으로 내려 가는 길

세천 쪽에서 고개로 올라가는 모습 -멀리 고개가 보인다.

대전 둘레길 4구간을 알리는 이정표- 부근에 계속 돌담이있다.

널판지 길

세천 저수지- 부근에 단풍나무는 아직도 푸르다.

오후인데도 사람들이 계속 들어온다.

노점상들-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남부터미널에 내려서 집으로 걸어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자모리 장고개가 정말로 탄현일 수 있다는 생각 들었다. 우선 서라벌에서 상주를 거쳐 보은 삼년산성, 청산, 안내를 거쳐 이곳으로 오는 길이 지름길이다. 고리산성에서 군북면 이백리를 돌아 들면 바로 증약초등학교가 있는 자모리 골짜기로 숨어들 수가 있다. 그래서 판암으로 넘어 바로 유성으로 공주로 부여로 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이 주장하는 오동리와 이백리 갯골 사이의  숯고개를 넘어 보아야 또 생각이 정리도리 것이다. 우선 판암에서 구절사까지 다시 한 번 갔다가 식장산에서 주변을 조망한 다음, 장고개로 내려와 자모리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 증약초등학교까지 다시 한번 걸어보기로 한다. 오늘의 수확은 별로 없다. 그러나 생각은 참 많이 했다. 그것이 헛 생각일지라도 내게는 헛생각조차도 작은 수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