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7일
충북 옥천군 마성산성 답사 (충북 옥천읍 금구리 )
가화리 현대아파트 - 삼성산성(관산성) - 용봉산성(436) - 동평산성 - 마성산성(497)- 용암사- 현대아파트- 구진벼루(월전리)
마성산 등산 지도
장마가 끝나고 아침 하늘이 훤하게 열렸다. 새벽에 동편 하늘을 바라보니 파란 하늘이 보인다. 오늘은 산에 갈 수 있겠구나. 지난 번 아내와 함께 마성산성을 가다가 그냥 돌아왔는데 언젠가 반드시 다시 가려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산에 갈 준비를 했다. 아내는 동강으로 래프팅을 간다고 한다. 혼자 떠나야 한다. 빌빌하는 아비가 걱정되는지 아들이 몇 시간 짜리냐고 묻는다. 아무래도 5시간은 걸릴 것 같다고 했다. 따라나선다고 한다.
운전은 아들이 한다. 그래서 아들 차를 타고 떠났다. 청원나들목으로 들어가 경부고속도로 옥천 나들목으로 나왔다. 지난번 시작했던 가화리 현대아파트 뒤편 도로에 차를 세웠다. 한번 가본 길이기 때문에 바로 찾아갔다.
바로 시작했다. 8시 50분이다. 나무 계단에 물이 괴어 있다. 이끼가 끼어 미끄럽다. 아직 마르지 않은 나무 뿌리와 등걸들이 미끄럽다. 오랜만의 햇살로 지상의 열기가 훅훅 올라온다. 습한 땅에서 데워진 습기가 온몸을 푹 고아 내는 기분이다. 비가 세차게 내렸는지 등산길이 마구 패어 나갔다. 여기저기 자갈이 뒹군다. 나는 이 산의 의미를 아들에게 얘기했다. 숨이 가쁘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고 배경지식이 나보다 많은 아들은 대번 알아듣는다. 지난번처럼 팔각정에 가서 잠시 쉬면서 물을 마셨다. 옥천읍내가 희뿌연 안개에 가렸다. 읍내에서 더위가 이쪽으로 몰려오는 기분이다.
출발지인 가화리 현대아파트 후면 도로에 차를 세웠다.(아들의 코란도 승용차)
물에 젖은 나무 계단 -옥천 읍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올라 용봉까지 간다.
팔각정에서 바라본 옥천읍 -하늘에 구름이 아직 남아 있다.
1. 관산성
■ 높 이 : 해발 303M
■ 형 태 : 삼태기형 석축(안쪽성벽) 및 토석혼축(바깥쪽 성벽)산성
■ 시 대 : 삼국시대(백제계성)
■ 둘 레 : 약 900M
■ 현 황 : 성의 형태는 전형적인 삼태기형 산성으로 다른 산성과는 다르게 3겹의 성벽을 가졌으며 남쪽 성벽은 산의 능선을 따라 동서로 길며 북쪽 성벽은 산의 정상에서 아래쪽으로 처진 형태의 산성이다.(전체적인 형태는 서산성과 같이 南高北低이며 위에서 보면 반원의 모양이다)
남쪽성벽 석성의 길이는 약 280M 정도이며 능선에서 2-3M 정도 아래에 축성되었고 북쪽 성벽은 장대지에서 30M 아래에 석성으로된 1차 성벽이 있으며, 1차 성벽에서 약 50M 정도 아래쪽으로 2차 성벽이 석성으로 축성되었고 또한 이곳에서 약 70M 아래에 토석 혼축으로된 성벽이 외성을 이루고 있는데 군데군데 성벽이 무너져 있으나 토성으로서의 흔적이 뚜렷하며 빗물에 쓸려나간 곳에서는 축성의 방법을 알 수 있는 토성의 단면도 볼 수 있어 토석 혼축으로 축성한 바깥 성벽임을 보여준다.
바깥 성벽 토성의 길이는 480M 정도이며 동쪽 능선에 남쪽 석성과 북쪽 토성을 연결하는 성벽이 140M 가 별도로 존재한다. 한편 석성으로된 남쪽성벽과 북쪽사면의 1차 성벽과 2차 성벽은 완전히 무너져 원형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갖춘 곳이 한군데도 없으며 성벽의 높이는 일부에서 보이는 흔적과 무너진 성벽의 돌의 양으로 보아 5-6M 정도로 짐작된다.
능선의 동쪽과 서쪽에 망대지와 문지가 있고 중앙에는 장대지가 있으며 토성의 서쪽 부분에는 출입로로 보이는 길이 구진벼루와 연결되어 있다. 한편 북쪽사면 2차 성벽의 가운데 부분에는 무너진 성벽의 돌이 대단히 많으며 또한 반원의 모양으로 30M 정도나 흘러내린 점으로 보아 약간 돌출 시킨 치성과 망루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옥천신문-
바로 삼성산성에 올랐다. 지난번에 카메라 배터리가 충전이 덜 된 것을 가져와서 촬영 못한 사진을 찍었다. 잡초더미 속에 있는 표지석에는 이곳이 삼성산성이라고 하지만 바로 신라와 백제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관산성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옥천 구읍과 월전리에 이르는 이 벌판이 바로 전쟁터였다고 볼 수 있다. 아들과 이것 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들이 누구를 위해 싸운 것이냐는 의문을 말했다. 나는 결국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을 위해 민초들이 희생된 것이라 했더니 모두 자기를 위해 싸운게 아니겠냐고 한다. 싸우는 당시는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상사에게 신뢰를 받기 위해서, 상사는 승진하기 위해서, 그리고 최고 권력자에게 신뢰받기 위해서 싸우고, 최고 통치자는 결국 백성의 삶의 풍요를 위해서 싸운게 아니냐는 식이다. 수긍이 간다. 경영이라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다. 그렇게 역사를 보는 눈은 결국 자기 안경의 색깔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성터로 내려가 둘러 보았다. 성은 무너져 돌더미로 변했다. 돌더미를 헤치며 옛날을 생각한다. 우거진 활엽수 사이로 구진벼루가 보인다. 구진벼루는 여기서 1km도 안된다고 한다. 신라가 쌓은 성이라고 하지만 백제의 꿈은 여기서 사그라들었다. 백제인의 꿈이 잡초에 묻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성은 토성과 석성으로 된 3겹의 산성이라고 하는데 정말이지 어디까지 토성이고 어디부터 석성인지 알 길이 없다. 전문가와 함게 와서 설명을 듣든지 여기 안내판을 좀더 자세히 해 놓든지 해야 할 것 같다. 낮은 산이지만 경사가 급해 매우 험준한 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산 자체가 성벽과 같다.
관산성 표지석 뒷면의 설명
안내판
잡초와 잡목에 묻힌 1500년 전의 손길
돌더미
무너진 성돌
2. 용봉산성
■ 위치 : 옥천읍 양수리 망지미마을과 군서면 하동리 옥녀봉 마을 사이의 산
■ 시대 : 삼국시대(백제계성)
■ 형태 : 테뫼형 석축산성
■ 높이 : 해발 437M
■ 둘레 : 약 300M
■ 현황 : 남북으로 형성된 마성산 줄기 중 용봉에서 북서쪽으로 능선이 하나 형성되는데 용봉과 북서쪽 능선 약 100M 정도를 테뫼형 석성으로 성을 축성하였다. 성의 동쪽인 옥천쪽은 경사가 매우 가파른 급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성의 동쪽에 장대지가 있으며 성의 서쪽에 망대지가 있는데 성벽은 남서쪽 성벽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너져 원형의 모습을 알아보기는 힘들다.
남아 있는 남서쪽 성벽에는 길이 약 10M 높이 약 2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는데 원래의 성벽 높이는 4M 정도로 추정된다. 성의 내부 길이는 약 100M 이며 폭은 10-25M 정도로 성의 양끝은 조금 넓고 가운데는 좁은 형태의 산성이다. 성의 내부에는 대지로 보이는 평탄한 지형이 여러 곳 있으며 중간 지점에서는 건물지 또는 주거지로 보이는 지름 약 13M 정도의 타원형으로 된 우묵한 시설물이 있다. 성의 축성 형태는 이웃의 동평산성과 비슷하며 토기조각 등 유물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용봉산성에서의 전망은 주위의 모든 성이 보일 정도로 매우 좋다. 북쪽으로는 자모리성과 노고성이 가깝게 보이며 저 멀리 이백리산성과 환산성도 잘 보인다. 동북쪽으로는 가깝게는 관산성과 서산성 및 삼양리토성이 멀리는 지오리산성과 국원리산성이 보이며 서쪽으로는 성티산성과 계현성이 잘 보인다. 남쪽으로는 가까이 있는 동평산성과 조금 멀리 마성산성이 보이며 동남쪽으로는 저 멀리 마니산성까지 잘 보인다.
용봉산성은 주위의 13개성과 옥천의 들판 및 군서면 동평리 일부와 금산리를 제외한(동평산성에 가려 보이지 않음) 군서면 들판이 잘 보이는 성으로서 망루형 산성으로 활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이웃의 동평산성이 너무 가깝게(직선거리 약 600M 정도) 축성되어 있어 두 성의 관계 및 두 성의 축성 국가와 축성 시기가 의문으로 남는다.
-옥천신문-
용봉에 오르기 전 전망 좋은 봉우리에 올랐다. 지난번에 아내와 왔을 때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여기서 세상이 다 보인다. 나는 선 채로 전망을 설명했다. 저건 고리산, 저건 식장산, 저기 저기 아득한 곳에 성왕의 사적지가 있다면서 아들에게 일러 주었다. 매우흥미롭게 들으면서 당시 백제의 형편을 내게 말해 주었다. 어떻게 들어 아는지 삼국의 형편을 나보다 상세히 알고 있다. 길은 아주 좋다. 여기에서부터는 초행 길이 된다. 한 10분 오르막길을 걸으면 또 한참 내리막길이거나 등마루가 된다.
날씨는 여전히 덥다. 땀이 비오듯 한다. 온몸이 땀에 젖는다. 바지까지 흠신 젖었다. 몸이 홀가분하다. 하늘은 더없이 맑다. 시계가 아주 멀다. 고리산성의 성돌이 보일 것 같다. 옥천 읍내가 한 눈에 보인다. 고장이 잦다고 하는 KTX도 오늘은 평화롭게 달린다.
용봉에 올랐다. 여기에도 산성 표지석이 있다. 용봉산성이다. 지도에는 산성이 없는데 여기에 표지석이 있다. 봉우리에서 내려서면서 산성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돌무더기가 보이지만 모두 흙이나 잡초에 묻혀 있다. 그러나 무너진 돌더미로 보아 성은 대단히 높았던 것 같다. 한 4,5m는 충분히 되지 않았을까? 용봉은 이 근처에서 전망이 가장 좋다. 옥천읍내는 물론이고 추부로 가는 길까지 훤하게 보인다. 영동군 쪽으로 향하는 국도, 고속도로, 기찻길이 가물가물 다 보인다. 그래서 이 봉우리를 차지하려고 그렇게 목숨을 버렸는지 모른다. 대천리 마을이 평화스럽게 보인다.
전망대 봉우리에서 바라본 용봉
용봉에서 바라본 환산(고리산) 구진벼루가 있는 월전리
식장산 아래 성왕로가 가로지르는 뒤편의 아늑한 마을
옥천읍 남쪽 변두리 대천리 마을의 평화스러운 모습
옥천 읍이 한 눈에 보인다
용봉산성 표지석
표지석 뒷면의 용봉산성 설명
용봉산성에서
멀리 보이는 마성산
용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능선-가화리현대아파트가 시작점이다
마성산 아래 마을로 가는 지름길- 여기서 마성산은 30분
3. 동평산성
■ 위 치 : 양수리와 군서면 동평리 사이의 성재 북쪽 100M 산정
■ 높 이 : 해발 405M
■ 형 태 : 테뫼형 석축산성
■ 시 대 : 삼국시대(신라계성)
■ 둘 레 : 약 300M
■ 현 황 : 테뫼형 석성으로 남북으로 능선을 따라 길며 동쪽과 서쪽은 매우 급경사면이다. 성의 남북 길이는 약 100M 정도이며 동서 길이는 20-25M 인데 남쪽 보다 북쪽이 좁다. 또한 성의 지형은 북쪽이 남쪽보다 약간 높은데 성의 구조와 형태가 사양리의 사양성(계현성)과 매우 닮았다.
옥천읍 방향의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은 완전히 붕괴된 상태이며 남쪽 성벽과 서쪽 성벽은 군데군데 무너지기는 하였으나 높이 1.5-2M 길이 100M 이상이 붕괴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데 원래의 성벽 높이는 3-4M 정도로 생각되며 다른 성들과는 다르게 원형의 모습을 제일 많이 갖추고 있는 산성이다.
한편 성의 북쪽 제일 높은 곳에 문지와 망대지가 있는데 성의 남쪽 능선과 연결되는 곳에서는 아무 곳에도 문지의 흔적이 없이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어 궁금증을 낳게 한다. 한편 성벽 틈새 곳곳에 기와 조각과 토기편이 다수 발견되고 있어 현존하는 성벽은 기존의 건물과 시설물을 허물고 다시 쌓은 성벽으로 짐작케 한다. 한편 성벽에 사용한 돌들의 재질 때문인지 성벽의 돌들이 다른 산성 성벽의 돌보다는 상당히 깨끗해 보여 오래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동평산성은 성의 남쪽에 있는 성재(양수리와 동평리사이의 고개)를 지키기 위하여 축성되었으리라 생각되나 성재와 연결되어야 하는 성의 출입문인 남문지가 없고 단지 관산성과 연결되는 북문지만이 있어 의문이 가는데 이곳에서의 전망이 금천리를 제외한 군서면 전체와 옥각리 방향을 제외한 옥천읍 전체가 잘 보여 단지 관산성의 부속성인 관측 목적의 보루가 아닌가 한다.
-옥천신문-
용봉산성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작은 봉우리를 올라가 보니, 널찍힌 공터가 나왔다. 공터가 왠일인가 보았더니 여기가 동평산성지였다. 공터는 잡초가 우거져 있고 매우 습하다. 누구 하나 돌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옥천 사람들은 용봉까지 왔다가 그냥 모두 돌아 가는지 여기부터 길에 사람의 흔적이 훨씬 줄었다. 그래서인지 성의 모습은 더 확실하게 남아 있다. 나는 주변을 열심히 돌아 다니면서 산성의 흔적을 찾았다. 둘레가 247m밖에 안되는 작은 산봉형 산성이다. (산봉형 : 마늘모양과 같이 윗부분은 평평하고 사방이 급경사인 지형에 맞추어 쌓은 성)
신라 때 쌓은 석축이라고 하고 주변에서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기와편이나 토기편은 찾을 수 없었다. 특이한 점은 이 산의 다른 산성에 비해 성을 쌓은 돌이 검은 색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개축한 산성처럼 커다란 돌을 차곡 차곡 쌓아 올렸다. 대개 돌의 크기는 많이 차이가 있었지만 보통 크기는 가로 50cm 세로 20cm 정도로 비교적 큰 돌이었다. 사람들이 들고 나르기에는 적당할 것 같았다. 그러나 큰돌은 혼자서 다루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수구나 암문을 찾아 보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무너진 면을 보면 축성의 방법을 짐작할 수 있는데 바깥쪽은 큰 돌을 쌓고 안쪽에 잔돌, 자갈과 흙을 넣는 방법이었다. 무너져 내린 곳은 잡초에 우거져 있고 성의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은 아주 뚜렷했다. 바로 아래에 있는 군서면에서 대천리로 통하는 고개를 지키는 성이 아니었나 싶다. 주변에 잡목이 우거져 전망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다. 마치 옥천군이 다 보일 것 같은 용봉산 전망이 제일이었다.
동평산성은 성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정상인 마성산은 아직 멀었다. 몇 봉우리의 등성이를 넘어야 한다. 길도 정확하지 않다. 사람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들은 자꾸 무리하지 마세요. 무리하지 마세요 하면서 나의 의지를 약하게 한다. 그러나 언제 다시 오랴 하는 생각으로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동평산성의 표지석-뒷면을 찍지 못했다.
동평산성 표지판
잡목에 묻혔어도 성의 모습이 뚜렷하다
잡초에 묻힌 성의 모습
무너진 성
축성의 모습이 뚜렷하다
무너진 돌더미
무너진 돌더미를 보면 성의 높이를 짐작할 만하다
1500년전 흔적이 견고하고 뚜렷하게 남았다
무너진 면을 보면 축성의 방법을 알 수 있다
아직도 튼튼한 옛성-성치산성과는 비슷한데 호점산성과 많이 다르다 운주산성과도 다른 모습이다.
비교적 정제되지 않은 모습-성의 높이를 짐작할 만하다
4. 마성산성
■ 위 치 : 대천리와 군서면 금천리 사이의 산정
■ 높 이 : 해발 510M
■ 형 태 : 테뫼형 석축산성
■ 시 대 : 삼국시대(신라계성)
■ 둘 레 : 약 150M
■ 현 황 : 테뫼형으로 작은 규모의 석성이다. 마성산 산정의 동서로 조금 긴 능선 중 서쪽 끝 부분에서 다시 남북으로 짧은 능선을 이루는데 마성산성은 남북의 짧은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으나 현재는 남동쪽의 일부 성벽을 제외하고는 모두 허물어져 원형의 모습을 알아보기는 힘들다. 망대지는 남쪽과 북쪽의 끝 부분에 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무너진 돌의 량으로 보아 망대지는 5M 이상으로 짐작되며 나머지 성벽은 3M 정도인 것 같다.
이곳에서의 전망은 옥천읍 전체와 군서면이 잘 보이며 특히 금천리 계곡 전체가 한눈에 보여 마성산성의 주 임무는 금산군 군북면에서 금천리 계곡을 따라 옥천군 군서면 또는 옥천읍으로 오는 적을 경계하는 것으로 보이며 관산성을 신라가 장악한 후 동평산성과 함께 관산성의 부속성인 관측 목적의 보루가 아닌가 한다.
-옥천신문-
마성산성 가는 길은 결코 가깝지 않았다. 그러나 일찍 출발했기 때문에 시간은 넉넉하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조금 지치는 기분이다. 동평산성에서 마성산성으로 향하는 길에 군서면 소재리로 바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다. 소재지까지 1km라고 한다. 30분이면 충분하다. 그걸 보니까 더 배가 고팠다. 그러나 우리 배낭에 아직 도시락이 있고 물도 많이 남았다. 시간을 보니 한 3시간 30분정도밖에 걷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칠까? 아들에게 의지하는 마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함께 오면 앞에서 힘차게 올라가는데 왜 아들 앞에서 이렇게 지친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처음 나타난 이정표의 유혹을 물리치고 마성산으로 올라간다. 한봉우리를 넘고 두 봉우리를 넘어 안부에 도착했는데 망지미 마을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보였다. 편편한 곳에 앉아 점심을 먹고 내려가기로 했다. 아들이 "아버지 무리하시는 것 같아요."하면서 눈치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려다 보니 겨우 두어 봉우리 남았다. 오늘처럼 내리막길의 유혹을 받아 보기는 처음이다. 올라간다. 그러나 산은 그렇게 쉽게 제 모습을 보여주는 데 아니다. 멀리서 봤을 때 두어 봉우리였던 것이 올라 서니 또 두 봉우리가 보인다. 땀은 소나기를 맞은 것 같다. 한 봉우리를 남기고 편편한 그늘을 찾아 점심을 억었다. 도시락이 모자란다. 짠 반찬까지 다 억었다. 배낭을 털어 보니 초콜렛이 하나 나왔다. 아들을 주지 않고 내가 먹었다. 물도 얼마 남지 않았다. 또 일어섰다. 앞으로 올라간다. 다른 때 같으면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길인데 하면서 말이다.
점심을 먹고 한 30분 정도 올라가니 마치 너덜지대처럼 돌더미가 나타났다. 나는 너덜이라고 했다. 그러나 너덜이라고 하기에는 돌이 정교하다. 돌을 하나하나 짚어 보니 다듬은 흔적도 보인다. 너덜이 끝나는 지점에 누군가 돌탑을 두세개 쌓았다. 잡목 돌을 밟으며 조심해서 올라가니 잡목 속에서 마성산이란 표지석이 보인다. 드디어 마성산이다. 마성산성 안내판이 있다. 잡목이 우거지지 않았다면 전망이 아주 좋을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보일 듯하다. 지도에는 497m라고 했는데 표지판에는 510m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성도 신라 산성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전략적 요충지였을 것이다.
무너진 돌더미로 보아 어마어마한 높이의 성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이 작고 높이가 높으면 무엇에 쓰였을까? 짐작에 망루가 아니었을까 한다. 관산성으로 알려진 삼성산의 부속산성으로 망루로 군사들 몇이 여기 올라와 주변을 관찰하고 있다가 본부에 알리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역사에서는 아직도 관산성의 위치를 정확히 고증하지 못하고 있다. 관산성이 환산의 고리산성을 말하는 것인지 이곳의 삼성산성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 여기를 삼성산성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러나 월전리 성왕 사절지에서 가까운 곳이라면 여기가 맞을 것이다. 아니면 지금 성왕로나 경부선이 뚫고 지나가는 토성이 바로 관산성일지도 모른다. 바로 내 생각이다.
성돌을 주워서 돌탑을 쌓았다. 이것은 문의 구룡산성도 마찬가지이다. 잘하는 일처럼 힘은 들었겠지만 사실은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이다. 이곳에서는 옥천읍 군서면 일대, 군북면 소재지, 장용산, 추부로 가는 길까지 다 내려다 보였다. 지금은 자목이 우거졌지만 옛날에 나무가 없을 때는 주변의 모든 것이 다 보였을 것 같다. 눈이 좋은 사람의 눈에는 사람이나 말이 달리는 모습까지 관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성산 정상석
마성산성 표지판
마성산성 표지석
뚜렷하게 남아 있는 성의 모습
무너진 성석으로 보아 높이가 어마어마한 성이었을 것이다.
성을 훼손하여 쌓은 돌탑
아직도 튼튼한 석축
너덜처럼 무너져 내린 성
돌탑 옆에서 -아들의 모습
힘없어 보이네
주변의 모습
5. 내리막길
내리막길은 단순하지 않았다. 용암사 쪽으로 간다는 것이 잘못해서 장령산 산림욕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한 20분 내려간 길을 한 30분 걸려서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용암사 쪽으로 능선을 탔다. 처음에는 길이 뚜렷했으나 점점 길이 모호해진다. 반바지를 입은 다리가 풀에 쓸리고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쳤다. 쉬지 않고 내려와 겨우 임도를 만났다. 그러나 걷기는 산보다 좋아도 시멘트 포장 임도를 거의 1시간을 걷는 동안 다리가 더 아프고 발이 아프다. 용암사에 기대를 많이 걸었는데 천년 사찰이라는 절은 새로 지은 건물이었다. 뒷모습만 보고 마을 앞으로 오니 버스 정류장도 택시도 없다. 3시 40분이다. 6시간 50분을 걸은 것이다. 물론 성을 둘러 보느라 보낸 시간이 많을 것이다. 기진한 것은 땀을 많이 흘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은 아비와 함게 다니느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한 첫 산행이 모호한 길을 찾아 나서는 길이었으니 앞으로도 계속 나의 산행이 걱정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자식이 더 걱정이다. 산을 좋아하지 않으면 모르거니와 만약 산을 다닌다면 산에 대한 기본 상식을 함께 다니면서 일러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저수지 근처에서 대책없이 차를 기다리는데 순찰차가 한 대 온다. 버스시간을 물으니 버스는 하루에 두 번박에 안 다닌단다. 내가 택시를 물으려는데 아들이 차 있는 곳까지 태워 달랜다. 경찰관들이 쾌히 승락한다. 아주 쉽게 출발지에 왔다. 고맙다. 우리를 기다리는 코란도가 반갑다.
각고 끝에 임도를 만나
옥천읍 삼청리 용암 농장 부근에서
저수지 건너 우리 걸어온 등마루가 아득하다
감사한 민중의 지팡이
6. 구진벼루
구진벼루는 요전에 갔다왔지만 그 때 사진을 찍지 못했고 현장을 아들에게 보여주어야겠기에 다시 갔다. 녹음이 우거지고 장맛비에 시냇물이 지저분하다. 아들은 꽤나 감명 깊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는 주변의 지형을 다시 살피면서 당시에 죽음을 당하는 성왕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곳에서 목이 잘리어 목은 아들인 태자 창에게 보내지고 몸은 염장했다고 하는데 염장터가 여기 어디쯤 될 것이다.
성왕 사절지 주변의 모습
주변의 강가-저쪽으로 가려다가 그랬을까?
비의 모습을 둘러본다
성왕 유적비
월전리 모습
올 때는 대청호숫길로 왔다. 산남동 토종장수옻닭삼계탕 집에 가서 엄나무 삼계탕으로 오늘을 마무리한다. 더위가 말이 아니다. 땀을 정말 많이 흘렸다 몸이 가볍다. 온몸에 찌꺼기들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다. 이제 옥천 읍내 주변의 토성들을 답사하는 것이 숙제이다. 성에 대한 고증이야 역사학자들의 몫이고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서 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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