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忠淸의 山城

옥천읍 삼양리 토성-삼거리토성-서산성

느림보 이방주 2011. 10. 10. 02:21

옥천의 삼양리 토성- 삼거리  토성- 서산성 답사

 

2011년 10월 9일

 

  오늘은 그동안 벼르고 벼르고 벼르던 옥천읍내 낮은 야산에 위치하고 있는 삼양리토성, 삼거리 토성, 서산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날씨는 참 좋다. 아내는 마침 옥천에서 열리는 생활체육테니스대회에 1박2일로 참석하였다. 옥천에 가면 아내와 운동장에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들이 모처럼 집에서 노는데 산을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산이 아니라 마을 뒷산이다. 그런데도 지난번 마성산성 답사 때 내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걱정이 되었는지 운전을 해 준다고 한다. 오후에 중요한 만남이 약속된 것 같아 혼자 가겠다고 했더니 굳이 따라 나선다. 나는 고맙고 편했지만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라는 것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경부고속도로 옥천 나들목에서 삼거리 쪽으로 달렸다. 옥천 시외버스 터미널에 주차를 하고 삼거리 쪽으로 갔다. 옥천에 가면 둘째 누님이 생각난다. 누님이 결혼해서 처음에 매형의 직장이 옥천이라 여기서 살았다. 중학교 2학년 땐가 옥천엘 한 번 다녀간 적이 있다. 그 때는 아주 작은 소도읍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옥천읍 금구리가 주소이던 기억이 또렷한 누님에 대한 그리움에 가슴이 저리다. 아들에게 둘째 고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내가 백제와 신라의 성을 찾아 그 때의 이야기를 생각해 내는 것 만큼이나 아득한 옛날 이야기로 듣는 눈치다. 그러나 서울에 대학 본고사를 보러 갔을 때 어린 조카에게 아침에 따뜻한 국을 끓여 먹여 보내던 고모를 잊지 않을 것이다.

 

옥천읍 주변의 산성과 백제-신라 사적지 분포도

 

환산_식장산.jpg

옥천지방의 산성 배치도 : 식장산-이백산- 환산과 용봉-관산성-서산성으로 대치

 

1. 삼양리 토성

 

  지난 번에 답사했던 관산성-용봉산성-동평산성- 마산성에 비하면 오늘은 그 끝자락에서 갈라진 세 갈래 산성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옥천이라는 작지만 소중한 요충지를 방어하는 데는 높은 곳에 있는 마성산성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터미널에서 삼거리 쪽으로 가다가 가게 주인에게 삼양리 토성에 대하여 물으니 잘 알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옥천 신문에 실린 향토 사학자 조일권씨의 답사 결과 보고서에 의하면 이정표도 없고 토성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옥천에서 살아본 일이 없는 나로서는 찾기가 더욱 힘들 것이다.

 

  이리저리 마을을 기웃거리다가 옥천 신문의 기사에서 밝힌 대로 오른쪽 산 등성이를 오르니 토성의 모습이 뚜렷하다. 토성으로 오르기 전에 고구마 밭과 들깨밭이 있다. 배추와 무를 심은 비탈밭도 있다. 토성은 뚜렷하지만 계속 철조망을 설치해 놓아서 마음 놓고 들어갈 수가 없다. 철조망을 피해서 갈 수는 있지만 그것이 어떤 목적인지를 알 수가 없다. 철조망을 몇 차례 넘나들며 올라가니 이번에는 잡목이 우거져 있고 낙엽에 길이 덮여 흔적도 없어 올라갈 수가 없다. 성터인 듯한 둔덕으로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겨우 몇 걸음 옮기다가 내려왔다. 성은 능선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가 경부 고속도로를 만나 끊어졌다가 마을을 안고 돌아 서산성 쪽으로 감싸 안았다. 내려오는 길에 산밤이 지천이다.

 

  지금 보기에 성은 아주 소규모처럼 보이지만 당시에 이만한 토목 공사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이다. 포크레인도 없고 덤프 트럭도 없이 인력으로 흙을 모으고 등짐으로 져다가 이런 둔덕을 쌓으려면 몇 해를 두고 부역을 했을 것이다. 옥천의 기름진 옥토를 그냥 묵히고 일하지 못하는 겨울에는 앉아 굶어야 했을 서민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봄이 되어 산으로 풀뿌리를 캐고 송기를 벗겨 연명하다가 또 공사장으로 끌려 나갔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으로 옥천은 온통 산성 천지이다. 옥천이라는 소도읍을 차지하기 위한 권력의 횡포가 오늘에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지금은 그런 권력이 없을까? 역사는 그들을 응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까? 산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옻나무 등걸을 헤치고 다시 마을로 내려 왔다.

 

삼양리 마을 표지석- 주변에 꽃이 아름답다.

 

■ 위 치 : 삼양리 시외버스터미널과 고속도로 사이의 작은 능선 
■ 높 이 : 해발 140M 
■ 형 태 : 포곡형 토성 
■ 시 대 : 삼국시대(백제계성) 
■ 둘 레 : 약 500M  

■ 현 황 : 토성으로서 성의 둘레를 모두 흙으로 쌓거나 능선을 이용하였으며 지대가 낮은 능선은 흙으로 높이 쌓아 보강하였다. 특이한 것은 서쪽 성벽을 본성 바깥에 또 하나의 성벽을 두어 의문을 갖게 하는데 지형구조상 그러한지 아니면 성의 방어를 튼튼히 하게 위한 것인지 연구 대상이라 하겠다.

서쪽의 바깥성벽과 남쪽 성벽의 축조 방식은 이원 현리토성의 남쪽 성벽 및 서산성의 북쪽 일부 성벽과 매우 흡사하다. 한편 성의 전체 모양은 거의 원형을 이루며 가운데가 낮고 남쪽에 수구지를 두었으며 문지는 남쪽과 북쪽에 두었는데 북문지에서는 경부고속도로를 건너 서산성과 마주보며 남문지는 수구지와 같이 있는데 시외버스 터미널 방향이다.

장대지로 보이는 곳이 서산성이 바로 보이는 북쪽 능선에 두어 구읍 방향에서 삼거리 검문소로 나가는 길목을 지키는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토기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삼양리 토성은 청성면의 굴산성과 같이 출입이 매우 용이한 작은 능선을 이용하였으며 인근에 있는 서산성 및 관산성과 함께 삼각형을 이루어 요새를 이루는 옥천군의 옛 치소로 생각된다.  
 ■ 문 제 점 : 삼양리토성 역시 안내판은 없으며 성안에 민가가 존재하여 축사등이 있어 성의 내부가 많이 훼손되었으며 관찰 또한 자세히 할 수 없었다. 
 ■ 찾아가는길 :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전쪽으로 약 20M 정도가면 오른쪽으로 능선을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이 곳에서 약 30M 올라가면 서쪽의 바깥 성벽에 다다른다.

 

남문지로 올라가는 토성-잡목이 우거진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잡초에 우거진 토성의 흔적

성벽 아래 내려와서 올려다 보면 토성이라는 것이 확연하다-언덕이 보인다.

 

  올라간 길을 내려와서 마을로 들어 갔다. 이 마을은 어떤 역할을 하는 마을이었기에 성으로 감싸 안았는지 기록에도 없다. 아주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으니 찾을 수가 없다. 마을 주민에게 물었더니 밭 끄트머리를 가르쳐 준다. 아직 채소나 곡식을 거두어 들이지 않은 텃밭 고랑을 밟고 산으로 올라가도 아무도 말하는 이가 없다. 산밤은 어디나 지천이다. 삼양리 토성이 남쪽에서 동으로 돌아 가다가 고속도로에 의해 끊어지고, 예전에 북쪽 으로 빙돌아 내렸을 법한 산줄기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마을이 있다. 마을은 제법 살기가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밭에서 일을 하는 이들이 삼양리 토성을 알지 못한다. 외지에서 들어와 산다는 것이다. 이 마을의 앞에는 대전으로 향하는 구도로가 있고 삼거리에서 서쪽 부여로 향하는 성왕로가 있다. 그러니 여기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얼마나 요새로 여겨질 것인가?  

 

  산의 초입은 온통 검은 돌덩이가 널부러져 있다. 그런 돌덩이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인적이 별로 없었는지 거미줄이 얼굴에 마구 늘어 붙는다. 역사의 거미줄은 누구를 얽어 구속해 왔을까? 성의 흔적으로 볼 수 있는 둔덕이 보인다. 주변에 성곽 같은 돌더미가 있어 순수한 토성이 아니라 석축과 토성의 혼축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록에는 토성으로만 나와 있다. 돌무더기가 여기 저기 보이는데 자연석으로 보이기도 하고 깎아 만든 듯한 느낌도 든다. 하긴 사람의 손길조차도 세월이 지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토성도 이미 성벽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잡목이 우거지고 오솔길이 생겼으니 천년 천오백년 세월은 사람도 다 자연으로 되돌리는 것인가 보다. 

 

길은 아주 짧았다. 마루에 오르니 마을이 다 내려다 보였다. 이 마을이 당시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성이 필요했을까? 군사 요충지로서 지휘본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이 성은 삼거리를 건너 관산성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뚜렷하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북쪽으로 더 가면 만나는 서산성과 함께 신라에서 올라오는 군사를 겹겹이 막고 공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관산성에서는 숯고개(탄현)으로 공격하는 군사를 방어하고, 서산성과 함께 북쪽 즉 문의나 회인 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여기에서 구진벼루가 바로 저기이다. 2km도 안된다. 이 요새를 시찰하던 성왕이 죽음을 당한 곳이 바로 저기이다. 신라의 성이었던 관산성을 점령한 흥분과 성취감에 들떴던 성왕이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삼국의 역사는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성왕이 죽지 않고 김무력 장군이 전사하고 성왕의 사위였던 진흥왕이 패배했다면, 김춘추의 물밑 외교가 빛을 보지 못하고  백제가 통일을 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가지로  가정할 수 있다. 당에게 먹히는 최악의 경우를 맞이할 수도 있고 백제가 삼한으 통일하여 우리 문화가 더욱 깊이 있고 품위있게 발전했을 수도 있다. 사실 신라는 어느 정도향락 문화이고 백제는 문화 예술을 숭상한 역사였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아람 몇 알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산밤은 배낭에 하나 가득 넣을 만큼 널부러져 있다.  나는 두어 개만 맛보면 된다. 그건 내 것이 아니다. 마을 사람들 소유이든지 아니면 다람쥐들의 양식일 것이다. 내 것으로 만들려는 억지나 죽어도 나누어 먹지 않겠다는 탐욕이 성벽을 만든다. 옥천은 그런 권력자들의 탐욕스런 싸움터가 되고 이 고장 사람들은 그런  피해지역이다. 이 고장 사람들이 지금은 그런 권력자들의 피해를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잡목에 우거진 토성터- 여기저기 성돌로 여겨지는 깎은 돌이 보인다.

흩어진 돌무더기- 자연석일까 사람의 손길이 닿은 돌일까

망루일까- 여기 블록으로 참호를 지어 놓았다.

 

 

2. 서산성

  삼거리 토성은 생략하기로 하고 서산성을 찾았다. 삼거리 주유소 앞에서 기웃거리며 지도를 보았다. 아들이 시외버스 터미널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회수해 오는 동안 나는 삼거리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서산성을 찾을까 하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나 옥천 사람들도 서산성의 위치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없다. 서산성은 옥천 사람들을 괴롭힌 산성일까 아니면 옥천 사람들을 보호해 준 산성일까? 옥천 사람들은 백제를 원했을까 신라를 원했을까?

 

  이곳에서 보은 방향 국도를 따라 경부고속도로 밑을 빠져 나가 한 200m 쯤 가니, 왼쪽에 등산로 안내판이 보였다. 등산로 안내판에도 서산성의 위치는 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산성이 삼양리와 옥각리의 경계 지점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분명히 이 산줄기 일 것이다. 옥천에 마성산은 두 군데이다. 서쪽으로 옥천읍과 군서면의 경계인 마성산이 있다. 이 산은 관산성-용봉산성-동평산성-마성산성이 이어지고 장용산의 한 줄기와 만난다. 또 하나의 마성산은 이곳에서 구읍 쪽으로 육영수 여사 생가 뒷산으로 이어져 대청호를 내려다 보게 되는 산이다. 옥천 사람들은 지금 내가 걷고 있느 마성산을 마성산으로 안다. 외지 사람들도  대청호 둘레길을 많이  걷기 때문에 육여사 생가 뒷산을 마성산으로 안다. 그러나 옥천의 방어선은 군서면 경계의 마성산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산성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마성산 등산로 안내판- 서산성 안내는 없다.

 

등산 안내 지도 바로 밑에는 이렇게 토종닭이 놀고 있다.

 

등산로를 따라 비탈길을 올라갔다. 땀이 나고 배가 고프다. 배가 고프니 묵묵히 따라오는 아들에게 미안하다. 오르는 길이 고갯길이 분명하다. 고개로 오르는 길목에서 바라보니 옥천의 국도와 고속도로가 다 보인다. 이곳이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라는 것은 1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 인가 보다. 그러니 이 성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가 짐작이 간다. 안부에 오르니 옥각리로 통하는 고개라는 것이 분명한데 옆으로 너른 공터가 보인다. 누군가 한동안 경작을 해온 흔적이다. 그러나 이곳이 문지라는 것을 까막눈으로 봐도 알 수 있다. 여기가 바로 남문지라는 것이다. 터는 상당히 넓어 한 200평은 족히 될 것 같다. 고갯길은 지금도 사람들이 다니는 흔적이 뚜렷하다. 잡초가 우거져 기와편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 것은 발굴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그냥 옛 사람의 자취를 더듬기만 하면 된다. 문지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뚜렷하다. 그리고 군데 군데 석성의 흔적이 보인다. 석축 위에 흙을 쌓아 토성을 만든 흔적이 지금도 알아 볼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옥천의 주요 건물들

옥천 나들목의 모습

 

■ 위 치 : 서정리와 삼양리 옥각리 중간지점의 산(현 우시장 뒷산) 
■ 높 이 : 해발 198M 
■ 형 태 : 포곡형 석축 및 토석혼축산성 
■ 시 대 : 삼국시대(백제계성) 
■ 둘 레 : 약 1.000M 

■ 현 황 : 포곡형 석축 및 토석 혼축 산성으로 완전히 붕괴되어 있으며 동서 양쪽의 산봉우리와 북쪽의 낮은 봉우리 및 북서쪽의 계곡을 연결하여 축성하였다. 탐방자의 미숙한 눈에도 성터로서는 최적지로 보일 정도의 지형으로 전체적인 형태는 삼각형의 모양이며 南高北低의 형태이다.

남쪽의 성벽은 천연의 급경사면을 이용하였으며 서북쪽의 계곡에는 수구와 문지를 두었고 남쪽 성벽의 가운데에 폭 4M 정도의 남문지가 있다. 한편 동쪽 봉우리에는 문지와 망대지가 있고 이곳 봉우리의 가장 높은 곳에 장대지가 있으며 서쪽 봉우리에도 망대지가 있다.

또한 수구에서 동쪽 봉우리와 연결되는 낮은 봉우리에 북쪽망대지가 있으며 이곳 망대지에서 동쪽 망대지까지의 북쪽성벽은 토석 혼축하였으나 부분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성벽을 돌로 쌓아 불리한 지형을 보완하였고 수구에서 서쪽 망대지까지는 성벽을 토석 혼축 하였다.

북서쪽의 문지는 남문지에서 볼 때 계곡의 좌편에 있어 서정리와 옥각리 사이의 진터벌로 나가며 성안에는 넓은 대지가 곳곳에 있어 많은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계로 짐작되는 토기편과 기와편도 발견되었다. 서산성은 성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되었으며 이웃 관산성과 함께 상주 - 옥천 - 부여(공주)로 통하는 길을 방어하는 주요한 성이며 성이 얕은 구릉위에 축성되어 있어 보민용 치소의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출토되는 유물이 대단히 많아 이 산성을 중심으로 신라와 백제가 서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탐방자 본인의 추측으로는 서기 554년의 신라와 백제의 사이의 관산성 전투는 이웃 관산성과 이곳 서산성을 중심으로 벌어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 문 제 점 : 서산성터로 가는 입구의 안내판은 물론 유적지의 현지 안내판이 전혀 없어 아쉬우며, 또한 성안 곳곳에 민묘가 자리하고 있어 성터의 훼손이 우려된다. 우리군의 옛 치소로 생각되는 성이니 만치 옥천군에서 많은 관심을 기울여 관리해 주기를 기대한다.  

옥천신문

남문지의 고갯길 흔적

 

고갯길은 지금도 사람들의 왕래 흔적이 짙다

남문지의 너른 공터

 

남문지의 공터와 잡초

 

잡목에 덮인 성터

 

서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아주 좋다. 사람의 왕래가 많은 것 같다. 이곳을 통하여 마성산으로 오르는 대청호 둘레길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별 생각없이 산을 다니면서 역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그냥 산을 밟고 지나가는 것에 의미를 둔다. 때로 옛날의 전설이나 지역의 역사를 생각해 보는 것도 등산의 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산줄기는 야산이라고 해도 상당히 길다. 경사는 완만하고 높지는 않지만 주변을 다 내려다 볼 수 있다. 특히 여기서 동으로 가면 보은, 북으로 가면 군북면을 지나,  회인, 문의로 통하는  길목이다. 서쪽으로 가면 숯고개를 지나 부여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 된다. 그리고 관산성에 이어져 신라와 백제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을 것이다. 옥천의 너른 들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서산성에서 삼거리 토성을 거쳐 관산성에 이르는 이 요새를 점령해야만 할 것이다.

 

얼마 오르지 않아 서산성 표지석을 발견하였다. 표지석이 있는 곳도 건물이 있었는지 꽤나 넓어 보인다. 역시 잡초가 우거져 있다. 주변을 둘러 보아도 잡초 때문에 유물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서 산성에서는 많은유물이 출토되고 많은 건물지가 있다고 한다. 여기 저기 공터가 보이는 것으로 봐서 건물이 있던 자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지만 무슨 건물이었는지 기록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산성은 아마도 주변의 주민들을 대피시켜 보호했던 성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순전히 내 생각일까? 과거에도 주민들을 이렇게 보호하는 정치인이 있었을까? 백제의 산성이라면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마성산 쪽으로 통하는 길

성벽일까

석성의 흔적

 

서산성의 표지석

서산성 표지석 뒷면

 

표지석 옆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이래야 제과점 빵이다. 그러나 우리 부자는 다같이 빵을 좋아하기 때문에 점심이 충분히 된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간 길을 그대로 되짚어 왔다. 마음 같아서는 마성산까지 걷고 싶었으나 아들이 바쁜 약속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빨리 내려왔다. 또 테니스 게임을 하고 있는 아내가 점심을 먹지 못했으니 빵을 사왔으면 하고 기대를 해서 바로 내려왔다. 옥천 읍내로 들어가 제과점을 들러 빵을 사가지고 아내가 있는 옥천고 테니스장에 갔다. 옥천고는 처음 들어가 보았다. 옥천은 작은 야산이나 주변이 모두 전장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옥천고 옆이 바로 옥천 나들목이라 돌아오는 길이 어렵지 않았다.

 

오늘의 답사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과거가 현재에 어떤 바탕이 된다면 과거 치열한 전장이었던 이곳은 오늘 이곳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어떤 바탕을 마련해 주었을까?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아직도 수없이 많이 남은 옥천의 산성 답사가 그 의문을 풀어 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