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님네야 벗님네야
-비로산장에서-
아침에 동쪽 하늘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볕을 한 줌이라도 내려주시려나. 그러나 어느새 다시 구름이 검은 치맛자락을 두르더니 이내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올여름 하늘은 우울하다. 우울을 잔뜩 감추어 두었다가 날마다 지상에 흩뿌린다. 그래서 올여름은 지상까지 우울하다.
습습한 대기가 권태로 투실투실 묻어나는 휴가 둘째 날 아침이다. 이런 지독한 권태로움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가난한 궁리가 나를 더욱 권태롭게 할 때, 친구 不慍 선생이 전화를 울렸다.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不慍의 엄한 분부대로 목적도 방향도 모른 채 나의 늙은 나귀를 그의 마당에 등대시켰다. 마당에서 만난 不慍은 경쾌해 보였다. 엷은 담배연기가 허공에 그려놓은 그림은 그대로 한 폭의 예술이다. 그것도 잠깐, 맑은 하늘아래에서 파르스름하던 연기는 바람에 날리는 는개에 젖어 젖빛처럼 뿌옇게 변해 버린다.
不慍은 아직 감추어 두고 싶은 재미스러운 설계를 가지고 있는지 가벼운 흥분이 안경 너머에 숨어 있다. 친구 홍선생이 도착한 후 나는 비로소 나귀의 불구멍에 키를 꽂아 힘을 넣었다. 낡은 무소는 마치 우주로 날아가기나 할 듯이 ‘부르릉’ 영각을 한다. 가는 길에 친구 김선생을 만나자 그제야 속리산을 일러 주었다.
일주문에 도착했을 때도 는개인지 이슬비인지 자꾸 안경알을 흐린다. 우산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정하지 못하는 것도 답답하다. 그러나 빗속에서도 옷자락마다 묻어 있던 권태가 슬금슬금 달아나는 것 같았다. 세심정이 있는 금강골의 맑은 물소리에 대한 기대가 이미 우울을 쫓아낸 것일까?
세심정 주막집 주인은 출타하고 없다. 비 내리는 아침에 누가 여길 오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왔다. 마당에는 비에 젖은 탁자들이 퉁퉁 불어 있고, 일산은 가릴 햇빛이 없어 축 처진 어깨를 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인처럼 마당에 짐을 풀고 이것도 쥐어보고 저것도 만져보며 서성거렸다.
금강골에서 곤두박질치며 쏟아지는 물이 으르렁거린다. 물은 원만한 바위를 돌아내릴 때는 펑퍼지고, 모나고 성질 사나운 바위를 지날 때는 소쿠라진다. 물은 때로는 쪽빛이다가 때로는 하얗게 부서진다. 도시의 하늘은 우울을 쏟아내는데 이곳의 하늘은 도시인의 우울을 씻어낸다.
不慍은 장수처럼 비로산장 진격을 명하였다. 새로운 작전은 궁금해할 것도 검증할 필요도 없다. 우리 셋은 그냥 그의 엄명에 순종하는 행복한 병사가 된다. 금강골에 넌출져 쏟아지는 물줄기에 가랑이를 적시는 것도 또한 천진하게 나이들어 가는 이들의 사는 재미이다.
절벽에 매달린 산장에는 초록을 닮은 얼굴들이 게으른 조반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부끄럽지않은 게으름을 누리고 있었다. 는개는 아직도 날리는지 잦았는지 계곡에 놓인 들마루에 물기가 촉촉하다. 성난 듯 쏟아져 소쿠라지던 금강골 계수도 욕심을 버리고 비로산장 앞에서는 티 없이 모래를 씻으며 잔잔하게 괴었다. 나뭇잎이 떨어져 수면에서 빙글빙글 탑돌이를 한다. 나도 따라 돈다. 가슴이 수면에 가라앉은 산그늘처럼 한가롭다.
보살 같은 미소를 머금은 여인이 권하는 대로 누다락에 상을 펴고 앉았다. 산에서 바람이 내려와 머리에 가슴에 쌓인 세상의 먼지를 씻어간다. 바위틈을 흐르는 물소리가 자분자분 금강경을 왼다.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이 이렇게 고요했을까? 세심정에서 으르렁거리며 호령하던 염불이 불과 천여 보 올라온 이곳 비로산장에서는 달래듯 어루만지듯 고요하다. 여인이 상을 보아 온다. 도토리묵무침, 감자전이 천년의 세월을 되돌리듯 분위기를 고즈넉하게 한다. 조롱박이 동동 뜨는 동이에는 색깔 좋은 향이 가득하다. 이른바 비로산장 선약이다. 초록으로 잠긴 하늘에 발그레한 꽃노을이 비쳤다. 벗들은 하나 없이 신선 같은 상호가 된다.
세 분 벗들이 아무렇게나 내놓는 언어는 모두 해타가 된다. 헤아릴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법어이다. 향기로운 잔은 돌고 돈다. 주향은 순리를 알고 육신에 스며든다. 향이 스민 육신은 혼돈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不慍의 잔에 내 잔을 부대면 나도 따라서 耳順을 흉내내고, 홍선생의 잔에 내 잔을 대면 내 안도 따라 너른 바다가 된다. 말씀 없는 김선생은 눈빛만 스쳐도 맑은 얼굴에 기러기가 난다. 비로산장에서 만나는 바람도 풀도 꽃도 나무도 모두가 진리의 빛으로 충만하다.
동이가 빈 것도 안주가 다한 것도 잊고 있을 때, 여인은 어제쯤 싹틔웠을 애기열무에 간장을 슬쩍 뿌려 내왔다. 어린 열무의 어여쁜 모습을 보자 오래 전에 꽁보리밥에 넣어 비벼 먹었던 어느 산골의 오찬이 생각난다. 이마가 맑은 벗들에게 들려줄 얘깃거리가 될 법해서 꺼냈더니 김선생이 특히 좋아했다. 아, 맑은 이들은 맑은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어느덧 활엽수 사이로 햇살이 사선을 그으며 내리꽂는다. 바람에 바르르 떨리는 싱그러운 나뭇잎마다 찬란한 빛이 부서진다. 우리는 일어설 때가 언제인가를 안다. 거나할 만큼 마신 것도 아니라 흐르는 물이 다 보이듯이 가야할 곳을 다 안다. 세심정에서는 물이 마음을 씻어 주더니 비로산장에서는 향기로운 벗님네의 말씀이 우울도 탐욕도 다 헹구어낸다. 돌아오는 길에 햇살은 나뭇잎에 더욱 반짝이고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2011. 8. 2.)
아침에 동쪽 하늘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볕을 한 줌이라도 내려주시려나. 그러나 어느새 다시 구름이 검은 치맛자락을 두르더니 이내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올여름 하늘은 우울하다. 우울을 잔뜩 감추어 두었다가 날마다 지상에 흩뿌린다. 그래서 올여름은 지상까지 우울하다.
**** 신문사의 실수로 不慍선생의 아호가 '불온' 혹은 '不?'으로 표현 되어 선생님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습니다. 문화부장으로 부터 다음과 같은 사과의 전문이 왔습니다. <이방주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중부매일 서인석 문화체육교육부장입니다. 오늘 보내주신 에세이 본문중 '불온'이라는 한문이 컴퓨터 상에 호환이 안되어 한글로 나가는 점 널리 이해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벗님네야, 벗님네야-비로산장에서-
에세이 뜨락-이방주
2011년 09월 01일 (목) 21:02:10 지면보기 10면
중부매일 jb@jbnews.com
습습한 대기가 권태로 투실투실 묻어나는 휴가 둘째 날 아침이다. 이런 지독한 권태로움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하는 가난한 궁리가 나를 더욱 권태롭게 할 때 친구 不? 선생이 전화를 울렸다.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불온의 엄한 분부대로 목적도 방향도 모른 채 나의 늙은 나귀를 그의 마당에 등대시켰다. 마당에서 만난 불온은 경쾌해 보였다. 엷은 담배연기가 허공에 그려놓은 그림은 그대로 한 폭의 예술이다. 그것도 잠깐, 맑은 하늘아래에서 파르스름하던 연기는 바람에 날리는 는개에 젖어 젖빛처럼 뿌옇게 변해 버린다.
불온은 아직 감추어 두고 싶은 재미스러운 설계를 가지고 있는지 가벼운 흥분이 안경 너머에 숨어 있다. 친구 홍 선생이 도착한 후 나는 비로소 나귀의 불구멍에 키를 꽂아 힘을 넣었다. 낡은 무소는 마치 우주로 날아가기나 할 듯이 '부르릉' 영각을 한다. 가는 길에 친구 김 선생을 만나자 그제야 속리산을 일러 주었다.
일주문에 도착했을 때도 는개인지 이슬비인지 자꾸 안경알을 흐린다. 우산을 써야할지 말아야할지를 정하지 못하는 것도 답답하다. 그러나 그런 빗속에서도 옷자락마다 묻어 있던 권태가 슬금슬금 달아나는 것 같았다. 세심정이 있는 금강골의 맑은 물소리에 대한 기대가 이미 우울을 쫓아낸 것일까?
세심정 주막집 주인은 출타하고 없다. 비 내리는 아침에 누가 여길 오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왔다. 마당에는 비에 젖은 탁자들이 퉁퉁 불어 있고, 일산은 가릴 햇빛이 없어 축 쳐진 어깨를 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주인처럼 마당에 짐을 풀고 이것도 쥐어보고 저것도 만져보며 서성거렸다.
금강골에서 곤두박질치며 쏟아지는 물이 으르렁거린다. 물은 원만한 바위를 돌아내릴 때는 펑퍼지고, 모나고 성질 사나운 바위를 지날 때는 소쿠라진다. 물은 때로 쪽빛이다가 때로 하얗게 부서진다. 도시의 하늘은 우울을 쏟아내는데 이곳의 하늘은 도시인의 우울을 씻어낸다. 그래서 도시인은 이곳을 찾는다.
불온은 장수처럼 비로산장 진격을 명하였다. 새로운 작전은 궁금해 할 것도 검증할 필요도 없다. 우리 셋은 그냥 그의 엄명에 순종하는 행복한 병사가 된다. 금강골에 넌출지는 물방울에 가랑이를 적시는 것도 또한 천진하게 늙어가는 이들의 사는 재미이다.
절벽에 매달린 산장에는 초록을 닮은 얼굴들이 게으른 조반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게으름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는개는 아직도 날리는지 잦았는지 계곡에 놓인 들마루에 물기가 촉촉하다. 성난 듯 쏟아져 소쿠라지던 금강골 계수도 욕심을 버리고 비로산장 앞에서는 티 없이 모래를 씻으며 잔잔하게 괴었다. 나뭇잎이 떨어져 수면에서 빙글빙글 탑돌이를 한다. 나도 따라 돈다. 가슴이 수면에 가라앉은 산그늘처럼 한가롭다.
보살 같은 미소를 머금은 여인이 권하는 대로 누다락에 상을 펴고 앉았다. 산에서 바람이 내려와 머리에 가슴에 쌓인 세상의 먼지를 씻어간다. 바위틈을 흐르는 물소리가 자분자분 금강경을 왼다.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이 이렇게 고요했을까? 세심정에서 으르렁거리며 호령하던 염불이 불과 천여 보 올라온 이곳 비로산장에서는 달래듯 어루만지듯 고요하다. 여인이 상을 보아 온다. 도토리묵무침, 감자전이 천년의 세월을 되돌아간 듯 고즈넉하다. 조롱박이 동동 뜨는 동이에는 색깔 좋은 향이 가득하다. 이른바 비로산장 선약이다. 초록으로 잠긴 하늘에 발그레한 꽃노을이 비쳤다. 벗들은 하나 없이 신선 같은 상호가 된다.
세 분 벗들이 아무렇게나 내놓는 언어는 모두 해타가 된다. 헤아릴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법어이다. 향기로운 잔은 돌고 돈다. 주향은 순리를 알고 육신에 스며든다. 향이 스민 육신은 혼돈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不?의 잔에 내 잔을 부대면 나도 따라서 이순(耳順)을 흉내 내고, 홍의 잔에 내 잔을 대면 내 안도 따라 너른 바다가 된다. 말씀 없는 김은 눈빛만 스쳐도 맑은 얼굴에 기러기가 난다. 비로산장에서 만나는 바람도 풀도 꽃도 나무도 모두가 진리의 빛으로 충만하다.
동이가 빈 것도 안주가 다한 것도 잊고 있을 때, 여인은 어제쯤 싹틔웠을 애기열무를 간장에 절여 왔다. 어린 열무의 어여쁜 모습을 보자 오래 전에 꽁보리밥에 넣어 비벼 먹었던 어느 산골에서 받았던 생애 최고의 오찬이 생각난다. 이마가 맑은 벗들에게 들려줄 얘깃거리가 될 법해서 꺼냈더니 김이 특히 좋아했다. 아, 맑은 이들은 맑은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어느덧 활엽수 사이로 햇살이 사선을 그으며 내리꽂는다. 바람에 바르르 떨리는 싱그러운 나뭇잎마다 찬란한 빛이 부서진다. 우리는 일어설 때가 언제인가를 안다. 거나할 만큼 마신 것도 아니라 흐르는 물이 다 보이듯이 가야할 곳을 다 안다. 세심정에서는 물이 마음을 씻어 주더니 비로산장에서는 향기로운 벗님네의 말씀이 우울도 탐욕도 다 헹구어낸다. 돌아오는 길에 햇살은 나뭇잎에 더욱 반짝이고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한국수필' 신인상(1998), 충북수필문학상(2007) 수상
▶한국수필작가회 회원, 내륙문학회원, 충북수필문학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주간 역임, 내륙문학회장 역임
▶수필집 '축 읽는 아이', '손맛', 칼럼집 '여시들의 반란', 편저 '우리 문학의 숲 윤지경전'
▶충북고등학교 교사
▶nrb2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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