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관사에 머무는 동안은 하루에 서너 번 정도는 지독하게 고독한 나를 발견한다. 변기에 앉아 있는데 무릎 위에 신문이 없다. 거의 삼십년 버릇이기 때문에 신문 없이 앉아 있으면 비로소 내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앉아 있는 자리가 그렇게 낯설게 느껴질 수가 없다. 당연히 일이 잘 풀릴 까닭이 없다. 그래서 대신 각종 문예지를 갖다 놓고 내내 단골 필자인 이들의 감동없는 수필을 읽는다. 더 막힌다. 그러다가 무명이면서도 좋은 작품을 만나면 불경스러운 내 자세 때문에 작가에게 한없이 죄스럽다. 하늘 같이 높은 유리창으로 햇살이 조금 비친다. 이때 지독하게 고독하다. 정말로 막힘만큼 고독하다.
쌀을 한 줌 씻어 등산용 코펠에 한 끼 밥을 지어서 먹다 보면, 코펠 바닥에 밥띠기 몇 알이 눌어서 악착같이 붙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쌀 한 톨이라도 버리면 안 된다는, 그야말로 밥띠기처럼 눌어붙은 내 이념 때문에 어떻게든 떼어서 입어 넣어야 한다. 얇은 코펠 바닥에 붙은 눌은밥띠기를 숟가락으로 긁어서 뗄 때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는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좁은 주방 천장을 쩌렁쩌렁 울린다. 마치 지축을 울릴 듯하다. 잠시 상념에 잠겨 주방 구석 여기저기에 머물러 있는 소리를 죽인다. 주방 창틈으로 비치는 한 줄기 햇살을 바라보며 심각한 고독을 발견한다. 정말로 소리만큼 고독하다.
마당을 지나 연구실로 출근하면서 아침 햇살에 곱게 빛나는 노란 자물통으로 현관문을 철컥 잠글 때 또 한번 고독하다. 이화령을 넘어오는 아침햇살이 귓불을 지나 등을 따습게 달구는데도 고독의 공간은 그 온기만큼 점점 넓어진다. 퇴근하면서 종일 햇살에 달구어져서 따끈따끈한 자물통을 비틀어 열 때 또 고독하다. 자물통을 손에 들고 악희봉을 바라본다. 거뭇한 능선으로 지는 노을이 찬란하다. 노을빛이 자물통에 반사한다. 노란 자물통에는 고독이 너덜너덜 묻어 있다. 내 얼굴에 온통 고독을 반사한다. 정말로 햇살만큼 고독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나이에 고독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늘 혼자 살아야하는 독신인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한순간뿐인 나의 고독을 견디어 낸다. 내게는 술에 취하면 문자를 보낼 아내도 있고, ‘가을이 참 예뻐요.’라거나, ‘저녁은 드셨어요.’하고 문자를 보내는 딸내미도 있고, ‘서울은 스모그예요.’라거나, ‘운전 조심하세요.’라고 일러주는 아들도 있고, 막 잠들려고 할 때 ‘안녕히 주무세요.’하고 심술 섞어 문자를 보내는 아리따운 후배나, 술이 그리울 때를 용하게 알고 ‘형, 소주한 잔 해야지요.’하는 반가운 전화를 보내는 후배도 있지 않은가? 또 ‘노가리회’나 ‘좋은 사람들의 모임’ 같이 막 지껄여도 욕할 사람 없는 친구들의 모임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문학’이란 가리개도 있지 않은가? 좀 허위적이기는 하지만 찬란한 가리개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의 고독은 아침 햇살만큼 사치스러운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화령 솔잎에 비친 아침햇살처럼 은은하게 퍼지는 삶의 향기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오늘도 이화령에는 아침 햇살이 곱다. 참 곱다. 나의 고독만큼 곱다.
(2006.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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