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껍질벗기(깨달음)

蘭에 물을 주다 보니

느림보 이방주 2011. 4. 27. 16:07

 

지난 삼월 친구들로부터 전근 축하의 蘭을 받았는데, 어느새 그 녀석들이 먼지를 보얗게 쓰고 있다. 달포가 넘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그 아가들에게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나 보다. 아침햇살은 찬란한데 윤기 없는 잎줄기가 안쓰럽다.

 

우선 화분들을 밖에 내 놓았다. 신선한 공기만 마셔도 대번에 생기가 돈다. 양동이에 물을 가득 받아 화분이 잠길 정도로 담갔다. 얼마나 목마르게 물을 기다렸을까? 이제 뿌리가 물을 흠씬 빨아들일 것이다. 물뿌리개를 찾았다. 가능한 가장 높은 곳에서 물을 뿌려 주었다. 하늘이 내리는 은총의 비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먼지가 깨끗이 씻겨 내린다. 잎줄기에 구르는 물방울에 비치는 햇살이 영롱하다. 어느새 푸르름이 더하고 생기가 넘친다. 시든 꽃대를 떼어내고 보드라운 종이에 물을 축여 잎줄기에 남은 먼지를 닦아냈다. 흠뻑 물을 뿌리니 갓 씻은 여인의 머릿결처럼 정갈하다.

 

물기가 어느 정도 빠질 때를 기다려 책상에 올려놓으니 연구실의 분위기까지 신선해 지는 기분이다. 내친 김에 다른 몇 개의 화분에도 물을 주고 먼지를 닦아 냈다. 시든 잎이나 꽃대를 손질하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죽은 촉이 뿌리째 그대로 있었다. 살며시 들어 올려 보니까 뿌리가 고스란히 뽑힌다. 주검은 아주 가벼웠다. 그렇게 인정없이 뽑아버리는 것을 난은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숨을 거둔 사람과 한방에서 기거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누군가 집에서도 그렇게 자상하냐고 묻는다. 그래 맞아. 오늘은 몇 분 되지도 않지만 집에 있는 난도 손질해 보자. 특히 나의 작은 작품집 <손맛>을 출간했을 때 친구들이 보내온 난 화분이 촉이 벌어 포화지경인 것이 생각났다.

 

화원에 가서 화분과 분갈이에 쓸 난석을 샀다. 난 화분을 헐어 세 촉으로 나누었다. 죽은 뿌리를 자르고 썩은 곳을 도려내고 물에 씻어 나란히 뉘어 놓으니, 꼭 수술 받는 환자처럼 말이 없다. 먼저 바닥에 굵직한 난석을 깔고 잠아(潛芽)를 다치지 않도록 화분에 옮겨 물에 씻은 중간 난석을 채워 촉을 세웠다. 마지막 난석으로 마무리하여 물에 담가 충분히 흡수된 다음 볕이 직접 들지 않는 곳에 나란히 놓았다. 금방 생기가 돈다. 시들한 줄기가 노각처럼 투박해 보이더니 방금 나온 새순처럼 연초록이 된다. 다른 난분도 수술하여 분갈이를 하고 물을 주어 나란히 정렬해 놓았다. 아파트에서나 볼 수 있는 하늘 뜨락에 만들어 놓은 작은 화원이 갑자기 풍성해진 기분이다.

 

나는 금방 새순이 돋을 것 같이 생명력이 넘치는 난을 바라보며 죄의식에 빠졌다. 그동안 몇 분 되지도 않는 아가들에게 너무 무심했었다. 나의 나태가 다른 생명을 핍박한 것이다. 내가 돌볼 수 있는 생명들, 내가 한걸음만 앞으로 내디디면 윤기 있는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이들에 대한 비정함은 폭력이고 횡포라고 생각되었다. 이것도 사실은 권력이라면 작은 권력이다. 

 

난을 자연에 그대로 두었다면 제 뜻대로 비를 맞고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을 가려 받으며 제 삶은 살았을 것이다. 깨끗한 흙에 뿌리를 내리고 제 몸에 맞는 물만 길어 올려 제 나름의 꽃을 피우고 향기를 은은하게 내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은 난을 지배하고 몸을 변형시키고 제가 필요할 때를 맞춰 꽃을 피우기도 한다. 인색한 나는 사십여 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뿌려주지 않았다. 난에 대한 폭력이다.

 

권력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사랑으로 나누어주는 것이 권력이다. 독선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폭력이다. 돈의 힘이든 앎의 힘이든 가진 사람이 사랑으로 나누어주는 것이 권력이다. 힘을 나누어 세상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권력이다. 사랑의 대상은 겨레붙이든 다른 민족이든, 인류든 다른 생명이든 가릴 것이 없다.

 

미래는 권력으로 남을 지배하는 역사가 아니라, 사랑으로 남과 상생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권력을 세상에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이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하고 미래의 역사를 주도할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역사에 대한 기대도 지나친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메마른 난에 물을 주다 보니, 주변에 있는 다른 생명까지 돌아보게 된다. 그저 물이나 주자고 시작한 일인데 생명의 소중함까지 깨닫는다. 생명에 부여된 그들의 영혼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들과 함께 호흡을 나누고 함께 생명수를 나누는 섭리를 발견한다. 남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고 나를 위하여 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 발붙이고 상생하고 공존하는 생명임을 알게 된다.

 

잎새에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새롭게 시작할 일을 찾아보게 된다. 어떤 책을 읽을까 서재를 뒤적이고, 새로운 주제로 연작 수필을 써 볼까, 다른 장르에도 접근해 볼까 궁리하게 된다. 생활의 사사(些事)에서 창조적 의미를 발견했다는 어느 소설가처럼 하찮은 일상의 작은 내디딤으로 더 넓은 하늘을,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삶의 철학을 배운다.

                                                                    (2011. 4. 27.)

 

蘭에 물을 주다보니
에세이 뜨락-이방주
2011년 05월 12일 (목) 21:08:14 지면보기 11면 중부매일 jb@jbnews.com

지난 삼월 친구들로부터 전근 축하의 난(蘭)을 받았는데, 어느새 그 녀석들이 먼지를 보얗게 쓰고 있다. 달포가 넘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그 아가들에게 눈길을 줄 여유가 없었나 보다. 아침햇살은 찬란한데 윤기 없는 잎줄기가 안쓰럽다.

우선 화분들을 밖에 내놓았다. 신선한 공기만 마셔도 대번에 생기가 돈다. 양동이에 물을 가득 받아 화분이 잠길 정도로 담갔다. 얼마나 목마르게 물을 기다렸을까? 이제 뿌리가 물을 흠씬 빨아들일 것이다. 물뿌리개를 찾았다. 가능한 가장 높은 곳에서 물을 뿌려 주었다. 하늘이 내리는 은총의 비라도 되는듯이 말이다. 먼지가 깨끗이 씻겨내린다. 잎줄기에 구르는 물방울에 비치는 햇살이 영롱하다. 어느새 푸르름이 더하고 생기가 넘친다. 시든 꽃대를 떼어내고 보드라운 종이에 물을 축여 잎줄기에 남은 먼지를 닦아냈다. 흠뻑 물을 뿌리니 갓 씻은 여인의 머릿결처럼 정갈하다.

물기가 어느 정도 빠질 때를 기다려 책상에 올려놓으니 연구실의 분위기까지 신선해지는 기분이다. 내친 김에 다른 몇 개의 화분에도 물을 주고 먼지를 닦아냈다. 시든 잎이나 꽃대를 손질하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죽은 촉이 뿌리째 그대로 있었다. 살며시 들어올려 보니까 뿌리가 고스란히 뽑힌다. 주검은 아주 가벼웠다. 그렇게 인정 없이 뽑아버리는 것을 난은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숨을 거둔 사람과 한방에서 기거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누군가 집에서도 그렇게 자상하냐고 묻는다. 그래 맞아. 오늘은 몇 분 되지도 않지만 집에 있는 난도 손질해 보자. 특히 나의 작은 작품집 '손맛'을 출간했을 때 친구들이 보내온 난 화분이 촉이 벌어 포화지경인 것이 생각났다.

화원에 가서 화분과 분갈이에 쓸 난석을 샀다. 난 화분을 헐어 세 촉으로 나누었다. 죽은 뿌리를 자르고 썩은 곳을 도려내고 물에 씻어 나란히 뉘어놓으니, 꼭 수술 받는 환자처럼 말이 없다. 먼저 바닥에 굵직한 난석을 깔고 잠아(潛芽)를 다치지 않도록 화분에 옮겨 물에 씻은 중간 난석을 채워 촉을 세웠다. 마지막 난석으로 마무리하여 물에 담가 충분히 흡수된 다음 볕이 직접 들지 않는 곳에 나란히 놓았다. 금방 생기가 돈다. 시들한 줄기가 노각처럼 투박해 보이더니 방금 나온 새순처럼 연초록이 된다. 다른 난분도 수술하여 분갈이를 하고 물을 주어 나란히 정렬해 놓았다. 아파트에서나 볼 수 있는 하늘 뜨락에 만들어놓은 작은 화원이 갑자기 풍성해진 기분이다.

   
나는 금방 새순이 돋을 것 같이 생명력이 넘치는 난을 바라보며 죄의식에 빠졌다. 그동안 몇 분 되지도 않는 아가들에게 너무 무심했었다. 나의 나태가 다른 생명을 핍박한 것이다. 내가 돌볼 수 있는 생명들, 내가 한걸음만 앞으로 내디디면 윤기있는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이들에 대한 비정함은 폭력이고 횡포라고 생각되었다. 이것도 사실은 권력이라면 작은 권력이다.

난을 자연에 그대로 두었다면 제 뜻대로 비를 맞고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을 가려 받으며 제 삶은 살았을 것이다. 깨끗한 흙에 뿌리를 내리고 제 몸에 맞는 물만 길어 올려 제 나름의 꽃을 피우고 향기를 은은하게 내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은 난을 지배하고 몸을 변형시키고 제가 필요할 때를 맞춰 꽃을 피우기도 한다. 인색한 나는 사십여일동안이나 물 한 모금 뿌려주지 않았다. 난에 대한 폭력이다.

권력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사랑으로 나누어주는 것이 권력이다. 독선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폭력이다. 돈의 힘이든 앎의 힘이든 가진 사람이 사랑으로 나누어주는 것이 권력이다. 힘을 나누어 세상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권력이다. 사랑의 대상은 겨레붙이든 다른 민족이든, 인류든 다른 생명이든 가릴 것이 없다.

미래는 권력으로 남을 지배하는 역사가 아니라 사랑으로 남과 상생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권력을 세상에 나누어줄 줄 아는 사람이 더 많은 권력을 소유하고 미래의 역사를 주도할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역사에 대한 기대도 지나친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메마른 난에 물을 주다 보니, 주변에 있는 다른 생명까지 돌아보게 된다. 그저 물이나 주자고 시작한 일인데 생명의 소중함까지 깨닫는다. 생명에 부여된 그들의 영혼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들과 함께 호흡을 나누고 함께 생명수를 나누는 섭리를 발견한다. 남을 위하여 내가 존재하고 나를 위하여 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 발붙이고 상생하고 공존하는 생명임을 알게 된다.

잎새에 부서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새롭게 시작할 일을 찾아보게 된다. 어떤 책을 읽을까 서재를 뒤적이고, 새로운 주제로 연작 수필을 써볼까, 다른 장르에도 접근해볼까 궁리하게 된다. 생활의 사사(些事)에서 창조적 의미를 발견했다는 어느 소설가처럼 하찮은 일상의 작은 내디딤으로 더 넓은 하늘을,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삶의 철학을 배운다.

 

   
이방주

▶'한국수필' 신인상(1998), 충북수필문학상(2007) 수상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회원, 내륙문학회원, 충북수필문학회원
▶충북수필문학회 주간 역임, 내륙문학회장 역임
▶수필집 '축 읽는 아이', '손맛', 칼럼집 '여시들의 반란, 편저 '우리 문학의 숲 윤지경전
▶충북고등학교 교사
▶nrb2000@hanmail.net